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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자 위 향로에서 은은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무거운 자색(紫色) 관복을 벗은 영(英) 승상(丞相)은 담청색 장포(長布)에 흑건(黑巾)을 쓰고 의자에 앉았다. 시비(侍婢)들이 물러가자, 방 안엔 고요가 감돌았다.
정면을 응시한 채, 영 승상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낙리(駱矖)라 하는 서생은 유(瓇)의 밑으로 들이기로 한 것인가?”
“예.”
고개를 숙이고 기다리던 추홍(隹洪)이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대답했다.
“확인해 보았습니다만, 특별히 문제 될 점은 없는 자입니다.”
"그렇군."
영 승상이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그 애도 이제는 부하 하나쯤 거느려야 아랫사람 다루는 법도 배우고, 권위라는 게 뭔지도 알게 되겠지."
그는 고개를 돌려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았다. 손끝은 천천히 탁자 위의 책 표지를 스쳤다.
추홍의 말이 이어졌다.
“눈에 띌 만한 이력은 없습니다. 시골 서생 집안의 자제로, 몇 해 전 황도(皇都)에 올라와 부모 지인의 집에 머무르며 대서(代書) 일로 생계를 잇고 있습니다. 현재 과거를 준비 중인데, 작년에 전염병으로 부모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낙리에 대한 조사는 추홍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굳이 공을 들인 부분이 있다면…….
“그리고……위위경(衛尉卿)*과의 관계도 살펴보았으나, 특별한 연관은 없었습니다.”
“음…….”
승상이 무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서생인 낙리에 대해 걸렸던 것이 있다면 하나뿐이었다.
그가 하필, 추홍의 주인을 지독히 싫어하며 그것을 감추려 하지도 않는 위위경 낙빈(駱鑌)과 같은 성(姓)을 가졌다는 점.
이에 적당한 구실을 마련하여 낙빈을 직접 만나볼까 하였으나, 오히려 그쪽에서 먼저 전언을 보내왔다.
지금 당장 위위시(衛尉寺)*로 오라는 것이었다.
“오랜만이군. 추 장사(長史).”
무표정한 얼굴과 담담한 어조였지만 불쾌함은 분명하게 전해졌다.
“요즘 한가한 모양이군. 날 뒷조사할 정도로.”
승상부(丞相府)의 장사를 감히 이렇게 대하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추홍의 마음속에 불쾌감이 스쳤다.
하지만 ‘뭐가 문제냐’고 묻는다면, 달리 할 말은 없었다. 나이 차이도 거의 없고, 품계로 따지자면 정 3품 위위경인 그가 추홍을 하대한다 한들 틀린 일은 아니었으니.
무엇보다, 낙빈이 지금 자리에 오른 것이 연공(年功)보다 황제의 총애 덕분이라는 건 세상이 다 아는 바였다. 다소 무례하다 하더라도, 참고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뒷조사라니요…….”
“궁금한 것이 있다면 나에게 직접 물으면 될 것을, 남의 족보를 뒤적이니 기분이 상하지 않겠나.”
준비한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낙빈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잘랐다.
“복야(僕射)**……아니, 이제는 승상대인(丞相大人)이시지. 그분의 뜻인가?”
빈정거림이 가득한 말투였다. 추홍도 낙빈의 스승이 태사(太師)***로 ‘승진’한 것을 들먹이며 비슷하게 되받아치고 싶었지만, 괜한 충돌은 원하지 않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승상대인의 귀하신 막내아드님이 사고를 당했다지? 서생 하나가 구해줬다고 들었네. 다행이야. 그런데 그 서생을 챙겨주려다 보니, 낙 씨라더군. 혹시나 해서 조사를 명하신 것이겠지.”
실제와 다소 어긋난 부분이 있었지만, 이미 기분이 상한 사람 앞에서 굳이 정정할 일은 아니었다.
“답을 하자면, 난 그 사람과 아는 사이가 아니다. 낙 씨가 세상에 한둘인가? 내가 어찌 그 사람들을 일일이 알겠나?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알 일이지.”
낙빈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은 추홍이 조사한 바와 일치했다. 애초에 낙빈에게 가까운 일가친척은 얼마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위위경을 뒷조사할 의도는 결코…….”
“그런데 말이지.”
낙빈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잘 생각해 보니, 어쩌면 친척일지도 모르겠군. 데려와.”
“……네?”
“그러니까, 가까우면……뭐, 25촌 정도는 될지도 모르지? 아마도 그럴 거네.”
25촌이라면, 남이나 다름없다.
“친척이면 친하게 지내야지. 그러니 내게 인사 오라고 하게. 잘 대접해 주겠네.”
“…….”
사실, 낙리에게 물었을 때 그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위위경께서 저와 동성(同姓)이신가요? 그럼 먼 친척일지도 모르겠네요. 인사라도 드려야 하나…….”
