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寒 : 봄추위. 이른 봄날의 추위.
*
찬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정원. 새순 돋은 나뭇가지 사이로 쌀쌀한 바람이 스며들었다. 소년은 투호(投壺)에 한창 몰두하고 있었다. 휙 하고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화살은 통의 좁은 주둥이 속으로 사뿐히 들어갔다.
소년의 호위가 짧은 탄성을 터트리며 손뼉을 쳤다.
“정확하시네요!”
“내가 이긴 거지?”
“그렇습니다!”
그때, 하인 한 명이 달려와서 허리를 굽혔다.
“추 장사께서 오셨습니다.”
“응? 아!”
곧이어 발소리가 다가오자, 호위는 평소보다 한발 빨리 소년의 등 뒤로 물러섰다.
“잘 계셨습니까. 도련님.”
안으로 들어온 추홍의 등 뒤로 한 젊은이가 따르고 있었다.
“전에 말씀드린 그 사람입니다. 낙리라고 합니다.”
추홍은 낙리를 이끌고 영유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낙리 역시 머리를 조아렸다.
영유의 눈이 빛났다.
“아, 맞구나! 그날 물에서 나를 끌어 올린 사람이 너야?”
“예.”
낙리는 눈을 내리깔고 짧게 답했다.”
“고마워! 이리 와, 방으로 들어가자!”
환한 얼굴로 낙리를 올려다보던 영유가 손짓했다.
영유의 재촉에 낙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정원의 찬 기운이 서서히 사라지고 햇살이 비치는 복도가 발밑으로 이어졌다. 추홍은 동행하며 낙리에게 나지막이 일렀다.
“도련님께는 글 스승도 무예 선생도 따로 있네. 자네는 도련님의 심심함을 달래주고, 자잘한 수발을 드는 정도면 되지.”
추홍은 낙리의 얼굴을 살폈다. 기대가 어긋났을까 싶었지만 낙리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꽤 실망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마음이 놓인 얼굴이군. 역시 자신의 분수를 잘 아는가.’
*
그 무렵, 염온과 염석은 자신들의 집에서 한창 작업 중이었다. 두 사람은 동백나무 줄기에 깊게 팬 화살 자국을 진흙으로 메우고 있었다. 나무에 큰 도움이 될 거라 기대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보기 흉한 자국을 가리려는 것뿐이다.
가지 사이로 스며든 차가운 햇살이 두 사람의 얼굴에 닿았다.
“봐도 봐도 이해가 안 가. 왜 여기에다 활을 쏜 거야?”
염석이 진흙을 꾹꾹 눌러 바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시선은 나무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말은 명백히 염온을 향한 것이었다.
“…….”
“그러니까 날붙이를 쏘아댈 것이면 제대로 과녁에 맞히든지, 과녁에 맞힐 실력이 안 되면 연습용 화살을 쓰든지…….”
염온은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히 제 할 일만 했다. 한 손에 흙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상처 부위를 매끄럽게 다듬었다. 그 모습에 더욱 약이 오른 염석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그이가 친정에서 돌아오면 또 뭐라 할 것 아니야.”
“그보다는, 저 녀석 얘기를 꺼내겠지.
염온은 손에 묻은 진흙을 털며 턱짓으로 정원 한구석을 가리켰다. 염석의 눈길도 따라갔다. 정원 한쪽에 묶인 개는 졸린 지 하품을 하며 늘어졌다.
“아, 저 녀석도 문제지. 저걸 왜 두고 가서 사람 성가시게 하는지…….”
염석은 투덜거렸다. 낙리가 식객으로 들어갈 때 데려가려 했으나, 추홍이 허락하지 않는 바람에 그들이 맡게 된 개였다.
“나중에 다시 데려간다기에 별생각 없이 맡아줬더니 은근히 손이 많이 가. 추 장사는 왜 저 쪼그만 강아지가 위험해 보인다고 한 거야?”
그러다 염석은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라면 염온이 ‘네 부인은 네가 백수 된 것에 대해 잔소리하느라 나무는 신경도 안 쓸 거야.’ 따위의 말을 했을 텐데, 오늘은 의외로 잠잠했다.
‘그래도 누나라고 나름대로 배려해 주는 것인가?’
염온 역시 상념에 잠겨 있었다. 다른 때였다면 염석이 예상하는 독설을 하였겠지만, 오늘은 삼갔다. 남동생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염석이 일을 잃게 된 원인인 ‘사고’에 대한 꺼림칙함 때문이 더 컸다. 그 일에 대해서는 말을 아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염온의 머릿속에는 사고가 있던 날의 장면이 선명했다.
승상의 막내아들이 물에 빠진 것을 낙리가 구했다. 아이를 물에서 건져낸 직후, 찰나의 순간 낙리의 얼굴에 기묘한 일렁임이 스쳤다. 염온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착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미심쩍음이 남았다. 염석에게 말할까도 싶었지만, 자신이 제대로 본 것인지조차 확신하기 어려웠다.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표정. 어쩐지 불길했으나 그뿐이었다.
