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미결(狐疑未決)

by 몽중몽
狐疑未決 : 여우가 의심이 많아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어떤 일에 대하여 의심이 많아 결행하지 못함을 비유하는 말.


*


털이 긴 강아지가 작은 새를 쫓아 마당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새는 금방 잡힐 듯 날아다니다가도 어느새 휙 날아올라 사라졌지만, 강아지는 좀처럼 포기할 줄 몰랐다.

“저 강아지, 참 씩씩하네요.”

염석의 아내가 바느질하던 손을 멈추고 미소 지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하루 종일 저러고 있으니.”

염석은 빨래를 개다가 고개를 저었다. 강아지의 들뜬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웃음이 났다.

“주인이 찾아가지 않으면 우리가 그대로 길러도 되지 않을까요?”

아내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염석은 웃으며 만류했다.

“그건 곤란해요. 저 녀석이 밥을 얼마나 많이 먹는데요. 그리고 은근히 말썽이 심하다고요.”

아내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곧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염석은 다시 빨래를 정리하며 문득 강아지의 주인을 떠올렸다.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도련님에게 시달리고 있겠지.’

“당신.”

아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승상저(丞相邸)에서 당신을 다시 부르지 않는다면, 다른 일을 알아보는 건 어때요?”

염석은 잠시 당황했다. 아내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쉽게 대답하기는 어려웠다.

“집에 돈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니……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그가 얼버무리는 사이,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염석은 그 사람이 염온임을 알고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누나, 왜 벌써 왔어?”

하지만 곧, 염온의 뒤로 낙리가 따라 들어오는 걸 보고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염온의 표정은 평소와 달랐다. 그녀는 입술을 꽉 다문 채, 말없이 서신 한 장을 염석에게 내밀었다.


*


한 식경(食頃) 전, 염온은 나루터 인근의 책방 안쪽에서 책을 고르고 있었다. 그녀는 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서가를 따라 서너 권을 뽑아 들고는, 한참이나 신중히 살피는 중이었다.

그때 판자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섰다. 책방 주인은 들어오는 이를 보고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아이고, 이게 얼마 만인가?”

낙리는 고개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

“오랜만에 인사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책을 살 일이 있어 왔습니다.”

“어떤 책을 찾는가?”

주인이 묻는 찰나, 가게 문이 다시 열리며 노부인 한 명이 들어오자 주인은 곧장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낙리가 들어온 순간, 염온은 흘낏 그를 바라보았으나 곧 시선을 거두고 다시 책을 펼쳤다. 낙리는 바로 안쪽으로 들어와 그녀 옆에 섰다. 염온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스쳤다.

“또 뵙게 되네요.”

낙리는 낮은 목소리로 인사하며 그녀가 들고 있던 책들을 흘낏 보았다.

“그 책보다는 이쪽이 더 낫습니다. 오자가 적어 읽기 편하거든요.”

그는 마치 가볍게 책 이야기를 나누듯 자연스레 품에서 서신(書信) 하나를 꺼내 건넸다.

누님을 만나면 물어보려 했습니다. 찾으려는 책 목록인데,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염온은 머뭇거리다가 책을 내려놓고 서신을 받아 펼쳤다. 그리고 대략 훑어본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낙리는 염온에게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염온은 곧 표정을 수습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낙리는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는 어조로 작게 대답했다.

염온은 한동안 서신을 응시하다가 조심스럽게 종이를 접었다. 책방 안은 노부인의 낮은 목소리와 주인의 대답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문 쪽으로 향했다.

“내일 다시 와서 사겠습니다.”

그녀가 나가자, 낙리는 서가에서 아무 책이나 집어 들고 표지를 대충 훑어본 뒤 주인에게 가져갔다.

책값을 받으며 주인은 낙리에게 미안한 어조로 물었다.

“아, 이 부인께서 편지 한 장 써달라고 하시는데. 혹시 해줄 수 있겠나? 자네 대신 들어온 사람은 또 금방 그만두어서.”

낙리는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 시간이 없을 듯합니다.”

“늦어도 괜찮다고 하시는데…….”



주인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눈 낙리는 가볍게 인사하고는 책방을 나섰다. 문밖에는 이미 염온이 기다리고 있었다.

낙리가 나오자 염온은 다시 서신을 펼쳤다. 검은 먹으로 쓰인 글씨는 정갈하고 단정했다. 글 전체는 마치 사건 경과를 보고하듯,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었다.

그러나 어딘가 지나치게 정돈된 느낌이 들었다.

“……이걸 왜 직접 말하지 않고 편지로 정리했어요?”

염온은 낙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낙리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염온의 시선을 받아냈다.

“직접 말하면 오해를 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글로 남기면 전달이 명확하니까요.”

“오해요?”

“말로 하면 감정이 섞일 수 있지 않습니까.”

그의 대답은 나무랄 데 없이 정중했다.

하지만 염온은 묘하게 불편했다.

그녀는 서신을 접으며 물었다.

“……이쪽이 먼저 판단하라는 뜻인가요?”

낙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


서신을 읽은 염석의 눈이 커졌다.

“이게 무슨 말이—”

하지만 아내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알고는 재빨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바꿨다.

“당신은 안으로 들어가요.”

“무슨 일이에요?”

“별일 아니에요. 진짜 아무 일도 아니에요.”

염석은 아내를 다독이며 방으로 들여보냈다.

낙리와 염온은 마루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염석은 두 사람을 곁방으로 데려가 문을 닫았다.

“방금 그 서신에 쓰여 있던 것, 사실이야?”

“사실입니다.”

낙리는 담담하게 답했다.

