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화(妙畵) 2

by 몽중몽

*


염온은 아침부터 자신의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어제의 기분을 떨쳐내려는 듯 붓끝에 집중하고 있을 때, 대문 밖에서 낙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염온이 밖으로 나오자, 털이 긴 강아지를 안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 어서 와.”

염석이 반갑게 맞이하며 밖으로 나왔다.

“아침부터 웬일이야?”

“형님 죄송한데…… 이 녀석을 다시 맡아주실 수 있을까요?”

낙리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괜찮지만, 마누라가 뭐라고 할지 모르겠네.”

그때 강아지가 낙리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낙리가 고쳐 안으려 했으나 강아지는 이미 바닥으로 뛰어내린 후였다.

강아지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잽싸게 염온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어, 어……안 돼!

사람들이 황급히 따라 들어왔으나 이미 늦었다. 방안을 활개 치던 강아지는 먹물이 찰랑이던 벼루를 앞발로 들이쳤다. 검은 먹물이 넘실거리더니 종이 위로 넘쳐흘러내리며 얼굴 윤곽을 집어삼켰다. 막 완성해가던 눈매가 번져 사라졌다.

“아, 이런…….”

“아!

낙리가 당황해서 뛰어들어왔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걸 어떻게…….”

하지만 염온은 그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마음에 안 들던 그림이었든요. 이 녀석 덕분에 정리할 핑계가 생겼네요.”

“하지만…….”

“정말 괜찮습니다.”

염온이 벼루를 제대로 놓으며 말했다.

뒤늦게 달려온 염석이 강아지를 들어 올렸다.

“이 녀석. 이러면 안 맡아 준다!”

염석은 강아지를 데리고 뒤뜰로 향했고 방에는 염온과 낙리만 남았다.

염온은 흩어진 화구들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낙리는 쏟아진 먹물을 닦았다.

“초상화 말입니다.”

낙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냥 마님 심기 거스르지 않게 조심하시고, 마님이 원하시는 대로 그리세요.”

염온은 먹물로 뒤덮인 종이를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어려워요.”

“네?”

“일이니까, 당연히 의뢰하신 분께 만족스러운 그림을 그리고 싶지요.”

염온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갔다.

“제 그림이 인정받을 수 있다면……더 좋겠고요. 하지만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파악하는 게 쉽지 않아요. 내 마음대로 그리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고요.”

낙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네요.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상대의 마음을 읽는 건 또 다른 일이겠지요.”

“맞아요.”

염온이 한숨을 쉬듯 말했다.

“특히 마님은……명확히 말씀을 하시지도 않으니까요.”

낙리는 손에 묻은 먹물을 닦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제가……누님의 일을 가볍게 보는 말을 한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기분 나쁘지 않았어요.”

염온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낙 선생이 걱정해주시는 마음은 잘 알고 있어요.”

두 사람은 조용히 화실을 정리하였다.

잠시 후 낙리가 일어섰다.

“그럼 저는 이만……“

“개는 맡기고 가실 거예요?”

“네, 형님이 허락해 주신다면요.”

마당에서 염석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 녀석 의외로 사나운데? 괜찮을까…….”

하지만 낙리가 대문을 나서자마자 강아지는 금세 얌전해졌다.

“어? 동물 주제에 눈치도 빠르네. 어이없게.”



낙리가 떠난 후, 염온은 다시 홀로 종이를 마주하고 앉았다.

붓을 들고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먹을 찍어 종이 위에 놀렸다.

그리는 것은 우 부인의 얼굴이 아니었다.

젊은 여인의 얼굴, 나이 든 남자의 모습, 아이의 천진한 표정……, 붓끝이 종이 위를 움직일 때마다 누군지 모를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완성되었다.

그렇게 붓을 움직이는 사이, 시간은 어느새 길게 흘러 있었다. 붓이 멈춘 순간에야, 한참이 지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염온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


비단 발이 드리워진 창호 너머로 희미한 햇살이 들어와 실내에 스며들었다.

우 부인은 와탑(臥榻)에 반쯤 몸을 기댄 채 누워 있었다. 그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고, 마른 입술은 겨우 다물어져 있었다.

