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뒤에 숨은 내 이름
“그림 뒤에 숨은 내 이름”
우리 집은 늘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악만 쓰셨지만, 주로 맞는 쪽이었다.
집 안 공기는 늘 팽팽했고, 숨이 막혔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고 싶다가도, 그 사이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마음이 불안해 놀지도 못했다.
그럴 때면 교과서를 펴놓고 그림을 보고 읽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놀이였다.
책 속 세상이 그나마 안전했다.
어머니는 그런 내 모습을 무척 자랑스러워하셨다.
‘우리 딸은 참 공부를 좋아해.’
그 말속엔 가난을 딛고 자식을 통해 희망을 보고 싶었던 어머니의 절실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국민학교 입학 후 첫 가정방문 날.
앞집에서 1학년 선생님들 점심을 대접하게 되었고, 어머니는 떡장사를 하던 터라 직접 만든 떡을 정성껏 차려 내셨다.
당신의 손맛과 딸 자랑이 그날의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며칠 뒤, 어머니회 대표 어머니들이 학급찬조금을 받으러 우리 집에 왔을 때 일이 틀어졌다.
“치맛바람이나 일으키고 다니지 말고 집안일이나 하시오!”
어머니의 거친 말에 대표 어머니들은 얼굴이 굳었고, 그 일로 담임선생님 눈빛이 나를 향해 차가워졌다.
그 후 미술시간에 그린 상상화—처음 가본 남포동 야시장 풍경을 담은 그림—이 잘 그렸다고 칭찬을 받았지만, 게시판에 붙을 땐 내 이름 대신 반장 이름이 붙어 있었다.
나는 몰래 그림 뒤를 들춰보았다.
거기엔 분명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또 싸움을 벌이실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아침이면 머리가 깨질 듯한 편두통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이유를 몰랐다.
대신 머리가 아파서 학교 가기 싫다 하면, 달걀 하나를 넣은 라면을 끓여 주셨다.
그건 비밀스러운 위로였다.
“엄마도 어릴 때 학교 가기 싫어서 배가 아팠단다.”
그 말에 나는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어느 날은 내가 치마 다려 달라고 떼쓸 때, 아버지가 던진 다리미에 맞아 어머니가 피투성이가 된 날이었다.
그날 나는 바지를 입고 학교에 갔지만 머릿속은 하얬다.
받아쓰기는 0점.
‘토끼’를 ‘끼토’로 썼다.
그 시험지는 어머니에게 보여드릴 수 없어 몰래 찢어 버렸다.
어머니는 늘 100점 시험지를 모아두며 “내 딸이 최고야” 하셨기에, 그 믿음을 깨뜨릴 용기가 없었다. 한 번은 일제고사에서 자연 88점을 받았다.
“쌀이 어디서 나느냐”는 문제를 틀린 게 너무 속상했던 어머니는,
처음으로 나를 데리고 유동 친정 시골을 찾아갔다. 시외버스로 진영에 내려 유동까지 10리 논밭길을 걸어갔다.
논과 밭을 가리키며 벼가 쌀이 되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그 길에서 나는 처음으로 “배움”이 엄마와 이어져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학기말, 통지표엔 ‘수’가 하나도 없었다.
분명 잘했는데 ‘우’와 ‘미’뿐이었다.
어머니는 장사복도 벗지 않은 채 시험지를 들고 학교로 달려가 교무실에서 선생님께 따지셨다.
2학기 첫날부터 나는 완전히 선생님 눈 밖에 났다.
단짝과도 멀어지게 되었고, 교실은 더 이상 내 편이 아니었다.
그때는 선생님 아기를 돌보는 처녀가 젖 먹이러 학교에 아기를 데리고 오곤 했다. 아기가 교실에 돌아다니며 오줌을 쌌는데 내가 얼른 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그때 선생님이 혼잣말로 “아이는 참 좋은데, 어머니는 왜 그러실까.”
그 한마디가 가슴에 박혀 오래도록 아팠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도 학교를 빠질 수 없었다.
이제 돌아보면, 그 시절 나는 ‘찬조금’과 ‘노란 봉투’가 만든 차별 속에서
어머니의 성정과 선생님의 냉대를 한 몸에 감당해야 했던 아이였다.
