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타>가 묻는 인간의 구원

영화 리뷰

by 인산

“누군가를 마음에 들이는 순간, 우리는 그 존재를 잃을 가능성에 대한 불안과 책임을 경험한다.”


김기덕 감독의 2012년 작품 <피에타>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 조건, 죄와 구원, 관계와 감정의 문제를 집요하게 탐구한다. 인간은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가, 그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물론 영화는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통찰을 제시한다. 죄와 구원은 진공 상태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서 비로소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즉 홀로 존재할 때 인간은 폭력적 성향에 쉽게 노출되고 타인과 연결될 때 비로소 구원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에게 관계가 무엇인가를 성찰하도록 하는 이 영화는 2012년에 제69회 베

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피에타’의 의미


제목 ‘피에타(Pietà)’는 라틴어로 ‘자비, 연민’을 뜻한다. 미술사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죽은 예수의 몸을 품고 있는 장면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미켈란젤로의 <피에타>(1498–1499,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는 유명하다. 이 작품에서 아들을 안은 마리아는 슬픔과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 나아가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영화 <피에타>는 이 고전적 도상을 현대의 비정한 자본주의로 소환한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모방한 포스터는 이 점을 강하게 상징한다. 어머니 역의 미선이 죽은 강도를 안고 있는 모습은 바로 마리아가 인류를 위해 희생한 예수를 안은 모습이다. 그렇다면 강도는 누구인가? 그 역시 인류를 위한 희생자란 말인가? 절대 그럴 리 없다. 강도는 구원받아야 할 메시아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단절로부터 절대 악인이 되어버린 버려진 존재의 전형이다. 따라서 미선이 그를 안는 행위는 성스러운 희생에 대한 애도라기보다 파괴된 인간성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영화는 강도라는 괴물조차 타자의 온기, 즉 관계로부터 인간으로 환원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미선이 남긴 “강도도 불쌍하다”라는 말은 도덕적 판단을 넘어선 인간 본연의 연민에 가깝다. 이는 강도의 악행을 용서한다는 의미에 앞서 그가 처한 존재론적 고독을 그대로 수용한 자비라고 할 것이다. 이렇듯 영화는 관계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단절된 존재 강도


주인공 강도는 냉정하고 잔인한 채권 추심원이다. 그는 사람을 위협하고 폭력으로 돈을 갈취한다. 영화 초반의 강도는 관객에게 공포마저 안겨준다. 그는 인간이 어디까지 잔혹하고 비인간화될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타인의 고통은 그의 의식에 닿지 않고 자신이 저지른 행동이 문제라는 인식조차 없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일까? 그런데 영화는 그의 폭력성이 악의 성향을 지닌 결과가 아닌 철저한 단절 상태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준다. 강도는 가족도 친구도 없을뿐더러 인간적 유대라곤 전혀 없다. 타인과의 관계가 완전히 거세되어 버린 것이다. 과연 인간은 이러한 상태로 살 수 있을까? 인간 사회에서 격리된 모글리조차도 늑대라는 관계 맺음이 있지 않았던가. 따라서 그의 잔혹함은 본래의 악의적 본성이기보다 타자와 연결되지 못한 존재의 무감각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관계 맺음과 윤리의 탄생


이러한 강도에게 어느 날 낯선 한 여자가 나타난다. 그녀는 30년 전에 강도를 버린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미선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이 여자의 존재는 강도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다. 그러나 강도의 행동거지를 보면, 선 듯 그녀를 받아줄 리 만무하다. 그는 그녀에게 막말과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 폭행을 가하지만 미선을 끄떡도 하지 않는다. 강도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여자는 어머니라는 상징성을 통해 강도의 마음속으로 깊숙이 침투한다. 지금까지 강도의 세계에서 타인은 오로지 자기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피해자였다면 어머니의 등장은 자신을 낳은 존재라는 근원적인 연결 고리가 작동한다. 그리하여 아무리 잔인한 강도라도 거부할 수 없는 본능을 자극한다. 미선이 해주는 밥을 먹고 옷을 입고 함께 잠드는 일상적인 행위는 강도를 관계 맺는 인간으로 끌어들인다. 사회화의 시작, 즉 관계 맺음을 통해 강도는 변하기 시작한다. 미선으로 인해 강도의 윤리적이고 정서적인 각성이 촉발된다. 이제 그는 타인의 고통을 감각하고 자신의 행위가 가져오는 결과도 알아차리게 된다. 이렇듯 영화는 관계를 통한 다양한 변화의 모습, 즉 약해질 수도 또 성장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관계를 맺고 누군가를 마음에 들이게 되면서 강도는 처음으로 상실의 공포를 느낀다. 이전의 강도가 잔인함의 극단이었던 이유는 잃을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선을 받아들이면서, 누군가 보호해야 할 존재가 생겨나자, 그는 상처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이 취약함이야말로 그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기 시작하는, 즉 윤리적 감각이 깨어나는 결정적 계기다.


