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隙沈舟
: 조그마한 틈으로 물이 새어들어 배가 가라앉는다. 작은 일을 게을리하면 큰 재앙이 닥치게 됨.
*
살얼음이 끼기 시작한 강물 위를 맴돌던 작은 배가 갑자기 흔들리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스르르 기울기 시작했다. 강물이 배 옆구리를 때리며 배를 흔들었다. 배 안의 사람들이 균형을 잡으려 허둥대는 순간, 삐걱거리는 나무판자가 비명을 지르듯 울었다.
한 번 기울기 시작하자 균형은 눈 깜짝할 새에 무너졌다.
당황한 비명과 외침이 뒤엉키는 가운데, 누군가 강물에 뛰어드는 둔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차가운 물결이 사방으로 튀며 얼어붙은 공기 속에 퍼졌다.
*
성하(城下) 마을로 향하는 길. 흙길은 지난밤 서리가 녹아 질퍽했지만, 두 남자는 익숙한 듯 발걸음을 옮겼다. 겨울 햇살은 희미했으나, 드문드문 마른 갈대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뺨을 얼얼하게 스쳤다.
건장한 체격의 사내, 염석(閻晰)은 짐을 든 동행을 향해 열심히 말을 이어갔다.
“이름이 낙리(駱矖)라고 했었지? 너, 내가 추 장사(長史)*에게 잘 말해주어서 식객(食客)으로 들어가는 거야. 그러니까…….”
뒷말을 흐리던 남자는 슬쩍 곁눈질로 상대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살짝 불안함을 느꼈다. 이 녀석 속으로 비웃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낙리는 진지한 목소리로 그가 원하는 말을 해주었다.
“…….”
염석은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사실은 자신이야말로 고마워해야 했다. 사고가 났을 때 낙리가 강물에 뛰어들어 도련님을 구하지 않았다면, 호위 자리를 잃는 정도가 아니라 목을 내놔야 했을지도 모른다.
‘운도 없어요. 나는…….’
배에 구멍이 난 것은 뱃사공이 관리를 못한 때문이고 그런 허술한 배를 타보고 싶다고 우긴 것은 철없는 도련님이다. 말리지 않은 책임은……무시하자.
‘게다가 물이 좀 새는 정도로 당황해서 허둥대지만 않았으면 그렇게 배가 기울지도 않았다고…….’
염석은 괜스레 헛기침을 내뱉으며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음……. 네가 운이 좋은 편이야. 도련님이 널 제법 마음에 들어 하신다고 해.”
그러니까 도련님에게 나의 복직을 부탁해 달라고……벌써부터 말하는 것은 좀 이르겠지.
낙리가 정말로 도련님의 마음에 들게 되고 놀이상대로나마 자리를 잡을지도 두고 봐야 하고, 그와 좀 더 친해질 필요도 있고.
겉보기로는 어리숙하게 웃는 순박하기 그지없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지난 며칠 동안 지켜본 바로는 의외로 영악한 구석이 있었다. 도련님을 구한 공으로 받은 하사품을 거절하며 ‘착한 척’을 하더니, 이내 감기에 걸려서 드러눕는 바람에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는 하소연을 하였다. 물론, 그만둔 일을 다시 하게 도와달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확실히, 권세가(權勢家)의 식객이 되는 것이 돈 보다 가치 있기는 하지.’
혹시 어르신께 줄을 대어 출사(出仕)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별 가망이 없다는 것을 나중에 천천히 말해주어야 한다. 도련님은 적자(嫡子)도 아니고 잘난 형들이 있다 보니 그렇게까지 총애 받고 있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어쨌든 자식이니 나중에 아버지 덕으로 적당한 관직을 받을 터이고, 그 아랫사람도 잘하면 말직(末職)이라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잠시 생각을 하던 염석은 불현듯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상중(喪中)이라고 들었는데 맞아?”
낙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심상(心喪)**으로 대신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렇구나. 그럼 술자리는 나중으로 미루어야겠네.”
“원래 마시지 않습니다.”
염석이 아쉬운 듯 중얼거리자, 낙리는 웃으며 담담하게 답했다.
잠시 걸음을 옮기던 염석이 또 다른 화제를 꺼냈다.
“아, 내 누이가 그림을 좀 그려. 하지만, 혹시 보게 되더라도 절대 평가하지 마라.”
낙리가 의아한 눈길을 보내자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툴툴거렸다.
