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점짜리 인생

by gyst


셔틀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다. 손에는 회색 시험지들이 구겨진 채 들려있었다. 며칠간 계속된 시험의 끝, 모든 과목들을 채점하고 평균 점수를 산출하는 날. 이번에도 또 88점. 유독 약한 수학이나 기술, 과학 같은 과목들이 또 평균을 갉아먹은 것이다. 이것들만 아니면 이번엔 평균 90점은 넘는 거였는데. 왜 항상 난 이 정도 점수에 머무는 걸까? 12살 답지 않게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셔틀버스 출발 전, 그 짧은 몇 분 동안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남자애들을 쳐다보며 벤치에 앉아있었다. 난 앞으로도 88점짜리 인생을 살게 되겠구나. 깊게 예감한 것이다. 십몇 년이 지난 지금도 생경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가슴에 말뚝을 박은 것처럼 답답하고 아리던 기분도. 내가 처음으로 절망했던 때, 노력해도 안되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


아무리 애쓰고 발버둥 쳐도 내가 원하는 상위권 점수는 나오지 않았다. 세상이 내 인생에 그렇게 명령한 것 같았다. 시험 한 번 못 본 걸로 뭐 이러나 싶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나도 여러 경시대회에서 감사패 모양의 장려상이 아니라, 진짜 메달 모양인 금은동상을 제발 한 번쯤은 받아보고 싶었다. 초반엔 잘 하다가 가면 갈수록 흐트러지는 정신을 다잡아 이번에는 중간반이 아닌 우수반에 갈 수 있는 성적을 받고 싶었다. 진지하게 적성과 흥미를 느꼈던, 내가 사랑하던 영어학원에서 만년 2등에 아니라 딱 한 번만이라도 1등을 해보고 싶었다. 초반에 우수하다가 마지막으로 가면 결정적인 한 문제로 인해 결국 평균은 80점대 후반 어딘가로 수렴했다. 그게 시험이든, 일이든, 성격이든, 인간관계든.


88이라는 숫자는 이제 숙명처럼 느껴졌다. 적당히 높은 수능 점수, 적당한 인 서울의 대학, 졸업하고 나서도 적당한 회사를 다니며 적당한 얼굴을 달고 적당한 인기에 적당한 성격과 조건을 가진 내가 이제는 적응돼버렸다. 솔직해지자면 끔찍하게도 싫다. 이런 평범한 내가 특별해지기 위해선 특별한 곳을 가고, 특별한 옷을 입고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특별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당한 사랑 말고 인생에 나만 존재하는, 너무 커다래서 절대 한입에 넘길 수 없는 끈적이고 질척거리는 사랑만 사랑인 것 같았다. 단조로운 일상의 내용들에 국한되지 않고 마음 깊숙한 밑바닥의 잔해들까지 나눌 수 있어야만 진정한 친구라고 여겼다. 시시콜콜한 장소에서 식사를 하고, 시시콜콜한 일상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현실은 나에겐 까슬하고 모호한 공포였다.


88점의 초등학생은 그때의 고민을 어떻게 위로받아야 할지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모르는 바보 천치였으니까. 평생 가슴속 깊은 방공호에 숨겨만 둔 얘기였으니까. 안타깝게도 이 상념은 나라는 사람 자체를 구성해버렸다. 나는 오늘도 그 어릴 적 생각에 조종당하며 살고 있다. 88점이라는 선고가 두려워서 어떻게 하면 평범하고 재미없는 인간이 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내 인생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특별할까 고민에 고민만 더해져 갈 뿐이다.


그래서 난 지금 어떤 어른이 됐냐면, 특출나게 잘하는 장기 하나를 지닌 인간이 아니라 처세, 꼼꼼함, 신속함, 사교성 등 사회인의 자질을 두루두루 88%쯤 잘 해내는 사람이 돼버렸다. 무슨 분야의 일이든, 하게 되면 그냥 평균 약간 그 이상의 지점에서 잘 해내는. 나도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비운의 천재가 되고 싶었지만, 한 분야에서 미친 듯이 뛰어나지만 세상이 아직 몰라주는 사람이었으면 했지만, 앞서 말했듯 스스로에게 내린 선언문 같은 주문의 효과는 강력했다.


내게 부여된 88이라는 철로를 탈선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너무 단단하고 견고해서 꿈쩍도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이는데.


어렵고 힘들겠지만 나는 보통을 사랑하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숨 쉬듯이 당연한 것들을 소중히 여긴다면, 높은 결괏값에만 흡족해지는 만족 메커니즘을 약소하게나마 변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화려한 옷들보다 손때 탄 낡고 익숙한 것들에 애정을 쏟고, 새로운 음식보단 내 몸과 입에 익숙한 음식들에 시선을 돌려야지. 앞으로 88이라는 고정된 점수 뒷자리에 올 +@를, 일상 속의 0.1이든 6이든 작은 것들로 쌓아올려가야지.


미약한 차이일 수도 있지만 88+@가 될 미래의 나를, 열두 살의 나와 지금의 내가 전력을 다해 응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