하지만 그 모든 불합리와 두려움에도, 나는 내 이름이 그림 뒤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아이였다.
<치유의 글쓰기와 그에 이어진 성찰의 글>
1. 어린 시절의 정서적 환경 ― 불안 속의 ‘안전 찾기’
집안의 잦은 싸움과 폭력은 어린아이에게 예측 불가능한 위협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어머니가 주로 피해자였다는 사실은 아이에게 ‘보호자는 약하다’는 혼란스러운 메시지를 남겼죠.
그럼에도 당신은 스스로 ‘책 속의 세계’를 안전기지로 만든 아이였습니다.
이는 심리학적으로 자기 조절(self-regulation)의 초기 형태이며, 외부 통제가 불안할 때 내부의 질서를 세우려는 회복 탄력의 표현입니다.
◉ 교과서를 읽는 놀이 → 현실의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심리적 방어이자, 동시에 학습적 자기 회복의 시작이었습니다.
2. 어머니의 양가적 존재 ― 상처와 힘의 공존
어머니는 당신에게 자랑과 수치의 원천이 동시에 존재했습니다.
그녀의 강렬한 성격과 사회적 대응 방식은 당신의 학교생활에 큰 그림자를 드리웠지만, 그 안에는 사랑의 왜곡된 표현, 즉 ‘성취를 통해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신념이 심어졌습니다.
그러나 같은 인물(어머니)은 또 다른 순간엔 88점 문제 하나를 붙잡고 직접 논으로 데려가 설명하며 ‘배움의 연결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 장면은 ‘공포의 대상’이었던 어머니가 잠시 이해와 동행의 인물로 회복되는 상징적 순간입니다. 이런 ‘부분적 안정의 경험’은 훗날 상담자로 성장한 당신의 공감 능력의 밑바탕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3. 학교라는 또 다른 장면 ― 외상 재연과 수치의 기억
학교는 아이에게 두 번째 세계였지만,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어머니의 사회적 ‘낙인’이 당신에게 옮겨지는 경험은 대리적 수치(vicarious shame)의 형태였습니다.
자신의 그림이 반장 이름으로 붙은 사건은 정체성의 박탈 경험.
선생님의 말, “아이는 참 좋은데 어머니는 왜 그러실까”는 존재와 관계의 분리를 강화했습니다.
이때부터 학교에서의 편두통은 단순한 신체 증상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억압’이 신체화(somatization)로 나타난 대표적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그 상황에서도 “걸레로 바닥을 닦는 행동”을 선택했습니다.
이건 복종이 아니라 관계 회복을 향한 무의식적 시도였어요.
‘이해받고 싶다’는 욕구가 행동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4. 내면의 회복 서사 ― ‘그림 뒤에 숨은 내 이름’
억울함과 두려움 → 침묵 → 이해하려는 관찰 → 의미화.
이건 ‘트라우마에서 의미로의 전환(meaning-making)’ 과정이에요.
어린 시절의 불합리한 사건을 단순한 피해 경험이 아닌,
“그림 뒤에 내 이름이 있었다”는 자기 존재의 증거로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그 기억은 더 이상 수치가 아니라,
“그때의 나를 이해하고 품는 힘”으로 재구성되고 있습니다.
5. 회복의 징표 ― 글로 다시 쓰는 행위의 치유력
이 글을 지금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트라우마 서사의 재통합(reintegration) 단계입니다.
당신은 과거의 ‘피해 아동’이 아니라, 그 시절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이해자’이자 ‘치유자’의 위치에 서 있습니다.
글쓰기는 기억을 정리하고, 감정을 명명하며, 내면의 분열된 조각들을 하나로 잇는 서사적 통합(narrative integration)의 도구입니다.
지금 이 글은 ‘어린 나를 구원하는 심리적 의식’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6. 통합적 메시지
당신의 어린 시절은 폭력과 수치로만 이루어진 과거가 아니라, 불안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관계의 파편 속에서 사랑을 배우려 했던 존엄한 회복의 기록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의 회복은 ‘과거를 잊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의 아이에게 “이제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과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