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흐릿한 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하루를 지나

마음의 사용법

by 찌니


어떤 날은 모든 게 흐릿하다. 기분도, 생각도, 집중력도 또렷하지 않다. 해야 할 일들은 분명히 떠오르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고, 머릿속은 어딘가에 걸린 듯 멍하니 정체되어 있다. 하고 싶은 것도, 해야만 하는 것도, 그 어떤 것도 나를 움직이지 못하는 날. 그렇게 하루가 흘러간다.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마음이 더 크다. 그리고 그런 하루 끝엔 스스로를 향한 작은 자책이 어김없이 찾아온다. ‘오늘 하루를 왜 이렇게 흘려보냈을까.’ ‘이 시간 동안 남들은 얼마나 앞으로 갔을까.’ 남들과 비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비교는 너무 쉽게 나를 찔러온다.

아무리 나를 다독여도 무기력한 하루는 좀처럼 가볍게 지나가지 않는다. 아무 성과도, 뚜렷한 기억도 없는 하루가 쌓일수록 나는 점점 나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매일의 의욕이 조금씩 줄어드는 느낌.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런 마음만 점점 선명해진다. 모든 게 흐릿한데, 이 무력감만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다.

하지만 그런 하루 속에서도 나는 나를 완전히 놓치고 싶진 않다. 흐릿한 하루 속에서도, 마음 어딘가엔 분명히 작은 감정 하나쯤은 남아 있다. 아주 사소한 말 한마디, 스쳐가는 바람, 어딘가에서 들려온 음악 한 소절 같은 것들. 그런 것들 속에서 나는 아직도 나라는 사람의 온기를 느낀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져도, 그래도 하루를 살아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늘 말해왔지만 그런 말을 믿는 게 가장 어려운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 다들 바쁘게 살아가는 것 같은데 나만 정체된 것 같고, 나는 왜 이렇게 쉽게 지치는 걸까, 왜 이렇게 자주 흔들리는 걸까, 나만 이럴까, 나만 이런 걸까. 끝이 없는 질문들 속에서 나는 또 하루를 흘려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살아간다. 때로는 흐릿하게, 때로는 엉켜 있고, 때로는 아무 의미 없이도. 그렇게 살아내는 하루들이 결국 나를 만든다는 걸, 어렴풋이 믿어보고 싶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하루가, 어쩌면 나를 지켜낸 하루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주 조금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지금은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게 아니라, 보이지 않게 조금씩 무언가가 쌓이고 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의미 없는 건 아니니까. 이렇게 흐릿한 날도, 언젠가 내 삶의 한 페이지로 고스란히 남겠지. 그때 나는 오늘의 이 감정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뿌연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버티던 이 시간, 조금도 뚜렷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나를.

내일도 비슷할지 모르겠다. 똑같이 흐릿하고, 똑같이 무기력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내가 무의미해지는 건 아니다. 조금씩 살아내는 것, 그것 말고는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렇게 하루를 더해간다. 조금 천천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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