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
삶에 집착할수록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은 참 묘한 역설이다. 아마도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종교와 철학, 예술이 끊임없이 죽음을 탐구해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죽음을 깊이 성찰할수록 우리는 오히려 현재의 삶에 진지해진다는 것이다.
2026년 1월 15일부터 2월 1일까지 ‘씨어터 쿰’에서 공연된 <취리히 여행> (극단 프랑코포니, 작가 장-브누아 파트리코(Jean-Benoît Patricot), 연출 까띠 라뺑(Cathy Rapin)/번역 임혜경)은 연극이라는 매체를 통해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는 일종의 죽음 리포트다. 이 작품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불치병으로 고통받던 배우 마이아 시몽(Maïa Simon)은 스스로 삶을 마감하기 위해 2007년 9월 스위스로 향했다. 당시 그녀의 마지막 여정을 동행했던 연출가 프랑크 베르티에(Franck Berthier)의 생생한 경험은 작가 파트리코의 펜을 거쳐 희곡으로 탄생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실제로 조력 자살을 돕는 단체들을 만나 실제 사례를 깊이 연구했다고 한다. 현장 중심의 텍스트를 무대로 들고 와서 배우들과 함께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이렇듯 작가는 책상에 앉아 자신에게 집중하여 외롭게 글을 쓰기보다는 연출가와 배우들과 소통하며 무대에서 실제로 감정이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실험하며 작품을 완성했다. 이 연극이 생생함의 두께가 더한 것은 이런 까닭이다.
작가 장-브누아 파트리코
영화, 소설, 극작가 등 전방위로 활동하는 파트리코가 극작가로서 두각을 나타낸 작품은 <소방관들>(PompierS, 2014)이다. 이어 <다리우스>(Darius, 2016)는 두랑스-보마르셰 SACD상을 수상했으며, 2016년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초연된 이후 파리와 순회공연으로 이어진다. 2021년에 초연된 <취리히 여행>은 CNL의 극작 지원을 받았으며, 2022년 아카데미 프랑세즈로부터 에밀 오제르 상을 수상하였다.
파트리코는 현재 프랑스 연극계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금기를 정면으로 다루는 용기 있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사회적 이슈나 실화를 바탕으로 관객에게 묵직한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스타일을 고수한다. 우리 사회가 외면하고 싶어 하거나 논쟁적인 주제를 파고드는 데 탁월한 작가로서 안락사, 성소수자, 현대인의 고독, 신체적 쇠락 등을 다룬다. <취리히 여행>에서 알 수 있듯 까치-천사 같은 환상적인 요소를 가미해,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능력도 뛰어나다.
또한, 파트리코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어디까지 결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작품을 시작한다. 가령, <삶을 선택하기>(Choisir de vivre, 2018)에서는 트랜스젠더 여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고, <취리히 여행>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과정을 다룬다. 즉 이들 작품에는 인물의 주체적 선택과 결정이라는 공통 분모의 주제가 자리하고 있다. 이렇듯 약사 출신의 작가는 인간이 중병에 걸리거나 심한 차별을 받는 등 취약한 순간에도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 노력하는 인물에게 주목한다.
그의 언어는 날카롭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렇다고 차갑지는 않다. 사실적이되 시적이고, 무거운 질문 속에서도 유머와 온기를 잃지 않는다. 죽음과 같은 무거운 주제지만 인물들 간의 따뜻한 유대감을 잃지 않는다. <취리히 여행>처럼 주인공은 아들, 며느리, 친구와의 관계를 통해, 죽음이라는 비극의 상황에서도 어떻게 인간다움이 생겨날 수 있는지 섬세하게 묘사한다. 불편한 진실을 따뜻하게 표현하는 그는 인간의 어두운 면을 직시할 때, 오히려 삶의 소중함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무대 및 연출 미학
1월 18일 토요일 3시, 공연장을 찾았다. 쌀쌀하지만 햇살이 눈 부신 밖에서 공연장 안으로 들어서자, 무대가 어둡다는 인상을 준다. 무대는 주인공 플로랑스의 집 거실이다. 거실에는 의자들 그리고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 단조의 피아노 선율도 은은히 흐른다. 밝고 정제된 무대 대신 어두운 단조의 공간이 제시된 것은 작품의 주제를 강조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다만 무대 한가운데 일인용 안락의자가 스폿 조명 아래 놓여 있다. 어느 정도 연극의 내용을 알고 있기에 비어있는 안락의자는 주인을 잃을 운명을 예견하듯,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제목에서 표현된 것처럼 이들 인물은 취리히로 여행을 떠난다. 공간은 플로랑스의 집에서 시작하여 자동차를 타고 이동한다. 하룻밤을 호텔에 묵은 다음 병원에 도착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제목에서 죽음을 향한 여정을 여행으로 표현한 것은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을 주지만, 일종의 로드 무비처럼 계속해서 변하는 공간의 극적 표현은 재미있다. 일행의 자동차 여행은 풍부한 연출 기법이 가미되어 그럴듯하게 표현되었고, 꽃이 만발한 병원의 정원도 특이하다. 무대 안쪽에 활짝 핀 거대한 꽃들은 마치 죽음을 축제로 묘사하는 것 같다. 이처럼 공간과 시간 이동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은 깊은 연출 미학의 덕분이다.