사랑과 복수


그런데 영화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사실 미선은 강도의 진짜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녀는 강도 때문에 죽은 채무자의 어머니였다. 그녀가 강도에게 접근한 것은 아들을 복수하기 위한 것이다. 다만 아들을 위한 그녀의 복수 방법은 강도의 목숨을 빼앗기보다 강도에게 사랑을 가르친 뒤 그 사랑을 상실하게 하는 교묘한 방식이었다. 이 근원적 복수 방법은 이 영화가 지닌 커다란 미덕이다. 미선은 강도에게 소중한 존재가 된 후 그로부터 홀연히 떠난다. 그녀의 부재를 견딜 수 없었던 강도는 그녀를 찾아 헤맨다. 그리고 한 공사장에서 미선을 찾아낸다. 다시 만난 미선은 자신이 누구인지 진실을 밝히고는 뛰어내려 목숨을 끊는다. 이렇게 그녀는 그가 보는 앞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강도에게 평생 겪어보지 못한 극심한 상실감과 고통을 주어 복수한다. 이전의 강도였다면 그녀의 죽음에 아무런 감정도 없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미선을 통해 관계 맺음을 경험한 그, 어머니의 깊은 존재를 경험한 그로서는 미선의 죽음은 엄청난 상실감과 고통으로 다가온다. 그가 미선을 묻기 위해 땅을 파다가 자기 때문에 죽은 미선의 진짜 아들의 시신을 발견한다. 그 시신은 미선이 자기에게 주려고 짰던 스웨터를 입고 있다. 강도는 시신의 스웨터를 벗겨 자신이 입는다. 이 장면은 강도가 자신의 폭력 행위와 그로 인해 피해를 본 타인의 존재를 육체적, 심리적으로 체험하는 순간이다. 그는 이전까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했으나 피해자의 흔적을 자신의 몸에 담음으로써 자신이 저지른 폭력의 실체와 직면한다. 또한, 스웨터를 입는 행위는 피해자와 강도 사이의 관계적 연결을 의미하기도 한다. 세상과 단절된 상태였던 그는 이제 타자의 삶과 죽음을 자신의 존재 속에 받아들이고 일종의 책임과 윤리적 각성을 경험한 것이다. 강도는 스웨터를 입음으로써 미선과 그의 죽은 아들과 깊게 연결됨을 느낀다. 이렇듯 스웨터는 관계를 상징하는 오브제로, 그로부터 강도가 자신의 죄와 책임을 인식하고 속죄와 구원의 가능성을 경험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는 스웨터를 입고 두 시신과 나란히 눕는다. 이 장면 역시 철저한 단절을 경험했던 그가, 타자와 연결됨으로써 자신의 행위와 감정과 직면하고 인간성을 회복하는 순간을 극적으로 시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강도는 시신들과 나란히 누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결말에서 강도는 자신이 불구로 만든 채무자의 트럭 밑에 묶어 스스로를 죽도록 한다. 이 죽음 역시 강도가 죽음을 일종의 도피처로 삼기보다 자신의 죄를 직면하고 선택한 속죄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강도는 수많은 채무자를 불구로 만들었고 그들의 삶을 짓밟았지만, 정작 자신은 그 고통의 무게를 느껴본 적은 없었다. 따라서 트럭 밑에 몸을 묶는 행위는 자신이 타인에게 가했던 짓눌리는 고통과 꼼짝달싹할 수 없는 절망을 자기 몸으로 고스란히 받아내겠다는 의지로 읽을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을 관찰하던 위치에서 그 고통을 직접 체험하는 위치로 스스로를 옮겨 놓은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채무자는 평소처럼 시동을 걸고 트럭을 출발시킨다. 트럭이 지나간 자리에는 긴 핏자국이 남는다. 이 마지막 장면은 강도의 죽음이 아주 길고 선명한 흔적을 남기는 의식이다. 그가 무시해 왔던 소외된 자들, 상처받은 자들의 고통을 세상 밖으로 끌어올리는 마지막 속죄의 퍼포먼스인 것이다. 미켈란젤로 <피에타>의 예수처럼 죽음을 통해 그 역시 인간 강도가 아닌 타인의 아픔에 응답하는 희생양이 되었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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