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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호 Jan 23. 2021

코쉬의 포스터

내가 사랑한 것들 2

2.코쉬의 포스터



여행지에서 때로 우리는 전혀 예상치 않은 신기루를 만난다. 2012년 8월의 그날이 그랬다.


나는 선셋 대로변을 걷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달력을 볼 필요가 없는 눈부신 캘리포니아의 날씨였다. 진부하지만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 California Dreaming'이 배경음악으로 흐르면 딱맞을 날이었다. 일년에 비가 많아야 서너 번 온다는 LA였다. 그래서 오픈카도 그냥 뚜껑을 닫지 않은 채 밤낮으로 어디나 주차해 있었다. 그 귀한 비가 왔을 때 마치 우리나라에서 큰 눈이 온 날인 양 교통대란이 일어나는 어이없는 경험을 나도 한번 하기는 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실이다.


헐리우드 차이니즈 극장을 지나 헐리우드 고등학교 쪽으로 내려가는 길로 처음 산책을 나온 길이었다. 느닷없이 솟은 하얀 기둥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옛날 영화에 나올 법한 우주 스테이션 모양이랄까? 빛바랜 하얀 타워는 꼭대기에 똑같이 퇴색한 파란 지구본을 이고 있었다. 그 지구본은 ‘CROSSROADS OF THE WORLD’라는 문구를 적도 부분에 벨트처럼 걸고 있었다. 타워 안쪽으로는 도저히 거기 있을 법하지 않은 빈티지한 멕시코풍의 건물들이 옹기종기 자리잡고 있었다. 주변은 모던한 도심의 콘크리트 빌딩이다. 어째서 이런 곳이 있을 수 있는 거지? 게다가 ‘세계의 교차로’라니! 그 대범한 표현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런 생각에 마음이 풀어졌을까? 나는 어느새 타워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사람이 보이지 않아 퍼블릭한 공간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호기심이 일단 더 컸다. 건물보다 키 큰 야자수를 배경으로 아이보리 색 벽, 붉은 지붕으로 된 아담한 라틴풍의 2층 빌라가 긴 중정을 따라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완벽하게 보존된 유령도시 같기도 했다.


나는 오손 웰스나 빌리 와일더 감독의 영화 속 같은 세계를 사진을 찍으며 어슬렁대고 있었다.  갑자기 키 큰 한 백인 남자가 다가 왔다. 아이쿠! 관리인이구나! 나는 급하게 인사를 하고 들어와도 되는 곳인지 몰라서…, 어쩌고 하면서 더듬거렸다. 남자는 다행히 무서운 관리인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다. 그는 불안한 방문객을 친절하게 맞아 줄 뿐 아니라 심지어 그곳을 구경도 시켜주었다. 그의 이름은 존. 존은 흔한 이름이지만, 내가 만난 존들은 다 착했다. 물론 나의 경험에 따른 확증편견이겠지만. 그는 나보다 대여섯살은 많아보였지만 첫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는 감독이었다. 반가웠다. 만 리 이국의 땅에서 이렇게 우연히 동종의 업을 가진 사람을 만난 것이었다.


존은 입구의 반대쪽에 있는 자신의 편집실로 나를 초대했다. 내가 좋아하는 채도가 높은 네이비색의 문을 열고 들어갔던 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몇 계단 내려가는 내부는 편집용 맥과 오디오 장비가 놓여 있는 테이블과 의자 몇 개로 단출했다. 존은 편집 중인 그의 작품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모든 감독이 그렇듯이 수줍으면서도 기대에 찬 표정으로. 잊혀진 한 포크가수를 찾아가는 여정. 편집은 나쁘지 않았고, 찾아가는 여정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가수의 노래는 왜 묻혔을까 싶게 호소력이 있었다. 내 칭찬에 존의 얼굴이 환하게 달아올랐다. 우리는 제법 친해졌고 다음 날 점심을 같이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지붕 위의 고양이’, 그런 이름을 가진 카페였던 것 같다. 짙푸른 열대 나무들이 싱그러운 정원의 테이블. 나는 에그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하고 그는 파스타와 커피를 시켰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존은 친한 친구의 작업실이 예의 크로스로드(CROSSROADS OF THE WORLD)에 있는데 가보지 않겠냐고 했다. Why not?     


