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서지몽(華胥之夢)

by 몽중몽
華胥之夢
: 낮잠 혹은 좋은 꿈. 이상향.



…… 동박새와 동백나무에 관한 설화를 아세요?


“……어느 나라에 포악한 왕이 있었는데, 자신과 달리 선량한 동생과 조카들을 경계했습니다. 폭군은 착한 동생과 그의 아들들을 죽일 기회만 생각하다가, 동생에게 조카들이 보고 싶으니 궁궐로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형의 속셈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식들과 닮은 아이들을 양자로 삼고, 진짜 두 아들은 다른 곳에 숨겨 두었지요.

폭군에게 보내진 두 양자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후 폭군은 동생이 자기를 속인 것을 알았습니다. 동생과 그의 진짜 아들들을 궁궐로 끌고 온 폭군은, 동생에게 칼을 쥐여주며 명했습니다. 군주를 속인 죄로 네 자식들을 죽이라고. 그러자 두 아이들은 새로 변하여 날아갔으며 동생은 붉은 피를 토하면서 칼로 자결하였습니다. 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점점 커져서 우렛소리로 변하더니, 번개가 치고 벼락이 떨어져 궁궐이 무너지고 폭군은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습니다

궁궐이 무너진 자리에서 큰 나무 한 그루가 생겨났으며 하늘로 날아간 두 마리의 새는 다시 내려와 나무에 둥지를 틀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동백나무와 동박새라는 전설입니다.”*

“동화 같은 이야기이네.”

“동화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 너무 슬프지 않습니까……?”

“폐주(廢主)의 일화를 연상시켜.”

“……그렇습니까…….”

“지난날의 어지러움이 가라앉고, 옥좌가 제자리를 찾았으니 지금의 태평이 있는 것이지.”

“예.”


그런데,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폭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


‘이건 꿈이군요.’

노인은 그리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깨달았다. 확인을 위하여 어딘가를 꼬집어 볼 필요도 없다.

“자고 있었어?”

“…….”

노인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시선만을 움직여 옆을 바라보았다. 취옹의(醉翁倚: 흔들의자)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깡마른 손에는 주름이 가득하다. 다시 시선을 옮기자 맞은편 의자에 앉아 웃고 있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모습은 처음 보았어.”

‘그렇겠지요. 도련님…….’

저 아이가 나보다 10살 아래였나?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무튼 살아서 나이를 먹었을 경우의 가정이지만, 지금 저렇게 어린 모습일리는 없다. 향년(享年)으로 따져도 약관(弱冠)은 넘긴 상태였으니까.

‘그러면 이건 유령……환상……?……아직 죽을 때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오래간만인데 아무 말도 없어?”

생각을 자르고 소년의 말을 끼어들었다.

“……반갑습니다…….”

노인은 입가를 올리며 답했다.

그리고 이제 백탕(白湯)이라도 내주는 것이 맞겠지만, 어차피 저쪽도 불청객이니 거기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의에 어긋난 것은 아니겠지.

“어?”

소년은 갸웃거렸다.

무언가 불만스러운 표정. 어떤 반응을 보이기를 기대한 것일까?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조롱하는 모습? 이제 복수도 마쳤고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에 올랐으니 거리낄 것이 없이 ‘본성’을 드러내리라 생각했을까.

‘그럴 리가요. 그렇게 쉽게 방심하고 쓸데없이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오지 못해요.’

“이제는 빤히 드러나는 거짓말도 할 줄 아네?”

“예? 거짓말이 아닙니다만.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당연히 반갑지 않겠습니까.”

‘뭐, 반쯤은 진심인데요.’

“아니, 하지만…….”

언제나 그러했듯이 노인이 온화하게 미소 짓자, 소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려다가 간신히 누그러진다.

“날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물론이지요. 제가 어떻게 도련님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몇십 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지요.”

“……네가 죽인 사람이니까?”

“…….”

노인은 그저 은은한 미소를 유지하였다.

그렇지. 내가 죽게 만든 사람인데. 그것을 잊는다면 말이 되겠는가. 하기야, ‘누군가’처럼 죽인 사람이 한 둘이 아니어서 기억은커녕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난 정말로 널 믿었어.”

“예.”

“그런데 너는……!”

“저도 도련님을 믿었습니다. 나쁜 분이 아니라는 점에서요.”

“하!”

분노한 표정이 된 소년이 벌떡 일어나 노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노인은 자세조차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그 표정은 정말로 진지하여 도저히 거짓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본의가 아니었다고 해야겠네요. 변명 같지만 저는 도련님께는 그 어떤 감정도 없었고 위해를 끼칠 생각은 없었습니다. 믿어 주시지 않아도 어쩔 수 없습니다만, 정말이에요. 물론…….”

노인은 저도 모르게 미소가 떠오르려는 것을 억누르며 평온한 어조로 덧붙였다.

“영존(令尊: 남의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표현)에 대해서라면 다르겠지만요.”

“네가 감히!”

소년의 손은 어느새 노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동요 없이 소년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아, 역시 제게 복수라도 하러 오신 겁니까?”

“배은망덕하게…….”

소년의 손에 붙들린 부분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아프다. 그러나 노인은 이번에야 말로 웃음을 터트리는 것을 참지 못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잘못했다고!”

“예. 도련님이 잘못한 것은 없지요.”

노인은 자신의 목을 조르는 손을 붙잡아서 떼어 놓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요……도련님께서 제게 잘해 주신 것도 있고 잘못하신 것도 있겠지만, 그런 것은 그저 사소한 일에 불과했고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저는……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으니까요.”

“왜, 왜 그랬어?”

“출세? 원한? 보통은 이 둘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둘 다였을 수도 있고. 진부한 이야기입니다.”

“리(矖), 너는…….”

소년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노인은 잠시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것은 상당히 오래간만이다

“너는……정말로 그 어떤 후회도 없었던 거야?”

“아……. 그런 것 따위 없습니다. 전혀.”


*


“리(矖).”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청년은 눈을 떴다.

“자고 있었어?”

“아뇨.”

눈앞에서 고개를 갸웃하는 소년을 보고는 청년은 엎드려 있던 서안(書案)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깐 쉬고 있었습니다.”

“응……저기 말이야.”

소년은 다소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 낮잠 자다가 악몽을 꾼 것 같아. 무슨 꿈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그렇습니까.”

저도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쩐지 즐거운 꿈을 꾼 것 같은데요.





* 이호준. (2007.11). 「정열의 꽃 동백」, 『한국자연환경보전협회』,

<http://www.kacn.org/data/story/500105.pdf>, p. 67-69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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