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2025년 11월 9일 일요일, 명동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도시는 인간의 욕망과 저주가 교차하는 무대다. 명동의 불빛 속으로 들어서며, 테베의 왕 라이오스를 마주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안트로폴리스II 라이오스> (각색·연출 김수정)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 작품은 독일 극작가 롤란트 쉼멜페니히(Roland Schimmelpfennig)의 5부 연작 중 2번째 작품으로, 2023년 9월 29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카린 바이어(Karin Beier)의 연출과 리나 베크만(Lina Beckmann)의 연기로 초연되었다.
한국에서는 1부 <안트로폴리스I 프롤로그/디오니소스>가 2025년 10월 10일부터 10월 26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되었고, 2부 <라이오스>가 2025년 11월 6일부터 11월 22일까지 공연되었다. 국립극단은 이 5부작을 2027년까지 완성할 계획이다.
제목 Anthropolis는 인간, 사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Anthropos와 도시, 도시 국가를 의미하는 Polis로 구성되어 ‘인간의 도시’ 또는 ‘인류의 도시’를 뜻한다. 이 용어는 주로 문명사회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인간의 본성과 도시 생활을 탐구하는 맥락에서 사용되는데, 작가는 특히 <안트로폴리스 5부작>에서 현대 사회의 모습을 고대 그리스 비극에 빗대어 표현한다.
도입 및 작품 배경
극장 안으로 들어서니 막이 내려져 있고, 제목이 막에 투영된 채 약간 시끄러운 노랫소리가 반복된다. 공연이 시작되자 전혜진 배우가 객석 뒤에서 등장한다. 배우는 객석을 통과하여 무대에 오르면서 인사를 한다. 일인극의 시작치고는 직접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긴 오버를 입고 군화를 신은 배우의 모습은 마치 아마존의 여전사 같다. 활기찬 몸짓과 음성 역시 그러하다.
배우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하는데, 마치 신화 강의를 듣는 듯하다. 라이오스의 조상인 카드모스가 아레스의 신성한 샘을 지키는 용을 죽인 후, 아레스의 분노를 산 카드모스와 그 후손은 대대로 불행의 저주를 받게 된다. 테베는 폭력과 희생 위에 세워졌고,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 역시 이 원죄로 인한 비극의 삶을 살게 된다. 원죄! 그것은 서양 문명을 지배하는 무의식이기도 하다.
신화 인물들에 대한 해석을 마친 후, 배우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인물로 변신한다. 라이오스의 아들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과 프로이트에 의해 잘 알려졌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라이오스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작가는 이 점에 착안하여 라이오스에 초점을 맞추고, 이들의 가문이 어쩌다가 신의 저주를 받았는지, 라이오스는 누구이며, 그는 왜 아들에게 죽어야 했는지 등을 현대적 감각으로 해석한다.
일인극
<안트로폴리스II 라이오스>의 특징 중 하나는 일인극이라는 점이다. 이 연극은 신화의 여러 인물과 관점을 한 배우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주는 다층적인 독백극이다. 이 공연에서 10년 만에 연극 무대에 복귀한 배우 전혜진은 라이오스뿐 아니라 이오카스테, 오이디푸스, 테베의 시민 등 다양한 인물을 가면 등의 소품 도움을 받아 목소리와 시점을 오가며 연기한다.
한 명의 배우가 해설과 모든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은 서사 속 다양한 시점과 목소리가 하나의 몸과 언어로 표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관객은 배우의 목소리, 몸짓, 시선 변화를 통해 여러 인물의 내면과 갈등을 즉각적으로 인지함으로서, 신화적, 심리적 복잡성을 단일한 연기의 선으로 집중하게 된다.
또한, 한 명의 배우가 고대 신화 속 인물과 거리는 물론 도시 이미지, 관객과의 상호작용 등 현대적 장치를 자유롭게 넘나들게 되므로, 관객은 과거와 현재, 신화와 현대가 한 몸에서 교차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관객의 시선과 심리적 몰입이 한 배우의 내면과 사건에 집중된다는 장점도 있다. 아울러 일인극은 관객과 배우 사이의 일대일 대면으로 극적 긴장감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여성 배우
독일 초연과 한국 공연 모두 주인공이 여성이다. 텍스트를 확인한 것은 아니나, 아마 텍스트 자체가 여성 주인공을 내세웠을 것이 분명하다. 고대 그리스 비극은 남성중심적이며, 비극의 인물인 라이오스나 오이디푸스 역시 남성이고 이오카스테는 수동적인 역할에 그치므로, 일반적으로 남성 배우가 주인공을 맡을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예상에서 벗어나 여성 배우를 내세웠을까?
