공연
극단 산수유에서 24년 초연한 연극 <고트>(류주연 연출)가 25년 10월 25일부터 11월 2일까지 산울림 소극장에서 재공연되었다. 초연의 호평이 있던 터에 기대를 안고 11월 첫날 극단 산울림을 찾았다. 극단 산울림을 가면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그곳은 한국 연극사의 냄새를 진하게 풍긴다는 것이다. 객석은 거의 만석이었고 평균 연령이 대학로 관객보다 훨씬 많아 보였다.
작품 <고트>는 독일의 작가 겸 변호사인 페르디난트 폰 시라흐(Ferdinand von Schirach)의 작품이다. 변호사답게 작품에서 요즘 사회적으로 쟁점이 되고 있는 사망 조력의 문제를 다룬다. 사망 조력이란 단어는 다소 낯설게 들릴 수 있으나 존엄사 또는 안락사를 뜻한다. 입장 전에 제공된 안내문에, 이 연극에서 안락사나 존엄사 대신 사망 조력으로 표현하는 이유에 대해, 이번 공연의 연출과 배우가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겠다는 표명이라고 설명이 나와 있다.
존엄사든 사망 조력이든 이 이슈는 종교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다. 제목 독일어 Gott는 곧 신(God)을 의미하므로, 연극에서 사망 조력을 종교와 연계되어 문제를 제기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독일을 비롯한 서양에서 기독교의 위상은 사회 전반의 이념을 지배하고 있고, 종교의 주요 주제가 곧 죽음 이후의 세계이므로, 사망 조력을 신과의 관계에서 파악할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주제이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깊이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이가 들거나 심각한 병에 걸리면 죽음은 실재적인 문제로 다가온다. 이러한 죽음에 있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자 할 때, 도움을 주는 행위가 의학적, 법률적, 신학적으로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는 큰 질문으로 남는다.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웰다잉과 존엄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우리 사회에서, <고트>는 시의적절한 화두를 던진다.
공청회의 무대
소극장 산울림에 들어서자, 반원형의 객석 아래로 조그마한 무대가 놓여있다. 저 조그만 공간에서 그간 얼마나 다양한 연극 세계가 펼쳐졌을까. 오늘 관객의 눈앞에 드러난 무대는 사실적이다. 세 개의 탁자와 열 개의 의자가 관객을 염두에 둔 방향으로 무대 전체에 펼쳐져 있고, 배경은 근엄한 법정처럼 원목풍의 벽으로 장식되어 있다. 공연 시작 전에 리모컨을 든 관계자가 동영상을 틀어준다. 벽에 투사된 동영상은 자살과 자기 선택사 등 다양한 사망 조력에 관한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객석 조명이 여전히 밝은데 인물들이 한 명씩 입장한다.
이 연극은 한 마디로 공청회 형식의 토론극이다. 78세의 남자 주인공 리하르트가 원하는 사망 조력에 대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기의 견해를 말하고 변호사와 윤리위원인 켈러가 보충 질문을 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2020년 베를린에서 베를리너 앙상블이 초연했을 당시, 무대는 의사당의 단상처럼 3단 구조의 목조 세트로 구성되었으나 이러한 계단식 구조로 인해 연기자의 움직임에 제약이 있었다는 지적이 있었다.
인물, 죽음을 판단해야 하는 사람들
인물을 살펴보면 사망 조력을 원하는 리하르트 게르트너(Richard Gärtner)가 있다. 그리고 비글러(Biegler) 변호사, 주교이자 신학 전문자문위원인 틸(Thiel), 의사이자 의학 전문자문위원 슈페르링(Sperling), 윤리위원회 위원 켈러(Keller), 윤리위원회 위원장 슈미트(Schmidt), 안과의사 브란트(Brandt), 판자이자 법률 전문 자문위원인 리텐(Litten)이 있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건강한 리하르트는 2년 전 아내를 사별한 후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잃고 사망 조력을 통해 삶을 마감하고자 한다. 그는 무자비한 자살을 하기는 싫고 품위있는 존엄사를 하고 싶어 한다. 하루하루가 아무런 가치 없이 죽는 날만 기다린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렇게 주장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의약품 의료기기 연방 연구소에 죽음을 위한 처방전을 요구하지만 기각된다. 이에 리하르트는 윤리위원회에 청원하고 의사, 변호사, 법학자, 의학자, 종교인 등의 윤리위원회 위원들이 모여 토론을 벌인다.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사망 조력의 찬반을 설파한 후, 위원장은 관객을 향해 찬반 의사를 묻는 것으로 윤리위원회는 폐회한다.
원작에서 리하르트 게르트너가 이미 2년 전에 사망했고, 공청회에 등장한 것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게르트너(Elisabeth Gärtner)다. 국내 공연에서는 아내와 남편이 바뀐다. 원작에서 아내 엘리자베스는 건강상 크게 문제는 없지만, 남편 사망 이후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자발적으로 죽음에 이르고자 한다. 무슨 이유로 국내 공연에서 아내와 남편이 바뀌었을까? 뚜렷한 이유를 찾기가 어렵지만, 그렇게 바뀌었다고 해서 내용상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혹시 자기 결정권이 여전히 남성 중심적으로 이해되는 사회적 현실을 반영했을 수 있다. 다만 통계적으로 노부부 가운데 한쪽이 먼저 갔을 때, 남은 생을 좀 덜 힘겹고 잘 살아내는 것은 남편보다는 아내 쪽이다.
