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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호 Jan 27. 2021

집 지키는 공룡

내가 사랑한 것들 4

4. 집 지키는 공룡     



내 작업실 겸 집에는 현관을 지키는 공룡이 한 마리 있다. 작은 개 만한 크기의 타르보사우루스. 내 작업실을 지키는 가신(家神)이다. 물론 살아있는 공룡은 아니다. 손재주 많은 배우 김흥래가 만들어 준 조형물이다. 신문지를 찰흙처럼 이겨서 형태를 만든 다음 색을 입히고 도료를 뿌려 완성했다. 얼굴이며 등의 돌기, 손가락과 발가락, 날카로운 이빨, 몸의 비늘 하나하나가 흠잡을 데 없이 잘 만들었다. 신문지로 만들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솜씨다.     

 

집 지키는 공룡을 보고 있다가 문득 어린 시절 두꺼비에 대한 추억이 생각났다. 시골집 마당에 내 손 뼘보다 큰 커다란 두꺼비가 살았었다. 녀석은 비 오는 날이면 눈을 끔벅이며 나타나 젖은 마당을 돌아다녔다. 어머니는 집 지키는 두꺼비라고 건드리면 안 된다고 했다. 두꺼비와 나는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 보곤 했다. 나는 다가가지 않았고 녀석은 도망가지 않았다. 녀석은 비를 즐기는 듯, 날 좋은 날 유람나온 양반처럼 천천히 마당을 돌아다니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등이 우둘투둘 못생겼지만 녀석을 싫어하지 않았다. 우리 집을 지켜주는 존재라니 왠지 든든한 느낌도 있었다.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추석을 쇠러 시골집에 내려갔다가 또 그 두꺼비를 만났다. 그 녀석이 어린 시절의 그 녀석인지, 두꺼비가 그렇게 오래 사는지 알 수 없지만(이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두꺼비는 30년에서 45년까지도 산다고 한다.), 인상착의가 비슷했다. 두꺼비가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고 따진다면 할 말은 없다. 단지 내 느낌에 어릴 때 본 두꺼비와 똑같았다는 거다.      


아내가 비명을 질렀다. 녀석의 등에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집을 지키느라 못된 지네랑이라도 싸운 걸까? 놀라서 자세히 보려고 다가가자 녀석은 엉금엉금 길 밖으로 달아났다. 나와 아내는 뛰어가 앞에서 두꺼비를 가로막았다. 상처입은 두꺼비를 그냥 보낼 수 없었다. 곁에 계시던 어머니는 약을 찾아 집안으로 뛰어가셨다. 어머니가 약을 가지고 올 거야, 기다려. 녀석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커다란 눈을 끔벅이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가지고 온 마데카솔 연고를 발라줄 때까지 얌전히 있었다. 연고를 다 발라주자 두꺼비는 잠깐 나와 아내와 어머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본 다음, 다시 엉금엉금 걸어서 골목 너머 밭으로 사라졌다. 예부터 두꺼비는 영물이라고 했다. 만약 그 녀석이 우리 집을 지켜주는 가신(家神)이었다면 지금까지 우리 집을 잘 지켜준 은공에 한번은 보답했다고 믿고 싶다.     


2016년. 흥래는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 2>를 만들 때 만난 배우이자 동물 액션 수퍼바이저로,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에게 집 지키는 두꺼비와 같은 존재였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10년 동안 공룡에 관한 작품을 만들어 온 사람이다. '10년 동안 공룡만 만들겠습니다.'하는 서원을 가지고 시작한 일도, 무슨 사명감이나 대단한 목표로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운명이란 묘한 것이다. 어쩌다 시작한 게 운명이 될 때도 있다. 나의 다큐멘터리 데뷔작 <문자>는 문자와 인류의 문명사를 탐구하는 작품이었고, 두번째 작품 <마이크로의 세계>는 '한 알의 모래 속에 우주가 있다.'는 경구를 모토로 우리 주변의 보이지 않는 세계를 구현한 작품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소위 고급 '인문 교양'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연출가로 제법 그 세계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다. 내가 애니메이션 영화 감독이 되고 또 10년 동안 애니메이션으로 공룡만 만들게 될 거라고는 그때의 내가 어찌 알 수 있었을까?