라이오스 등 전체 인물을 여성 배우가 연기한다는 것은 젠더의 경계를 허무는 효과가 있다. 관객은 남성적 권력과 아버지-왕의 역할을 여성의 몸을 통해 재해석하면서 기존 신화에서의 권위와 권력 구조를 재고하게 된다. 가령 라이오스의 권력을 보여 주는 장면에서 여성 배우는 권력이 반드시 남성적이지 않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아울러 성별의 고정관념보다 심리적, 정서적 경험을 중심으로 극을 해석하게 되는 효과도 있다. 따라서 여성 배우는 캐스팅의 선택이 아니라, 신화적 남성 권력에 대한 현대적 질문이기도 하다. 독일이나 한국 공연에서 여성 주인공의 강인함이 남성과 견주어 손색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나, 한편으론 남성성을 모방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무대 구조
무대는 한 가운데에 열 개의 계단이 육중하게 솟아 있다. 계단의 맨 위에는 왕좌가 세워져 있고 왕관이 놓여있다. 배우는 이 계단을 오르락거리며 다양한 인물을 표현한다. 무대 구조는 인간 공동체 속에서 형성된 관계가 수직적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제시한다. 거대한 날개를 단 스핑크스를 표현할 때 배우는 더 높은 곳으로 상승하며, 스핑크스가 가장 높은 곳에서 인간의 모든 운명을 제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라이오스의 운명, 왕권, 신과 인간의 질서가 핵심 주제다. 무대의 상하 구조는 권력과 지위, 운명과 선택의 위계를 시각적으로 보여 준다. 상단이 신, 운명, 권력, 이상을 상징한다면 하단은 인간, 고통, 죽음, 현실을 상징한다. 이렇듯 계단은 신화적 비극의 구조 자체를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르는 자는 신의 자리를 꿈꾸지만, 내려가는 순간 인간의 비극을 맞이한다. 배우는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권력의 높낮이와 인간과 신의 갈등을 드러낸다. 상하의 공간은 심리적 갈등을 공간화하기도 한다. 오름이 욕망, 권력 추구, 자기실현이라면 내림은 죄책감, 두려움, 죽음과의 직면인 것이다. 계단은 또한 운명의 필연적 진행을 뜻한다. 오르거나 내리는 행위가 피할 수 없는 흐름으로,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가 맞닥뜨리는 운명적 사건을 시각화한다. 아울러 상하의 무대는 현대 사회에서 더욱 두드러진 세대, 남녀, 빈부 격차에 의해 생겨난 신계급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듯 상하 구조는 서사, 심리, 신화의 의미를 공간화하여, 관객이 배우의 움직임만으로도 이야기의 긴장과 구조를 이해하도록 하는 장치다.
한편, 양쪽으로 거대한 기둥이 세워진 무대는 고대 왕궁의 형태를 재현하면서도 거리의 소음, 스쿠터, 자동차, 케밥 가게 같은 현대적 감각과 결합되어 있어, 과거의 테베이자 우리가 사는 현대 도시를 동시에 구현한다.
조명과 영상은 배우의 신체와 음성 변화뿐 아니라 고요에서 긴장으로, 그리고 혼돈에 이르는 공간의 정서적 변화를 시각적으로 지원한다. 계단 위로 무대 안쪽에 설치된 스크린이, 거울이 되어 배우의 얼굴이 확대되어 비치는 장면이 있다. 자신과 직면하는 거울의 스크린은 스핑크스의 질문 “넌 누구냐?”에 대한 대답을 이미지화한 것으로 보인다.
신화의 의미
쉼멜페니히는 이 작품에서 현대의 문제를 신화에 기대어 인간 문제의 근원에 접근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융(Jung)이 언급한 신화는 집단 무의식이라는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 신화가 유럽인의 무의식을 건드린다고 할 수 있지만, 이 공연은 한국 관객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속의 폭력과 욕망의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현재에도 엄연히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신화를 배경 삼아 오늘날 우리의 삶을 조명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라이오스의 서사는 권력, 운명, 죄, 가족, 사랑, 죽음 같은 인간 보편의 문제를 상징하며, 신화 자체에 극적 구조와 심리적 긴장을 내장하고 있어 시대와 문화가 달라도 직관적으로 공감을 일으킨다.