무대의 인물들은 사망 조력에 어떤 입장인가? 비글러는 변호사로서, 리하르트의 요청을 법률적 측면에서 대리하고 옹호한다. 자기 결정권을 강조하며, 조력자 자살 허용 여부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이다. 안과의사 브란트는 리하르트의 주치의지만 리하르트의 도움 요청을 거절한다. 그는 의료 윤리와 환자 요청 사이에서 윤리 쪽에 손을 든다. 법률학자인 리텐은 자발적 죽음 혹은 사망 조력에 대한 법률적 근거와 그 한계를 제시한다. 법률적 틀에서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는가를 논의하는 인물이다. 슈페르링은 의료 전문가(의사 혹은 의학적 자문가)로, 이 사안에 대해 의료적·생물학적 측면에서 의견을 제시한다. 사망 조력 요청자가 건강함에도 죽음을 원한다는 상황을 의료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다룬다. 주교인 틸은 죽음, 생명, 인간의 의지 등에 대해 종교 철학적 관점에서 언급한다. 그는 죽음에 관한 신학적 질문, “생명은 누구의 것인가?” 등을 제기한다. 켈러는 윤리위원회 일원으로, 논의 과정에서 중립적 혹은 검토자의 위치에 있다. 그는 다양한 전문가의 논거를 듣고, 관객(혹은 위원회)의 결정으로 이어지게 하는 역할을 한다. 윤리위원회 위원장인 슈미트는 사회를 보며 공청회를 이끌어간다.
연극의 줄거리
독일의 윤리위원회에서 회의가 열린다. 장소는 베를린-브란덴부르크 학술원, 라이프니츠 홀이다. 공청회에 참여한 관객은 다음의 질문을 받는다. “리하르트 씨에게 스스로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펜토바르비탈을 제공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윤리위원회 의장은 이렇게 덧붙인다. “건강한 사람에게 치명적인 약을 주는 것이 옳을까요? 당신이 의사라면, 리하르트 씨에게 그 약을 주겠습니까? 그 약이 그를 죽게 할 거라는 걸 알고도 말입니다. 리하르트 씨는 78세입니다. 그럼 30세의 여성에게는 그 약을 주겠습니까? 이 질문을 고려해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퇴직한 건축가 리하르트 게르트너에게는 단 하나의 소원이 있을 뿐이다. 그는 죽고 싶다. 사랑하던 아내가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뒤, 그에게 살아간다는 것은 오히려 고역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합법적으로 약을 요구하지만, 그 요청은 거절당한다. 그는 윤리위원회에 청원했고 윤리위원회는 이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한자리에 모여 논쟁을 벌인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는가?” “의사는 누군가의 자살을 도와줄 수 있는가?” “우리의 삶은 누구의 것인가? 우리 자신의 것인가, 국가의 것인가, 아니면 신의 것인가?” 등을 질문하고 토론한다.
관객의 역할
이 작품은 극적 인물 변화 중심이라기보다는 논쟁·토론 구조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자기 전문 분야의 입장을 대표하는 인물들은 삶의 결정권은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해 의견을 말한다. 변호사, 의사, 신학자, 법률가 등이 사망 조력에 대한 논거를 제시한다. 그렇지만 연극에서 그들은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않는다. 모든 논쟁이 끝난 후, 결정을 내리는 역할은 관객에게 주어진다.
작가 페르디난트 폰 시라흐는 <Gott>의 전작 <테러>(Terror)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 작품에서도 관객은 중심 역할을 한다. 윤리위원회의 회의가 끝나는 순간, 리하르트 게르트너의 소원이 이루어져야 하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사람은 바로 관객이다. 실제로 연극이 끝나고 사회자 역의 슈미트는 더욱 밝아진 객석의 관객을 향해 지금까지 연극(공청회)를 보고 리하르트의 의견에 대해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거수를 들어 의사를 표명해 달라고 말한다. 나의 기억이 맞다면, 사회자 슈미트는 그날 총관객은 89명이었고 결과는 찬성이 41명 반대가 31명 기권이 17명이라고 말하면서 10명의 차이는 처음이라고 했다. 이전 공연도 찬성이 좀 많긴 했지만 거의 비슷한 숫자였다는 것이다.
나는 찬성에 손을 들었지만, 곧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건강한 사람에게 삶의 동기 부여가 충분히 가능하진 않을지 하는 생각에 감정이 복잡해졌다. 이성적으로는 개인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이면에 깔린 리하르트의 깊은 상실감이나 절망감을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찬반을 넘어서, 생명을 대하는 인간의 도리라는 더 큰 질문에 봉착한 기분이었다. 인물 리하르트와 진지한 대화를 해보면 어떨까? 그가 아내와 함께했던 과거의 삶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 현재에 대해 무기력한 분명한 개인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고트>는 2시간 정도의 지루하리만큼 긴 논쟁극이다. 인물이 자기 순서가 되어 말하기 시작하면 길게 이어져 차례를 기다리는 다른 배우들은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을 것이다. 공청회 형식의 연극에서 배우들은 동적인 움직임보다는 대사를 통한 논리 전개에 집중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배우들의 정적인 몸짓에서 더 많은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각 분야를 대변하는 인물들이 의자에 앉아 있거나, 혹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할 때 보였던 미묘한 시선 처리, 손동작의 변화, 또는 어깨의 긴장감 등이 각 인물이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자세로 다가왔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공청회 <고트>는 극적 서사보다는 철저히 논리적이고 윤리적인 논쟁의 장을 제시한다. 관객은 감정이 아닌 이성을 통해 극에 참여하고, 마지막에 각자는 자신의 판단을 표명한다. 이런 방식의 결말은 제목 <Gott>와도 맞닿아 있다. 관객이 신의 자리를 대신해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순간, 우리는 신의 이름으로 인간을 판단하는 위험한 위치에 선다. <고트>는 이 불편한 자리로 우리를 불러세움으로써, 죽음의 문제를 타인의 것이 아닌 자신의 몫이 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