“정원의 나뭇가지에는 교묘하게 톱질이 되어 있었고, 연못 가장자리 돌 몇 개는 발을 딛는 순간 미끄러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나무는 어린아이가 올라가기 딱 좋은 높이였고, 헐거워진 돌도 아이가 앉기에 알맞은 크기였습니다.”

“정원사의 실수일 수도 있잖아.”

“그것만이 아닙니다. 도련님이 타기로 한 조랑말의 고삐가 풀릴 뻔했고, 식재료엔 이상한 것이 섞여 있었습니다. 하나하나는 별것 아닐지 몰라도, 대상이 어린아이인 만큼 큰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염석이 잠시 멍하니 있는 사이, 염온이 나직이 물었다.

“……추 장사나 다른 사람에게는 말했나요?”

“아직은요. 일단 보이는 것들은 전부 손을 봤습니다. 나뭇가지는 부러뜨렸고, 헐거운 돌은 연못으로 밀어 넣었고, 고삐는…….”

염온이 낙리의 말을 자르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우리뿐이라는 것이군요?”

“네. 지금 이렇게 두 분께 말씀드리는 게 처음입니다.”

“……네가 괜한 의심으로 이런 말을 꺼낸 건 아니라는 건 알아.”

그제야 염석이 침묵을 깨듯 입을 열었다.

“일단 윗사람에게 알리는 게 먼저겠지. 제대로 조사해야 해.”

“그게…….”

낙리는 말끝을 흐렸다.

“이건 내부 사람의 소행인 것 같아서 그럽니다.”

“추 장사님이?!”

“그분은 아니겠지요. 설마. 도련님을 그렇게 생각하시는데.”

낙리의 부정은 이상하게 단정적인 어조였고, 염온은 살짝 위화감을 느꼈다.

“게다가 이상합니다. 너무 노골적으로 꾸며놨어요. 들킬 수도 있다는 계산이 아예 없었던 것 같아요. 좀 더 은밀하게 할 수 있었을 텐데, 마치 들통나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야?”

낙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염온이 잠시 생각하다가 염석에게 물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사고가 났을 때, 막내 도련님이 탔던 배 말이야. 그 배의 뱃사공이 큰 도련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렇게 들었는데……. 설마 큰 도련님 짓이라는 거야? 하지만 그 사고는 추 장사가 철저히 조사했고 어디까지나 우연한 사고였다고…….”

“그 뱃사공, 어떻게 됐는지 알아?”

“글쎄, 나도 모르겠어. 물에서 나오는 건 분명히 봤거든. 그런데 어느 순간 자취를 감췄어. 아마 뒷감당이 어려워서 도망갔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배 사고는 우연이 맞을 겁니다.”

낙리가 단언했다.

“하지만 큰 도련님을 의심하는 이야기가 저택 안에서 돌았습니다. 조사를 허술히 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 소문이 났습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큰 도련님께 무언가 수상한 부분이 있든지, 아니면 그분이 의심을 받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니 그런 것이겠지요.”

“그만!”

염석이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그만하자. 나는 더 듣고 싶지 않아. 너도 이 일에 더는 관심을 가지지 마.”

낙리와 염온이 무언가 반박하려 했지만, 염석은 더욱 강한 어조로 말했다.

“승상가(丞相家)의 일이야! 누구 짓이든 우리 같은 아랫사람들이 깊게 엮여선 안 돼. 혹시 진짜 가족이 범인이라면, 밝혀낸 사람도 무사하긴 어려워.”

그리고 덧붙였다.

“네가 이 이야기를 저택에 하지 않고 우리에게 들고 온 이유, 그거잖아?”

낙리는 그 말에 동의했지만, 차분히 반박했다.

“형님과 저는 이미 엮였습니다. 막내 도련님 사고 때 호위는 형님이었고, 그 일을 계기로 제가 승상저의 식객이 되었습니다.”

염석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아랫사람이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는데…….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염석은 그저 난감해했지만, 염온이 염석에게 물었다.

“‘그분’께 연락할 방법이 없을까?”

“누구……?”


*


낙리가 돌아간 후, 염온은 염석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 녀석이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했으니 기다려보는 수밖에.”

염석이 지친 어조로 답했다.

“아까 네가 말한 대로 하지 않겠냐.”

낙리를 믿는 거야?”

“이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아무튼 우리는 조언도 해주었으니, 가능한 관여되지 않는 것이 제일이야.”

염석은 다시 한탄하였다.

“역시 다른 일을 찾아봐야겠어.”

그 말을 끝으로 염석은 방에서 나갔다. 문이 닫히는 가벼운 소음도 사라지자 홀로 남은 염온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낙리를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염석의 말대로 낙리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고 그는 허튼소리를 할 인물도 아니다.

염석이 승상저의 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낙리는 항상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맡은 일을 묵묵히 한다고 했다.

그리고 염온이 관찰한 바로도, 말수가 적고 언제나 상황을 보며 움직이는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오히려 잘 알고 있어도 함부로 나서지 않는 면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토록 다급히 나서서 말을 꺼낼 정도라면, 무언가 정말 심각한 일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런데도 마음 어딘가에는 여전히 이상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하필 왜 우리에게 말한 걸까?’

낙리는 자신들과 만난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토록 중대하고 위험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만큼 자신들을 신뢰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냥 사람을 제대로 본 것일까. 아니면 이야기를 들어도 괜찮은 상대로 판단할 만한 근거가 있었던 걸까.

낙리의 감정 없는 어조에는 묘한 거리감이 있었다. 알고 있는 것 중 일부만 꺼낸 느낌이었다.

염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건 내 지나친 경계심일지도.’

창밖으로 여전히 햇살이 따스하게 비치고 있었지만, 염온의 마음은 점점 복잡해졌다.

방 안의 공기는, 지나간 계절처럼 싸늘하게 느껴졌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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