등장인물의 의미
<취리히 여행>에는 5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유명한 배우 플로랑스는 불치병을 앓고 있다. 이제 그녀는 더는 의미가 없는 치료를 거부하고 정신이 온전한 상태에서 가장 친한 친구 그리고 아들 내외와 함께 고통스러운 삶을 마치려고 한다. 그녀는 이러한 행위를 안락사, 존엄사의 또 다른 이름인 조력 자살이 법적으로 보장된 스위스 취리히에서 실천하려 한다. 역시 배우이자 친구인 이자벨은 그녀의 선택을 적극 지지하고 존중한다. 반면, 아들 벵상은 이를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 죽음이 슬픈 것은 인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인연을 만든다.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곧 삶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인연은 부부 그리고 부모와 자식이다. 소위 가족이라는 인연은 가장 끈끈하면서도 끈질기다. 인연이 끈끈할수록 죽음에 대한 슬픔의 강도는 진하다. 벵상은 한 인간이기에 앞서 아들로서 어머니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힘들다. 부모가 죽음을 스스로 결정할 때, 자식은 당연히 복잡한 심경일 수밖에 없다. 자식이 부모의 조력 자살을 지켜보는 것은 본능적인 거부감과 슬픔을 동반한다. 하지만 그가 어머니와 동행한다는 것은, 자기의 처지가 아닌 어머니의 관점에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결단이다. 플로랑스와 벵상의 갈등은 극적 의미를 더해가면서, 죽음 나아가 조력 자살을 다양한 각도로 바라보게 한다.
동행자 중 며느리가 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며느리는 아들과는 또 다른 태도를 보인다. 그녀는 제3 자이자 가족으로서 남편이 감정에 매몰되어 보지 못하는 부분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고부간의 긴장을 넘어 인간 대 인간으로서 주인공을 이해하는 가교역할을 한다. 흔히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다사다난한 심리가 얽혀 있는 관계다. 그런데 취리히로의 여행을 통해 며느리 마틸드는 남편 그리고 시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그간 있었던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면서 이를 해소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죽는 자를 통해 산 자가 자신을 성찰하게 된다고나 할까. 이 점에서 안내문에 적힌 문구 “산 자는 죽은 자의 눈을 감기고 죽은 자는 산 자의 눈을 뜨게 한다.”라는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산 자가 죽은 자의 눈을 감긴다는 말은, 우리가 죽음을 목격하면서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떠나는 자가 평온하게 잠들 수 있도록 산 사람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보살피는 행위를 의미한다. 죽은 자가 산 자의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은 죽음을 목격함으로써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에 직면하고, 그제야 비로소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고, 마틸드의 경우처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면서 진실에 눈을 뜨게 된다는 뜻이다. 산 사람은 떠나는 이의 마지막을 배웅해야 할 책임이 있지만, 그 죽음은 역설적으로 산 사람에게 삶에 대해 진정한 깨우침을 주는 것이다.
주인공의 마지막 길을 아들과 며느리가 동행한다는 설정은, 이 작품이 그저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남겨진 자들과의 작별 그리고 가족의 화해에 관한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만약 주인공이 혼자 취리히로 떠났다면 그녀의 죽음은 자살의 형식처럼 보일 수 있으나 가족이 동행함으로써 일종의 숭고한 이별 의식이 된다. 그녀의 결정은 “사랑, 우정, 다정함이 담긴 강렬한 행위”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주인공은 외로움이나 버림받았다는 느낌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축복과 배웅을 받으며 이승을 하직한다. 이는 계획된 죽음이 가질 수 있는 따뜻함을 시각화한 것이다.