크로스로드의 진입로가 끝나는 오른쪽 빌라 이 층. 삐걱거리는 좁은 계단을 올라가니 앞머리가 없는 백발의 중년 남자 존 코쉬(John Kosh)와 줄무늬 고양이를 안은 키가 크고 푸근하게 생긴 그의 아내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제법 긴 복도엔 히치콕 감독의 전신상 배너가 서 있었다. 왜냐고 물어보자 이곳은 히치콕 감독의 옛날 사무실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밤이 되면 히치콕이 복도를 걸어 다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코쉬는 심한 영국식 액센트로 썰렁한 영국식 농담을 하길 좋아하는 전형적인 영국인이었다.  영국 유학 시절 친하게 지내던 옆집 노인들과 별반 차이없는 그의 말투와 농담이 나로서는 무척 정겨웠다. 게다가 그도 존이다! 더 말해서 무엇하랴.

    

응접실 벽에는 오래된 명반들이 걸려 있었고, 한켠엔 그래미상 트로피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그래미상 트로피가 이런 취급을 받아도 되나? 나는 그래미상 트로피라는 걸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본 적이 없었다. 비틀즈의 전설적 앨범, <애비 로드>의 커버 디자이너. 존 코쉬는 수많은 전설적 앨범들의 아트 디렉터였고 그 자신 다큐멘터리 감독이기도 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대가가 바로 내 눈앞에서 연신 썰렁한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 시간 넘게 존(레논), 폴(메카트니), 엘튼(존)을 비롯해서 그와 작업을 같이 했던 수많은 아티스트들의 숨겨진 사생활을 들으며 낄낄거렸다. 그는 대가인 척 잰 체하지 않았고, 동양에서 온 젊은 감독과 친구처럼 편안히 어울려 주었다. 코쉬는 내 영화를 보고 칭찬해주었다. 놀라운 영화다. 할리우드에 오면 도와주겠다(예의상 한 말이겠지만). 그렇게 우리는 즐겁게 떠들다 헤어졌다. 헤어지면서 코쉬는 나에게 자신의 앨범 자켓들로 디자인된 포스터 하나를 선물해주었다. 포스터에, For Sangho. What A GAK!!!이라 쓰고 그 밑에 자신의 사인을 했다.     


첫 영화를 개봉하고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산후우울증과 비슷할지 모르겠는데 모든 것이 허무했다. 나는 삶의 목표를 잃고 표류하고 있었다. 병원에 가보니 신체의 호르몬 균형이 다 깨져 있었다. 일단 떠났다. 두 달 동안 할리우드 근처에 집을 하나 빌렸다. 처음에는 어슬렁거리는 게 생활의 거의 전부였다. 그러다 우연히 존과 또다른 존, 존 코쉬를 만났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만남이 제법 위로가 되었나 보다. 다시 조금씩 예술에 대한 의욕이 생겨났다.     


LA에서 퍼시픽하이웨이의 모로베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을 다니는 그 몇 달 동안 나는 그 포스터를 하드롤통에 담아 소중히 들고 다녔다. 짐이 조금씩 늘어갔지만 그 포스터는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액자를 만들어 늘 보이는 곳에 두었다. 포스터를 보면 영화의 한 장면 같던 유쾌하고 따스한 그 며칠들이 생각난다. 눈이 시린 캘리포니아의 하늘. 할리우드의 키 큰 야자수와 빈티지한 라틴풍의 건물들.  그리고 그속에서 예술을 향해 살아가는 젊고 또 나이 든 사람들. 나와 존 그리고 코쉬. 전혀 다른 곳, 다른 나라와 다른 문화에 사는 사람들이 우연히 만나 마음을 열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게 가능했던 건 아마 우리가 다 같은 꿈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런 행운은 어떻게 주어졌을까? 우연히 발견한 곳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들어가 봤기 때문일까? 아니면 절실하게 헤매는 자를 위한 신의 작은 선물이었을까?     


ps.

CROSSROADS OF THE WORLD는 1930년대에 지어진 미국 최초의 야외쇼핑몰이었다. 지금은 대부분 음반 제작자와 프로듀서, 텔레비전 및 영화 대본 작가, 영화 및 녹음 회사, 소설가, 의상 디자이너 등 주로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개인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1930년대 LA의 풍경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일견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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