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막극
등장인물
김씨
박씨
청년
할머니
오래된 국밥집.
막이 오르면, 두 사람이 말없이 국밥을 먹고 있다. 옆자리에는 청년이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다. 모든 오브제는 보이지 않는다. 배우들은 마임을 하는 셈이다. 정적 속에 자판과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만 들린다.
김씨: (국밥을 뜨려다 멈칫하더니 숟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어이쿠.
박씨: 왜 그래?
김씨: (숟가락을 주우려 몸을 숙인다. 그런데 허리를 펴려던 순간, 몸이 굳는다. 등 뒤에서 덜컥하고 무언가 걸리는 금속성 소리가 들린다) 어? 어어? 나 좀 일으켜줘. 허리가 안 펴져.
박씨: 아이고, 밥 잘 먹다가 갑자기 왜 그래? 담이 온 거야? 가만있어 봐, 내가 잡아줄게.
김씨: 아니, 담이 아니고. 누가 뒤에서 나를 꽉... 묵직한 쇠사슬로 잡아당기는 것 같아.
박씨: (김씨의 등 뒤 허공을 휘젓는다. 손이 무언가에 턱 하고 걸린다) 어? 뭐야. 뭐지?
김씨: (식은땀을 흘리며) 뭐지가 뭐야? 뭐가 있는 거야?
박씨: 아니. 잠깐만. (허공을 더듬다 뭔가를 찾아낸다) 이게 뭐야? 끈 같은데. 이거 가방끈이잖아? 잠깐, 이거 가방이잖아! 어휴 무거워. 이렇게 무거운 가방이... 자네, 평생 이걸 매고 다닌 거야?
(바닥에 걸린 끈을 툭 빼낸다. 순간, 팅 하는 소리와 함께 김씨의 몸이 스프링처럼 천장을 향해 솟구친다. 허공에 매달린 김씨가 팔다리를 버둥거린다. 주방에서 할머니가 뭔가를 손질하다가 칼을 도마에 내리치면서 “또 한 놈”하고 소리친다.)
김씨: (비명을 지르며) 으악! 이거 뭐야! 몸이 왜 이러냐고? 이러다 죽는 거 아냐? 나 좀 내려줘!
(김씨가 공중에 떠서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노트북을 두드리던 청년이 한심하다는 듯 김씨를 쳐다본다.)
청년: 아, 아저씨! 조용히 좀 해요. 지금 중요한 프로젝트 기획 중이라고요.
박씨: 미안하네. 근데 저 사람 등에서 이게 빠지면서 휙 하고 날아가 버렸다고.
청년: (비웃으며) 빠져요? 날아가요? 그걸 왜 빼요? 요즘 세상에 등짝이 가벼우면 루저인 거 몰라요? 에이 시끄러워. 카페로 가든지 해야지.
(청년이 일어나자, 그의 등 뒤에서 육중한 쇠사슬 소리와 기계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그는 보이지 않는 가방을 대여섯 개는 겹쳐 멘 듯 몸이 기괴하게 꺾여 있지만, 표정은 당당하다.)
박씨: 아니 자네! 괜찮은가?
청년: 왜요? 내가 어째서요?
박씨: 꺾여 있어서. 너무 무거워 보여.
청년: 무겁지 않다니까요. 스팩, 인스타 팔로워, 여자 친구, 승진까지... 아주 꽉꽉 채워 넣었다고요. 이게 다 성공의 무게거든요. 저 아저씨처럼 가벼우면 아무도 안 알아줘요!
김씨: (허공에서) 젊은이... 그게 말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매달리고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아!
청년: 그게 아니면요. 바닥을 떠나 살 수 있어요?
(이때, 주방에서 칼질 소리가 뚝 끊긴다. 할머니가 손을 닦으며 천천히 나온다.)
할머니: (청년을 보며) 총각, 척추 부러져. 그 안에 든 거, 그거 다 유통기한 지난 쓰레기야.
청년: (불쾌한 듯) 할머니가 뭘 아세요? 이거 다 제 자산이라고요!
할머니: (무시하고 김씨를 향해 손을 뻗는다) 이봐, 날아다니는 양반. 내 손잡아.
(할머니가 김씨의 손을 잡자, 김씨가 자석에 끌리듯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할머니는 김씨의 가방끈이 걸렸던 못을 손가락으로 툭 친다.)
할머니: 이 못이 영험해. 가끔 임자를 만나면, 가방을 낚아채거든.
김씨: (가슴을 치며) ...어? 와! 가슴이 확 터지는 게, 숨이... 숨이 쉬어져. 와 신기하다. 공기가 이렇게 달콤했나? 이봐. 숨 쉬는 게 선물 같아. 나 지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호흡이란 걸 하는 것 같아.
박씨: (바닥의 빈 곳을 가리키며) 이것 좀 봐. 방금 자네가 벗어놓은 거.
김씨: (바닥을 응시하다가, 그 형체를 느끼는 듯 눈이 커진다) 허 참. 내가 이걸 지고 살았다고? 왜 전혀 몰랐지?