2008년도에 만든 <한반도의 공룡>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예상 외의 히트를 쳐 버렸다. 그 시간 평균 시청률의 세 배 이상이 나온 것이다. 왜 그랬을까? 뚜껑을 열고 보니 밤 10시, 성인 시간에 방송된 다큐멘터리를 4-8세 시청자가 가장 많이 본 것이었다. 서점가 어린이책 코너에 <한반도의 공룡> 신드롬이 불었고, <한반도의 공룡 체험전>은 전국을 돌며 43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모았다. 전 세계 36개국에 수출이 되었고, 그때까지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사상 최고가인 1억 5천만원 정도의 가격으로 독일 RTL디즈니 방송사에 팔리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얼떨결에 소위 '킬러콘텐츠'가 탄생해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콘텐츠를 방송으로만 끝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 3D>라는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영화는 다행히 성공해 우리 나라 3D 애니메이션 영화 최초로 100만 관객을 넘는 기록을 세웠다. 


전편의 성공에 힘입어 또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 2>가 기획되었다. 나는 속편에서는 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큐멘터리 <한반도의 공룡>과 영화 <점박이 1>은 실재 동물 같은 공룡의 움직임에 내레이션을 입히는 자연다큐멘터리 방식으로 만들었다.  나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고 싶었다. <점박이 2>에서는 대사가 있고 감정 연기를 하는 공룡들의 세계를 표현하고 싶었다. 그것도 애니메이션 톤이 아니라 실재 공룡이 말을 하고 연기를 하는 느낌이어야 했다. 영화 <쥬라기 공원>에 등장하는 공룡들이 말을 하는 걸 상상하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본 적이 없는 고난도의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런 작업을 해보지 않았던 애니메이터들은 너무나 어려워했고 작업은 진척되지 않았다. 작업을 시작한 후 6개월 동안 한 컷도 완성되지 못하는 최악의 결과가 나타났다. 프로덕션은 난파 직전. 나는 고래 뱃속에 갇힌 요나였다. 출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등장한 게 김흥래였다. 흥래는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동물과 크리쳐 연기를 개척해가는 프런티어였다. 영화 <미스터 고>의 고릴라를 탄생시킨 주역이 흥래였다. 흥래의 연기에 기반해 살아있는 듯한 고릴라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저렇게 해보자! 내가 쓸 수 있는 최후의 카드였다. 나는 제작사 대표를 설득했다. 프로덕션 비용에 없는 일이라 대표는 난감해했지만, 애니메이션이 진척되지 않는 지금 우리는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했다.      


우리는 흥래와 다른 몇 명의 배우들과 함께  연습실을 빌려 영화의 모든 컷을 촬영했다. 흥래와 배우들이 공룡이 되어 모든 장면을 연기했다. 촬영한 컷 하나하나를 편집해 보여주며 애니메이터들에게 공룡의 움직임과 연기를 설명했다. 그리고 흥래는 우리 팀의 모션 수퍼바이저가 되어 애니메이터들이 어려워하거나 이해 못하는 디테일한 연기를 즉석에서 해주었다. 애니메이션 팀에 다시 활기가 돌았고, 그 뒤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어려운 애니메이션 작업을 다 끝마칠 수 있었다.      


그 시절, 손재주 많은 흥래가 짬을 내어 만들어 준 게 지금 내 작업실을 지키고 있는 공룡이다. 공룡은 상암동에 있던  제작사의 내 사무실 창문에 서서 나를 지켰다. 제작이 끝나고 나는 그 공룡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작업실을 따로 얻은 지금 공룡은 다시 작업실을 지켜주는 존재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인생을 살아오다 난관에 부딪혔을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지켜주는 여러 두꺼비들을 만났다. 그 두꺼비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음만으로는 언제라도 그 두꺼비들이 피를 흘릴 때 찾아가 연고라도 발라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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