“전에 내가 그림을 보고 ‘나무가 좀 못생겼네’ 했더니 언짢은 기색이더라고. 그래서 다음엔 무조건 ‘멋지다’고 했더니, 또 화를 내지 뭐야.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투덜거리다 잠시 말을 멈춘 염석이 낙리를 바라보았다.
“아, 내가 좀 말이 많지?”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내가 말을 놨네. 동갑이니 너도 편하게 말해라. 아니면 서로 존대를 할까?”
“저는 이대로가 좋겠습니다. 몇 달이라도 형님이 연상이고, 저를 많이 도와주셨으니까요.”
“그래? 알았다.”
염석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사대부 집안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신분을 내세우지 않는군. 꽤 괜찮은 성품이야.’
그는 내심 낙리에 대한 평가를 조금 높여 주었다.
두 사람은 어느 작은 집 앞에 도착하여 걸음을 멈추었다. 주위의 다른 비슷비슷한 집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마당 한쪽에 서있는 동백나무가 눈에 띄었다.
“……그러니까 거기서 연락오기 전까지는 당분간 우리 집에서 묵으라고. 짐은 정말로 그것 하나뿐이야?”
“네. 그리고 아까 말했듯이 강아지도 데려와야…….”
“……어?!”
대문을 열던 염석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왔어?”
과녁을 세워두고 활쏘기 연습을 하던 훤칠한 청년이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남복(男服)을 하고 있었지만 낙리는 그 사람이 여자라는 것은 금세 알 수 있었다.
“뭐 하고 있는 거야? 나무에다 활을 쏘면 어떡해!”
동백나무에는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잔뜩 박혀 있었다.
“아니, 나는 과녁에다가 쏘려고 한 건데…….”
“활 배운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위험하게. 그냥 연습용 화살을 쓰라고.”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니까.”
잠시 티격태격하다가 그는 고개를 돌려 낙리를 보았다.
“아, 미안. 얘는 내 여동생…….”
“누나야.”
“……그래, 일각(一刻) 먼저 태어난 누나다. 온(瑥)이라고 부르면 돼. 누나, 이쪽은 우리 집에서 며칠 묵을 손님이야.”
“처음 뵙겠습니다. 낙리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염온(閻瑥)입니다. 저도…….”
낙리는 자연스러운 미소와 함께 목례(目禮)를 하였고 염온은 내외(內外)하는 척도 하지 않고 그대로 답했다.
"화살은 꼭 치워!"
"알았어."
다시 표적으로 눈을 돌리는 염온을 향해 삐죽한 표정을 지어보인 염석은 이내 웃는 표정으로 낙리에게 말했다.
“방 좀 제대로 치워졌는지 보고 올테니, 잠깐만 기다려라…….”
염석이 짐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자, 낙리는 그 뒤를 따라 마루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때 활을 들어 올리던 염온이 불쑥 말을 건넸다.
“혹시…… ‘그 날’ 도련님을 구해주신 분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덕분에 제 동생도 크게 경을 치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간단한 인사였지만, 염온의 눈길은 곧장 거두어지지 않았다. 무표정했으나, 눈빛 어딘가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마치 상대의 표정 속 미세한 틈새를 찾으려는 듯 그녀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낙리는 그것을 느끼면서도 태연하게 웃었다.
“폐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걱정 마세요.”
평온한 말투였지만, 그 끝자락에는 잠깐의 침묵을 만드는 여운이 담겨 있었다.
염온은 미간을 아주 살짝 좁혔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활을 다시 든 후에도, 시선 끝자락은 무심한 듯 낙리 쪽을 스쳐갔다.
그때, 방 안에서 염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낙리! 이쪽으로 와.”
묘한 정적은 그 한마디에 흩어졌다.
염석이 다시 마당으로 나와 낙리의 짐을 받아 들며 웃었다.
“뭘 그렇게 서 있냐? 들어가자.”
그리고는 낙리의 어깨를 툭 치며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아, 한 가지 덧붙이자면……내 마누라는 무던하지만, 누이님은 예민하다. 조심해라.”
낙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염온은 활시위를 당겼다.
짧은 숨결과 함께 화살이 날아가 과녁에 꽂혔다.
그 서슬에 파문처럼 흔들린 잎사귀가 서늘한 바람에 떨렸다.
* 장사(長史) : 고위 관료를 보좌하며 관부(官府) 내의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책임자
** 심상(心喪) : 상복을 입지는 않고 마음으로 치르는 상(喪). 혈연이 아닌 사람을 위하여 하거나. 혈연의 장례라도 부득이한 경우 심상으로 대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