고대 신화는 운명과 인간의 한계를 다루지만, 현대 연극에서는 이를 선택과 책임 문제로 확대한다. 라이오스가 운명을 피하려다 결국 자기 파멸로 가는 장면에서 인간 존재의 필연적 비극과 자기 결정을 동시에 보여 준다. 신화의 인물은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라 심리적, 사회적인 상징이다. 라이오스는 권력, 죄, 부성을, 스핑크스는 인간과 세계 사이의 시험과 문제를 상징한다. 이처럼 작가는 신화의 상징적 언어를 통해 관객에게 직관적이고 심층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줄거리
쉼멜페니히가 라이오스에게 시선을 돌린 것은 흥미롭다. 라이오스가 악행을 저질렀음에도 그는 대개 아들의 뒷전에 밀려있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남자 크리시포스를 유혹해 납치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죄로 저주를 초래했고, 이는 테베를 몰락의 길로 내몰고, 스핑크스의 출현을 불러왔다. 테베 비극의 씨앗은 이미 그에게 있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그의 죄가 아니라, 아버지의 욕망과 폭력에서 시작된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이야기는 선형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신화의 과거와 현대 감각이 뒤섞여 있다. 테베는 피비린내 나는 혼란의 시대를 겪고 있다. 폭력과 무질서가 난무하던 그때, 테베인은 망명 중이던 라브다코스의 아들 라이오스를 찾아 왕위에 앉힌다. 카드모스 왕가의 4세손인 그는 몰락 위기에 처한 테베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다. 그는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지만,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두려움에 떨며 아내와의 동침을 거부한다. 하지만 이오카스테의 유혹으로 아이를 잉태하고, 젊은 연인 크리시포스는 자살하고 만다. 라이오스는 자신의 권력과 생존을 위해 갓 태어난 아들을 죽이려 하지만, 그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한편,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출생과 운명을 모른 채 다른 가정에서 성장한다. 그는 고향을 떠나 자신의 운명을 피하려 하나, 결국 라이오스와 길에서 맞닥뜨리게 된다. 이 충돌은 단순한 아버지와 아들 간의 폭력적 사건이 아니라, 개인적 선택과 운명, 법과 권력이 얽힌 구조 속에서 벌어지는 필연으로 묘사된다.
라이오스는 자신의 권력과 욕망을 내려놓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며, 오이디푸스는 비극적 진실을 직면한다. 라이오스는 죽는 순간 상대의 얼굴이 곧 자신임을 알아차린다. 아들을 알아본 것이다. 무대의 스크린이 작동하여 거울에 비친 라이오스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그리고 양동이가 위에서 내려와 용의 피와 같은 푸른색 물감을 그의 몸에 쏟아붓는다. 이것이 곧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다.
라이오스가 죽음의 순간에 아들 오이디푸스를 알아차린 것은 결국 <안트로폴리스II 라이오스>가 단순한 신화 재현이 아니라, 운명과 선택, 권력과 책임, 성장과 시험이라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 문제를 신화적 원형 속에서 탐구하는 서사적 실험임을 알 수 있다.
공연 중에 시종일관 새가 우는 듯한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인물들의 주위를 배회하는 스핑크스의 소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리는 인간은 스핑크스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뜻하는 것일 게다. 여기서 스핑크스는 인간과 세계, 과거와 미래, 삶과 죽음을 동시에 상징하는 존재로서 오이디푸스를 시험한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면서 자신의 지혜와 인간성을 입증하고, 자신과 세계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다.
<안트로폴리스II 라이오스>는 단순한 고전 비극의 재해석을 넘어, 일인극의 집중도와 강렬한 무대 언어를 통해 현대인에게 질문을 던지는 서사적 실험이다. 여성 배우 전혜진은 권력과 운명이라는 신화적 복잡성을 몸으로 구현하며, 라이오스의 비극적 삶을 통해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 즉 운명에 맞서는 선택과 책임의 무게를 절실하게 느끼게 했다.
특히, 라이오스가 죽음의 순간에 아들을 알아차리는 장면은 스크린과 용의 피, 푸른 물감이라는 장치를 통해 자기 직면과 원죄의 청산이라는 극의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폭발시켰다. 이 공연은 과거 테베의 비극이 사실은 폭력과 욕망 위에 세워진 현대 도시, 즉 인간의 도시(Anthropolis)의 모습과 다름이 없음을 시사한다. 고전의 상징성을 현대적인 감각과 탁월한 연기로 조명한 이번 작품은 관객에게 깊은 사유의 시간을 선물했다.
국립극단이 앞으로 5부작 전체를 완성할 계획인 만큼, 앞으로 펼쳐질 테베 왕가의 남은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 <안트로폴리스> 시리즈가 그리스 비극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인간의 본성에 어떤 해답을 제시할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