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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호 Jan 25. 2021

잃어버린 이야기의 세 조각들

내가 사랑한 것들 3

3. 잃어버린 이야기의 세 조각들 THREE FRAGMENTS OF A LOST TALE              


    

하나의 작품이 어떤 영적인 체험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2012년 8월의 어느날 헌팅턴 라이브러리에 갔을 때가 그랬다.     


헌팅턴 라이브러리가 있는 LA 북동부 패서디나는 조용하고 고급스러운 주택가이다. 가는 길엔 마침 영혼처럼 붉은 해당화가 지천이었다. 어느 도시에 가건 나는 시간을 내 도서관을 들린다. 도서관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곳 중의 하나이다. LA에는 아름다운 도서관이 많은데 헌팅턴 라이브러리는 클래식 도서 수집으로 특히 유명한 곳이다.  직접 가보니 헌팅턴 라이브러리는 도서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숲과 정원, 식물원을 가진 거대한 공원에 가까웠다. 중고렌트카 회사에서 빌린 10년 된 낡은 캠리를 주차장에 대고 본관 건물 쪽으로 한참 걸어 들어갔다. 주차장에 내릴 때부터 이렇게 더운 데를 왜 왔을까 하는 후회의 감정마저 들 만큼 야외의 태양은 따가웠다. 게다가 끔찍하게 습했다. 야외 사우나에서 걷고 있는 느낌. 건조하고 상쾌한 LA 서부와는 너무나 다른 텁텁한 불쾌감. 패서디나는 서쪽 바다에서 떨어져 사막 쪽에 가까워서 그런지 훨씬 온도가 높다고 한다.      


실내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제법 시원해지자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어둡고 차분한 로비의 한켠에서 뭔가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시선을 돌린 그곳엔 기묘한 느낌의 전시회 배너 하나가 걸려 있었다. 기이하게 생긴 남자의 토르소. 나무로 된 얼굴. 뭉툭하게 잘린 머리 윗부분에 나뭇가지로 만든 토끼 같은 귀가 뾰족하게 달려있었다. 흐릿한 갈색 유리로 된 눈을 한 지적이고 사려 깊은 표정. 토끼 남자는 구체 관절로 된 손가락을 하나 입에 대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제목은 THREE FRAGMENTS OF A LOST TALE, 잃어버린 이야기의 세 조각들. 갑자기 몸 안에서 데엥하고 큰 종이 치는 것 같았다. 사막을 건너다 예수의 영혼을 만난 바울 정도의 놀라운 영적인 체험은 아니겠지만, 그림을 보고 쓰러진 스탕달에 비견될 정도로는 영혼을 건드리는 느낌이랄까.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안내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이미 끝난 전시였다. 조금 일찍 오셨어야죠! 이런! 아쉬움을 달래려고 보니 전시를 하고 발행한 책이 있었다. 그 책을 사서 할리우드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작가가 존 프레임 John Frame이었다. 존은 산속에 집을 짓고 자신의 예술세계에 몰입해있는 은둔자이다.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존 러스킨의 생각을 말 그대로 따른다. 예술은 3개의 H(Head머리, Hand손, Heart마음)가 합해져야 한다는 것. 존은 자신의 작품을 만드는 방법을 삼위일체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지적인 요소와 기술적인 요소 그리고 자신만의 온전한 경험을 아울러 작품을 만들 때 진정한 삼위일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그는 작품의 모든 요소를 직접 만든다. 만들 수 없는 것은 직접 줍거나 채취한다. 눈동자를 찾아 인형 가게를 직접 돌아다니고, 작품에 필요한 돌을 찾아 숲과 냇가를 헤맨다. 조각뿐만 아니라 조각의 기계역학적인 움직임도 직접 만들어낸다. 영상을 만들기 위해 스톱모션 촬영과 조명, 편집을 독학했다. 음악도 스스로 만든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것. 고달프겠지만 그는 아티스트가 추구할 수 있는 정점에 가 있다. 나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글을 쓰고 연출을 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일이다. 할 수 있다 해도 시간이 허락해주지 않는다. 시간은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12분 30초짜리 이 작품을 만드는데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 지점에서 그는 예술가라기보다 오히려 종교적 구도자에 가깝다.     



그가 만든 스톱모션으로 된 영상을 보았다. 동화 같기도 하고 신화 같기도 한 세계. 동물인 듯 사람인 듯 기괴한 모양을 한 나무로 된 존재들이 살아서 움직인다. 꿈속의 풍경인데 오히려 너무 실재 같아서 놀란다. 불가해한 삶의 미스테리, 그럼에도 그 이유를 찾아가는 존재들의 애달픈 몸짓.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는 슬픔, 안타까움, 공허함, 애상, 적막이 영적인 음악을 따라 파도처럼 굽이친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여기에 있는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가고 나면 그 다음엔 어떻게 되는가?’

존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작품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이 무엇에 관한 것이냐고 물으면 그는 그 어떤 것에 관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의 작품의 의미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보고 그 떠오른 생각이 흘러가게 두는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라는 것. 그리고 그 생각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그대로 두라는let it go 것. 이것이 구도자로서의 아티스트 존 프레임이 던진 화두였다.    

 

나는 헌팅턴 라이브러리에서 사 온 그 책을 책장 위 잘 보이는 곳에 세워두었다. 그리고 가끔 꺼내 보며 이 놀라운 아티스트를 생각한다. 존은 지금도 어디선가 계곡을 헤매며 돌을 줍고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노라면 왠지 위로가 된다. 나도 모르게 미소짓게 된다. 지상의 어딘가에는 혼자 묵묵히 돌을 줍고 있는 예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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