까치-천사 에른스트
이들 중 독특한 인물은 단연 천사-까치로 표현된 에른스트다. 검은 복장을 하고 어깨에 흰 날개를 단 까치는 분명 천사다. 그는 플로랑스에게만 보이는 설정으로 죽음을 강조한다. 관객은 한눈에 그가 저승사자임을 알아챈다. 까치의 깃털은 검은색과 흰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각적 대비에서 검은색은 죽음, 상실, 애도, 그리고 미지의 세계를, 흰색은 빛, 영혼, 평화, 그리고 순수함을 상징한다. 까치가 천사인 것은 이승(검은색)과 저승(흰색)을 연결하는 전령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삶의 끝자락에 있는 주인공을 저쪽 세계로 인도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들이 취리히에 도착했을 때 까치-천사는 에른스트가 되어 조력 자살을 담당하는 의사로 변신한다. 천사-까치와 에른스트가 동일 인물이라는 점은, 죽음을 안내하는 역할이 단절없이 죽 이어진다는 점에서 작가의 재치를 엿볼 수 있다. 나아가 에른스트의 존재는 시공간의 변화로 인해 단절의 우려를 해소하고 작품의 깊이를 더해준다.
한편, 까치-천사가 슬픈 현실을 환상적이고 영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려, 죽음을 새로운 여행으로 승화시킨다면, 아들과 며느리라는 가족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고통스러운 지상의 슬픔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가족이 상실의 슬픔 때문에 주인공을 붙잡고 싶어 할 때, 까치-천사는 그 슬픔을 정화하여 주인공이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도록 돕는다.
주체적 인간의 실현, 죽음
스위스에서 안락사는 불법이지만 조력 자살은 합법이다. 연극 마지막에 주인공이 그렇게 한 것처럼, 조력 자살은 의료진이나 조력자가 치사량의 약물을 준비해 줄 수는 있지만, 마지막에 약물을 삼키거나 버튼을 누르는 등의 최종 행위는 반드시 환자 본인이 직접 해야 한다. 여기에서 포인트는 조력 자살의 핵심은 본인이 직접 마지막 행동을 한다는 점이다. 이는 연극에서 주인공이 수동적인 환자가 아니라, 자기 삶과 죽음을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적인 인간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점이다. 법적으로는 본인이 약물을 마셔야 하지만, 심리적으로는 그 거대한 공포를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에 관한 메타 연극
이 작품에서 눈여겨봐야 할 사항 중 하나는 플로랑스가 유명한 여배우라는 점이다. 그녀는 역시 배우인 친구 이자벨과 죽음의 여행길에 동행한다. 그녀들이 배우라는 사실은 죽음에 대한 하나의 이념을 제공한다. 두 배우는 평생 무대에서 수많은 죽음을 연기했을 것이다. 엘렉트라나 클리타임네스트라, 또는 오필리아가 되어 무대의 죽음을 반복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극에서 주인공이 스스로의 죽음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은, 마치 자신의 인생이라는 연극의 마지막 장을 직접 연출하는 연출가이자 배우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연극의 실제 모델인 시몽도 실제 “나는 내 마지막을 연출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던 만큼, <취리히 여행>은 죽음을 연기하던 자가 죽음을 직접 집행하는 자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메타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플로랑스는 무대에서 죽음을 연기하듯, 자기 죽음을 선택하고 마지막 공연에서 이를 완벽하게 열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조력 자살로 생을 마감하려는 것은, 무대에서 완벽한 타이밍에 맞춰 퇴장하듯 자신의 생에서도 가장 존엄한 순간에 스스로 퇴장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까치-천사는 메타 연극의 조력자인 셈이다. 현실의 고통을 예술적, 영적 환상으로 치환하여, 주인공이 마지막 연기를 완벽히 마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메타 연극은 관객에게 “이것은 연극이다”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관객은 공연장에 배우가 연기하는 죽음을 보러 오지만, 사실은 실존했던 인물의 죽음 결정과 마주하게 된다. 플로랑스를 연기한 배우는 무대에서는 죽음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플로랑스이지만, 또 한편으론 현실에서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안고 살아가는 배우라는 이중의 구조에 놓여 있다. 이 점을 인식한다면 죽음에 대한 이 연극은 관객에게 연기와 실제, 삶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효과가 있다. 이렇듯 <취리히 여행>은 죽음의 재현을 넘어,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어떻게 스스로 마지막 대사를 완성할 것인가 하는 고뇌를 관객과 공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