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한(春寒) 2

by 몽중몽

*


초봄의 바람이 아직 다 녹지 않은 땅 위를 스쳐 지나갔다. 마당의 흙은 이제야 겨우 부드러워지기 시작한 참이었다.

염석은 마당 한편에 앉아 강아지에게 밥을 주고 있었다. 강아지는 짧은 꼬리를 흔들며 그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그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염석은 몸을 일으켰다.

“누구……? 어이쿠, 어서 와.”

문을 열며 환히 웃는 염석 앞에는 낙리가 서 있었다. 그는 그린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강녕하셨는지요? 존형(尊兄: 같은 또래 사이에서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말).

“잘 지내고말고. 그런데 딱딱하게 부르지 말고 편하게 불러. 형님이라고.”

“……들어가도 될까요?”

“응? 당연하지.”

집안으로 들어서자, 마루 끝에 앉아 다 쓴 붓들을 털던 염온이 낙리를 보고는 가볍게 눈인사만 하였다.



염석은 마루에 앉으며 낙리에게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넌 어떻게 지내?”

“잘 지냅니다. 별다른 문제없이요.”

염석은 팔짱을 끼며 혀를 찼다.

“내가 널 오래 본 것은 아니지만, 넌 사람들과 섞이기 어려워 보였거든. 사실 좀 걱정했어.”

“그렇습니까…….”

“그래, 속을 알 수 없게 웃기만 하잖아. 항상 선을 넘지 않으려는 태도도 그렇고…….”

낙리의 얼굴에 약간 당황한 기색이 스치더니 곧 멋쩍은 듯 웃었다.

“윗분들 모실 때에야 그런 점이 나쁘지 않지만, 친하게 지낼 사람들에게는 그러지 마라.”

“그렇군요.”

낙리는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얹은 채 짤막하게 답했다. 염석은 개의치 않고 다른 것을 물었다.

“도련님 모시는 일은 어때? 은근히 까탈스러운 부분이 있을 텐데.”

“무리는 없습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거나 어려운 일 있으면 뭐든 말해.”

“감사합니다.”

낙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도련님께서 평소에 좋아하시는 것이 있나요? 제가 보기에는 나무에 올라가는 것도 좋아하시고 물놀이도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요.”

“오, 잘 알고 있네. 짧은 시간 동안 잘 파악한 것 같은데? 추 장사(長史)님이 알려주었어?”

“그건 아니고요…….”

낙리가 얼버무리듯 말했다.

“하기야 추 장사님은 도련님을 과보호하기는 해도 애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르는 것 같았지.”

염석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맞아, 특히 물에서 노는 걸 무척 좋아하셔. 연못에서 낚시 흉내도 내고 저번처럼 배 타러 나가는 것도 즐기시지.”

낙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가지를 물었다.

“그런데 승상저(丞相邸)에서 하인들이 장남은 그냥 ‘큰 도련님’이라고 부르면서 차남은 ‘작은 주인님’이라고 하던데요. 혹시 큰 도련님이 양자라서 그런 건가요?”

염석의 표정에 어딘지 안쓰러운 기색이 어렸다.

“그렇지. 자식이 없어서 양자를 들인 건데, 뒤늦게 친자들이 태어나서 큰 도련님 처지가 좀 안 됐어. 들은 바로는, 예전에 승상께서 쫓겨 다닐 때 그 곁을 지키며 고생도 많았다던데…….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염온은 벼루와 채색접시*의 먹물을 닦아내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영 승상의 집안이 황실도 아닌데 정식으로 들인 양자라면 분명한 명분이 있지. 게다가 친아들 둘은 모두 서출(庶出)이고.’

잠시 그렇게 생각하다가, 곧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승상이 그렇게 두지 않겠지. 친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사(嗣: 이을 사)로 붙였던 것을 생각하면…….’



염석은 말을 거듭했다.

“내가 도와줄 일 있으면 정말 말해. 도련님을 모시던 경험도 있고, 이래봬도 한동안은 꽤 믿음 받던 사람이었으니까.”

“네…….”

그 순간, 종이를 가지런히 개켜놓던 염온의 손이 멈췄다. 염석의 말투에 스치는 어색함을 감지한 것이다. 낙리도 무언가를 눈치 챈 듯, 말끝을 더욱 조심스레 골랐다.

“그런데.”

염온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석이가 나간 자리는 새로 사람을 뽑았나요?”

“네, 뽑았다고 들었습니다.”

낙리는 눈치를 보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염석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곧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추 장사님이……나에 대해 뭐라 하진 않았고?”

. 말씀하셨습니다.”

약간 머뭇거리며 낙리가 답했다.

“형님께 맞는 다른 자리를 알아보겠다고 하셨습니다.”

“하하……그냥 말 안 해도 됐을 텐데. 괜히 그런 말 듣고 기대하게 되니까.”

염온은 그런 동생을 안쓰럽게 보며 위로하듯 말했다.