박씨: 열어보자. 도대체 뭐가 들었길래 사람을 천장까지 날려 보냈는지.
(가방의 지퍼를 찾는 시늉을 한다. 지퍼를 열자 찌이익-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무대를 가득 채운다. 김씨가 그 소리에 맞춰 온몸을 뒤튼다.)
김씨: (기대와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뭐야? 뭐가 있어? 금덩어리라도 있는 거야?
박씨: 어디 보자. (박씨가 하나씩 집어 드는 시늉을 할 때마다, 보이지 않는 물건의 무게와 소리가 다르다.) 이건 명함, 온통 서류들이네.
김씨: 뭐야? 그런 것 말고는 없어?
박씨: 이거 명패 아냐? 자네 명패로군. 쇳덩어리네.
김씨: 그 명패 때문에 고생한 생각을 하면. 어이쿠 치가 떨린다. 그거 들이밀 때마다 등이 굽더라고.
박씨: 이건 소리가 나네. 째깍째깍. 째깍째깍. 타이머?
김씨: 그 소리? 아 지긋지긋하다. 말을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고.
(박씨가 타이머를 끄자 식당에 정적이 깊어진다.)
박씨: 이거 뭐지? 이상하게 생겼네. 아, 자네 등짝 같은데?
김씨: (같이 살피다가 한숨을 쉬며) 맞네, 맞아. 내 등짝. 남들 대신 버텨 주던 내 등짝.
(박씨가 가방을 뒤집자, 온갖 것들이 쏟아진다.)
김씨: (쏟아진 것들을 만지다 웃는다) 하... (웃음이 울음으로 바뀐다)
할머니: 울긴 왜 울어! 그만, 뚝! 그쳐!
김씨: 저것들을... 내가 저 쓰레기들을 금지옥엽인 양 메고 다녔다고요.
할머니: 지금이라도 내려놓았으면 된 거 아냐? 죽을 때까지 메고 다니는 놈들도 얼마나 많은데.
박씨: 자자! 그만그만. 일어나. 가야지.
김씨: (추스른 김씨가 일어선다) 어라, 등이, 뼈가 느껴져. 나 다시 태어난 것 같아!
할머니: 국밥을 잘 못 먹었나?
박씨: (바닥의 오물들을 발로 툭툭 차며) 할머니, 이 친구 가방 속엔 전부 녹슨 유령들뿐이네요.
할머니: (무심하게) 가방엔 그런 것만 담겨. 빛나는 건 안 담겨. 웃음이나 지금 여기 국밥 같은 거. 그런 건 안 들어가.
청년: (모든 걸 바라보고, 이해 못 하겠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전 무겁게 살렵니다. 그게 폼나니까요.
(넘어질 듯 위태롭게 걷으며 식당을 나간다. 낑낑대며 겨우 문턱을 넘는다.)
김씨: (뒤뚱거리며 멀어지는 청년을 보며) 저 가방이... 내 등짝인 줄 알았어. 이봐. 자네 등도 볼까?
박씨: (흠칫 놀란다. 그리고 김씨 등을 과장해서 세게 친다.) 아이고 무슨. 친구, 가자고.
(김씨가 식당을 나가려다 멈춘다. 무대 뒤편 영상이나 조명을 통해 배낭을 멘 채 구부정한 행인들의 실루엣이 보인다.)
박씨: 왜 그래? 가벼워졌으니 날아가야지!
김씨: (밖을 보며) 저기 좀 봐. 다들 짐을 메고 있어. 내가 나가면, 저기 굴러다니는 먼지들이 다시 내 등짝에 달라붙을 것 같아. 내일 아침이면 또 다른 가방이 내 어깨를 짓누를 수도.
박씨: 그럼 어쩌자고? 평생 여기 있을 거야?
할머니: (볼펜 한 자루를 김씨 앞에 툭 던진다) 자, 이거.
김씨: 이게 뭡니까?
할머니: 비우는 물건. 자네가 아까 느꼈던 것들, 공포, 억울함, 후회. 그리고 달콤했던 첫 호흡. 까먹기 전에 다 적어. 안 그러면 또 주워 멜 테니까.
김씨: (잠시 침묵하다 자리에 앉는다) 안 멜 수는 없는 거야? 왜 자꾸 짊어지려고 하는 거야.
(김씨가 종이 위에 꾹꾹 눌러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의 호흡이 깊고 일정하다. 무대가 서서히 어두워진다. 스폿을 받은 김씨의 독백이 울려 퍼진다.)
김씨(v.o): 쓴다. 그러면 숨이 된다. 비로소 내 몸무게만큼 걸음을 내디딘다.
(김씨가 종이를 집어 들자, 글자들이 종이에서 피어올라 나비처럼 허공으로 흩어진다. 김씨는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당당하게 문밖으로 나간다. 박씨도 따라나선다. 무대에는 김씨와 박씨가 남긴 빈 국밥 그릇과 볼펜 한 자루가 조명을 받으며 덩그러니 남아있다. 무대 안쪽 주방의 할머니는 무심히 파를 썬다. 도마소리.)
암전. 막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