하기야 가까운 사이였다면 진작 분경(奔競 : 벼슬을 얻기 위한 청탁 활동)을 하러 찾아갔을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을 굳이 만나게 주선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대접’할 지 뻔히 보이는 일이었으니까.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별채에 식객 하나 늘어나는 것뿐인데, 자네가 너무 신경을 쓰는군.”
영 승상이 혀를 찼다.
“위위경이 황상(皇上)께 불평이라도 하면 내 체면이 어찌 되겠나.”
“송구합니다.”
추홍은 다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사실 얼마 전, “낙 씨라 하니…… 위위경과 친척이기라도 한 것인가…….” 하고 넌지시 말했던 이가 다름 아닌 승상이었지만, 이들 주종(主從) 사이에서 그런 사소한 부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뭐, 그 문제는 자네가 알아서 적당히 처리하게.”
“예. 하옵고…….”
책을 펼치려던 영 승상이 추홍을 바라보았다.
“사고로 도련님께서 많이 놀라신 듯 합니다만…….”
‘이럴 때 한번 방문해 주시면 좋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은 끝내하지 않았다.
“……물건을 준비해 두었으니, 자네가 들고 가보게.”
“…….”
승상은 손을 들어 향로 뚜껑을 닫았다.
연기가 끊기자, 고요한 방은 더없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
창호 밖 초승달이 흐릿한 푸른빛을 띤 채 낮게 걸려 있었다. 서늘한 밤바람이 휘장을 스치듯 흔들었다.
병풍 너머 침상에 기댄 어린 소년, 영유(英瓇)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적막 속,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
어린 눈에 잠시 희미한 기대가 번졌으나, 방문을 밀고 들어온 이는 큰 형인 영회(英恢)였다.
“물에 빠졌다고 들었다.”
평소보다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영회의 손에는 노란 귤(橘)이 담긴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몸은 괜찮은 거냐?”
잠시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소년은 곧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영회의 시선이 협탁(狹卓) 위, 정확히는 그 위에 놓인 과일 바구니로 향했다.
“사(嗣)도 왔었니?”
“응? 아니요. 작은 형은 조정 일로 바쁘시다고 해서요, 저 귤 바구니만 보냈어요.”
“그렇구나…….”
별다를 것 없는 안부 대화가 한두 마디 오갈 즈음, 조용히 문이 다시 열렸다. 소년은 다시 희망을 품었으나, 무언가 상자를 손에 들고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아버지의 심복인 추홍이었다.
“추 장사.”
“많이 좋아지셨는지요? 도련님.”
부드러운 말투로 인사하며 들어서던 추홍은 영회를 보고는 일순 멈칫하며 가늘게 눈꼬리를 접었다.
그것은 아주 잠시의 반응이었으나 그 미묘한 불편을 읽어낸 영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보마.”
“예.”
소년은 곧바로 추홍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음……. 저기……아버님은…….”
“대인(大人)께서 몹시 염려하고 계셨습니다. 직접 오시고자 하셨지만 조정일로 바쁘셔서…….”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소년의 눈빛은 연못처럼 잔잔했지만, 그 밑엔 아쉬움이 일렁였다.
밖에 나선 영회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염려하고 계시다는 말, 당연히 진심이시겠지. 허나 바빠 오지 못했다는 건…….’
그는 조용히 등을 돌리며 긴 복도를 따라 발을 옮겼다. 어둠은 깊었고, 등불 아래 그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다.
방 안에는 계속 대화가 흘렀다.
“그러면……그 사람이 이쪽으로 오는 거야?”
영유는 알 듯 말 듯 한 불안과 궁금증을 담아 물었다.
“예, 거처가 마련되는 대로 도련님을 찾아뵙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야?”
추홍은 말을 멈춘 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가 직접 만나보았지만, 딱히 특별하다 할 만한 점은 없었습니다.”
그는 소년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조용하고 무던하며 과하게 나서지 않는 성격입니다. 겉모습도, 말투도, 이력까지 평범했습니다.”
심심한 묘사였다. 그러나 추홍에겐 충분했다. ‘위험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낙리를 영유 곁에 둘 이유는 되었으니까.
그 이상을 바라지도, 맡기지도 않았다.
"그러니 도련님께서 굳이 마음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구석에 은근한 호기심이 스며들고 있었다.
* 위위시(衛尉寺) : 황실 의례와 궁성 경비를 담당하고 의장 및 병기를 관리하는 행정관청.
위위경(衛尉卿) : 위위시경(衛尉寺卿). 위위시의 장관
** 복야(僕射) : 상서복야(尙書僕射). 관리들을 총괄하던 상서성(尙書省)의 실질적 수장.
*** 태사(太師) : 군주의 자문 역할을 맡는 고위 관료. 주로 원로대신에게 내리는 명예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