“석아, 승상저는 일하기 피곤한 곳이었잖아. 내부 사정도 복잡하고.”

“맞습니다.”

낙리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집안 사정이 은근히 복잡한 것 같아요.”

“그런 건 어른들 문제고.”

염석이 낮게 중얼거렸다.

“우린 뭐, 호위든 놀이 상대든, 어린 아이 비위만 맞춰주면 됐으니까……꽤 괜찮은 자리였는데. 도련님이 철이 없기는 해도, 애니까 그건 이해할 만하고.”

염석은 여전히 아쉬움을 떨치지 못하는 듯 투덜거렸다.

“아, 그런데요.”

염온이 화제를 돌리며 낙리를 바라보았다.

“저 강아지는 언제 데리고 갈 건가요? 빨리 데려가 주었으면 좋겠어요.”

“아……. 열흘 내로 꼭 데려가겠습니다.”

낙리는 당황한 듯 고개를 숙였다.

염온은 그가 개를 어디에 맡기려는 건지 궁금해졌지만, 굳이 묻지 않고 무심한 듯 물음을 바꿨다.

“그런데 다른 가족 분들은 지방에 계시다고 하셨나요?”

“……네. 다들 먼 곳에 있습니다. 수도에 올라온 이후로는 아는 분들의 도움으로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그 사이 아주 짧은 침묵이 있었다.

염온은 그 짧은 침묵 속에서,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를 느꼈다.

낙리는 빙긋 웃었다. 그 미소는 진심인지, 혹은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인지 모호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그 틈을 타 낙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실례 하겠습니다. 조만간 강아지도 꼭 데려가겠습니다.”

그는 두 사람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뒤 대문을 나섰다.

마루 끝에 걸터앉아 있던 햇살은 어느새 뜰을 지나 낮은 담장 너머로 옮겨가 있었다.

닫히는 문 뒤로 대화 소리가 이어졌지만, 그것은 이제 낙리에게서 멀어지는 소리였다.


*


거리로 나선 낙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고요한 표정이었다. 잠시 후, 그는 천천히 다시 걸음을 옮겼다.

땅을 딛는 발소리는 조용했고, 이따금 사람들의 말소리나 수레바퀴의 소리가 먼 배경처럼 그를 스쳤다.

골목을 따라 걷다 보니, 이제 익숙해지기 시작한 높은 담장이 눈에 들어왔다. 승상저의 외문(外門)이었다.

문지기가 그를 알아보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낙리는 감사를 표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한낮의 햇살 속에서도 본채 쪽은 언제나처럼 고요했고 정원에는 바람이 잔잔히 스쳐 지나갔다.



그가 별채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어디선가 소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자 매화나무 아래에 모여 있는 무리가 보였다. 영유와 그를 둘러싼 호위들이었다.

앳된 얼굴이 붉게 상기된 영유는 무언가 고집을 부리며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호위들은 다급하게 그를 말리고 있었다.

“도련님, 위험합니다.”

“가지가 위태로워 보입니다…….”

걱정 어린 말들이 이어졌지만, 영유는 요지부동이었다. 나무는 성인키보다 약간 높은 정도였지만, 그만큼 가지들이 가늘어 십 대 초반 아이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워 보였다.

영유는 호위들의 만류에도 아랑곳 않고 팔을 뻗었다. 손끝이 닿자, 앙상한 가지들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도련님?”

호위의 다급한 부름 속에, 낙리가 그림자처럼 천천히 그들 곁으로 다가섰고 영유는 고개를 돌렸다.

“리야, 너도 이 사람들처럼 안 된다고 할 거야?”

낙리는 조용히 물었다.

“무엇 때문에 나무에 오르시려 하십니까?”

호위 중 한 명이 대신 답했다.

“도련님께서 저 꼭대기의 꽃을 꺾어 오시겠다고 해요.”

낙리는 고개를 들어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피지 못한 매화 봉오리들이 나뭇가지마다 점점이 맺혀 있었다.

“아직 봉오리뿐이라 꺾으셔도 소용이 없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저희가 대신 꺾어 올리겠습니다. 다치시기라도 하면 저희가 윗분들 얼굴을 어찌 뵙겠습니까.”

호위들이 연신 만류했지만 영유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할 거야! 내 일이니까.”

낙리는 조용히 영유를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물었다.

“방에 두시려는 겁니까?”

“아니야.”

영유는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내가 직접 아버님께 가져다 드릴 거야.”

낙리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꽃은 매일 정성껏 골라져 승상의 책상 위에 놓일 터인데.’

하지만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화병에 꽂아두면 곧 아름답게 피어나겠군요. 만개한 꽃 못지않게 피어나는 봉오리는 또 다른 운치가 있지요. 부친을 향한 아드님의 마음에 승상대인께서도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말을 아끼는 성격인 자신이 이렇게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고 있다는 사실이 낙리조차도 낯설었다. 그 때문일까, 등 뒤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호위 중 한 명이 ‘말려야지요!’라고 속삭이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낙리는 살짝 눈을 접어 보이고는 다시 영유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혹시나 나뭇가지가 부러지기라도 하면 귀한 꽃이 상하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도련님께서 몸이라도 상하시면 어쩌겠습니까?”