낙리를 은근히 떠보기도 하였고, 그가 자신들의 집에 머무는 동안에도 유심히 지켜보기도 하였으나 이상한 점은 없었다. 염온과 염석에게 공손했고, 개를 돌볼 땐 은근한 다정함까지 느껴졌다. 만약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면, 이토록 태연할 수는 없을 터였다.
분명 그 사고는 누군가 꾸미기 어려운 일이라 들었다. 애매한 직감 하나로 사람을 의심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염온은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 표정을 다시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그러려 애썼다.
“다 했다. 정리하자.”
“응.”
도구들을 정리하며 염온은 일어섰다.
늦겨울의 숨결이 여전한 바람 사이로 희미하게 꽃향기가 실려 왔다.
*
닫힌 창 너머로 희미한 햇살이 스며들었다. 귤껍질 벗기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고, 달고 씁쓸한 향이 화로의 온기를 타고 코끝에 스몄다.
영유는 조그마한 상 위에서 귤껍질을 벗겨 낙리에게 건넸다.
“이건 형들이 준 거야. 나 혼자 다 먹기에 많으니까, 너도 같이 먹자.”
영유는 낙리를 올려다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이제 넌 내 부하니까, 내가 챙겨 주어야지!”
추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낙리는 감사를 표하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영유는 손을 놀리며 낙리에게 재잘거렸다.
“본채에는 아버님과 마님이 계시는데, 허락 없이 들어가면 안 돼. 마님은 요즘 몸이 좀 안 좋으셔서 말이야.”
영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다른 별채 두 곳에도 형네 가족들이 사는데, 거기도 함부로 드나들면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사실 이 집 사정은 이미 추홍에게서 들었지만, 낙리는 연신 끄덕이며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진지하게 반응하였다.
방 한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추홍은, 낙리가 영유에게 제법 잘 맞을 것이라는 예감에 안도하였다. 도련님이 이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방 안의 공기는 부드럽고 포근해졌다. 한참을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영유는 하품을 하기 시작했고 추홍은 낙리에게 눈짓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 사람도 함께.”
“응? 그래…….”
낙리는 추홍의 뒤를 따르며 살며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귤 향기가 가득한 방을 나서자 찬 기운이 훅 끼쳐왔다. 낙리는 옅게 한숨을 쉬며 서늘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
복도를 걸어가며 추홍은 낙리에게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이야기하였고 낙리는 묵묵히 경청하였다.
“……그런데 염석의 집에 머물다 왔다고 들었는데, 그 녀석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문득 떠오른 듯 묻는 추홍의 질문에, 낙리는 잠시 대답을 고르다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요즘은 홀로 무예 연습에 몰두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저도 이사 준비로 바빠서 자주 마주치지는 못했지만……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낙리의 말에 추홍은 코웃음을 쳤다.
“그 녀석이라면 아마 복직을 바라고 있겠지. 허나……그날 사고는 그 녀석의 책임이 크다. 도련님께 다시 호위로 붙이기는 어려울 것이야.”
낙리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말을 들었다. 염석이 다시 영유 호위로 복직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낙리 역시 알고 있었고, 지금으로선 그 바람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추홍의 의견도 부정하지 않았다.
“실력은 꽤 있는 녀석이지만 머리가 단순해서 말이지……. 그러니 도련님 곁에서 빠진 게 오히려 다행일지도 몰라. 자네처럼 눈치 빠르고 과하지 않은 사람이 낫지.”
그 말에 낙리는 난감하다는 듯 어색한 웃음을 지었지만, 추홍은 신경 쓰지 않았다.
낙리는 오래 배운 사람처럼 자연스레 머리를 깊이 숙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생각했다.
추홍의 말과 행동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 나를 관찰하라 맡기고, 지금은 그 사람이 단순하다고 말하는 것은…….’
추홍의 말에 굳이 반박할 의향은 없었다. 염석은 단순해 보일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머무는 동안 느꼈던 염온의 시선은 달랐다. 어떤 날엔 무심한 듯했고, 또 어떤 날엔 마음을 꿰뚫듯 깊었다.
그런 누나의 동생이라면, 그저 가볍게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염석에게는 내가 나중에 다른 일을 알아봐 주겠다고 전해라.”
추홍이 마지막 말을 남기며 돌아섰다.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추홍이 멀어져가는 발걸음 소리만 남긴 채 돌아서자, 낙리의 고개가 서서히 들렸다. 그 얼굴에 무언가 복잡한 기색이 스쳤다.
그는 천천히 정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눈부시게 하얗게 빛났다.
입술 사이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날씨가……좀 더 빨리 풀리면 좋겠군요.”
바람이 옷자락을 살짝 흔들고 지나갔다. 낙리는 조용히 그 바람을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