“다치는 건 괜찮아!”

영유는 굳은 표정으로 잘라 말했다

낙리는 영유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이 애는 혹시 자신이 다치면 제 아버지가 직접 보러 와줄 거라 기대하는 것일까?

“……도련님, 혹시 어디서 떨어져 본 적 있으신가요?”

낙리는 말투를 조금 낮추며 덧붙였다.

“없으시겠지요. 한 번 떨어져 다치면 생각보다 훨씬 아픕니다. 뼈라도 부러지면, 한동안은 움직이기도 어렵고요.”

그제야 영유의 얼굴에 살짝 망설임이 스쳤다. 그래도 여전히 꽃을 꺾고 싶은 눈치였다.

“그래도 꼭 저 꽃을 드리고 싶은걸…….”

낙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사다리를 가져와서 제가 하겠습니다. 도련님의 명을 받아 부하인 제가 하는 거니, 도련님께서 하신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영유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호위들은 숨을 돌리며 안도했다.

잠시 후, 낙리는 사다리를 가져와 조심스레 나무에 올랐다.

가지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 그의 시선이 짧게 멈췄다. 무언가 깨달은 듯 눈빛이 흔들렸지만,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봉오리 맺힌 가지를 조심스럽게 꺾어 내려왔다.

낙리는 꽃가지를 영유에게 건네며 웃었다.

“아버님을 향한 마음이 참으로 지극하시군요.”

영유는 활짝 웃으며 꽃가지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문득 무엇인가 떠오른 듯 물었다.

“그런데, 너는 어디 갔다 오는 길이었어?”

“……염석 씨를 만나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그 말에 곁에 있던 호위의 얼굴에 순간 당황하는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영유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곧 끄떡였다.

“아! 얼마 전에 그만둔 사람! 키가 꽤 컸었지. 그 사람이라면 사다리 없어도 쉽게 꺾었겠네.”

낙리는 입 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랬을 겁니다.”



영유가 꽃가지를 들고 별채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가자 호위들이 뒤따라갔다. 남겨진 호위 한 명이 낙리에게 가볍게 물었다.

“어린애 다루는 솜씨가 제법이네요. 혹시 아이를 키워본 적 있으신가요?”

낙리는 짧게 대답하였다.

“아니요.”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강보에 싸인 아이라면 몰라도, 저 나이 또래 아이는…….’

정원에는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낙리는 매화나무 아래에 잠시 멈춰 서서, 아직 피지 않은 봉오리들을 한 번 더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등을 돌렸다.


*


석양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하자, 낙리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섰다.

자갈길 위를 걷는 발걸음은 바람보다 조용했고, 저택의 두꺼운 벽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들만이 그가 혼자가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연못가에 다다르자 그는 잠시 멈춰 섰다.

서쪽 하늘에서 비스듬히 쏟아지는 마지막 햇살만이 연못 가장자리를 어렴풋이 비추고 있었고, 물 위에는 석양이 깨어져 반짝이고 있었다.

연못 주변에 놓인 회색 돌들은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채, 이미 어둠에 잠겨가고 있었다.

낙리는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기척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 조용히 무릎을 꿇고 몸을 낮췄다.

그는 연못을 따라 배치된 돌들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첫 번째 돌에 손을 얹었다. 석양빛에 의지해 돌의 윤곽을 가늠하며 차가운 표면을 더듬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두 번째, 세 번째……. 점점 어두워지는 연못 둘레를 따라 배치된 돌들을 하나씩 꼼꼼히 살펴나갔다.

돌 하나하나에 비밀이라도 숨겨진 양, 희미한 석양 빛 아래서 낙리는 눈으로 돌의 매끄러운 표면을 유심히 살피고, 손가락으로는 미세한 틈새를 더듬었으며, 혹시나 싶어 살짝 눌러보기도 했다.

열 두어 번째 돌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미 석양빛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지만, 손을 대자마자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발견하는 순간, 낙리는 숨을 멎은 듯이 굳어버렸다.

“……이런.”

작게, 거의 속삭이듯 한숨이 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이건 참, 곤란하게 되었군.”

낙리는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내는 손길은 무심했지만, 표정은 어두워졌다. 마지막 석양빛마저 사라져가는 가운데, 그의 얼굴은 점점 어둠에 잠겨갔다.

“이제 어쩐다…….”

그의 낮은 중얼거림은 차가운 저녁 공기 속으로 허무하게 흩어져갔다.



* 채색접시 : 수묵화를 그릴 때 먹물과 안료의 농담을 조절하거나 혼합할 때 사용 함. 서양화의 팔레트와 같은 역할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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