그 아래 광택이 없는 바닥에서 염온은 무릎을 꿇고 앉아 조심스럽게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얼굴이 너무 말랐구나.”

우 부인이 그림을 가리키며 여전히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눈매도 좀 더 또렷하게 해라. 지금 저건 사람 눈이냐, 넋 나간 귀신같구나.”

염온은 붓을 멈추고 그림을 다시 살펴보았다. 우 부인의 말이 맞았다. 자신도 모르게 현재 부인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염온은 ‘비단이 아니라 종이에 먼저 그리길 잘했다.’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새로운 종이 위에 다시 붓을 들어 올린 염온은 이번에는 더욱 신중하게 선을 그어나갔다. 우 부인이 원하는 건강하고 인자한 모습, 그러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는 얼굴을 그려내기 위해 애썼다.

한참 후, 우 부인은 드디어 염온의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묵묵히 지켜보더니, 이전보다 누그러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완성된 그림은 내 무덤에 함께 들어갈 것이다. 그러니 정성껏 그려라.”

“……예, 마님.”

우 부인은 잠시 염온의 그림을 지켜보다가, 마치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 집안에는……가능한 내 흔적을 남기지 않을 것이야.”

우 부인의 목소리에는 허탈함이 배어 있었다.

“나도 한때는……네가 그리는 그 그림과 같은 얼굴이었다.”

염온은 시선을 내리깐 채 붓에만 집중하였다.

우 부인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때는 참 좋았지. 아이들 웃음소리가 이 집안을 가득 채우던 시절이 있었어. 허나 자식들은 일찍 죽었고…….”

목소리에 처음으로 떨림이 섞였다.

“상공(相公)은 뒤늦게 태어난 서자들을 총애하느라 내 아이들은 잊은 것 같았지.”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나는 절대 부덕(婦德)을 저버리지 않았다.”

우 부인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그런데 상공이 폐주(廢主) 앞에서 실언을 하여 이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나는 도망간 남편을 대신하여 감옥에 갇혔다. 그나마 다행이었나. 죽임 당한 사람들에 비하면.”

붓을 든 손가락이 멈칫했고, 먹물이 바닥에 한 점 튀었다. 염온은 그 자리를 응시하다, 숨을 고르며 다시 붓을 움직였다.

“이제 상공이 공신이 되고 드디어 승상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보답을 받을까 싶었는데…….”

잠시 말을 멈춘 우 부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 병으로 남아 이 몸을 갉아먹고 있구나.”

우 부인은 스산하게 웃었다.

“하지만 상공의 자식이란 것들이 하는 모습을 보자니, 내가 죽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이 집안도 망할 것 같지만……아무렴 어떻겠느냐.”

염온은 끝내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오직 그림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붓끝에서 천천히 완성되어 가는 초상화 속 우 부인의 얼굴은, 현실의 그녀와는 달리 당당하고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느 날의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


염온은 완성된 비단 두루마리를 두 손으로 조심스레 감싸 쥔 채 뒤로 물러섰다.

우 부인은 더는 말이 없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 속이 어떤 감정으로 채워져 있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안채에서 빠져나와 대문에 이를 때까지, 염온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 길은 길고도 어두침침했다.



대문을 나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뒤로한 순간, 비로소 햇살이 발밑에 내려앉았다. 바깥공기가 숨통을 틔워 주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조금 걸음을 옮기다가 담벼락에 등을 기댔다.

손에는 화첩이 들려 있었고, 그 위에 얹힌 손끝엔 아직도 먹과 안료의 향이 서려 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녀는 숨을 한번 깊이 들이쉰 뒤, 잠시 몸을 내려 기대앉았다.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

“……여기 계셨군요.”

낙리였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마주친 그의 목소리에 염온은 당황하여 몸을 일으켰다.

“마님의 의뢰를 무사히 마치셨나요? 정말 다행입니다.”

염온은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완성은 했지만……무사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낙리는 염온이 옆에 내려둔 보자기 위에 문득 시선이 머물렀다

바람결에 살짝 펼쳐진 화첩의 종잇장 사이로 한 장의 그림이 드러났다.

거기에는 강변의 풍경이 있었다.

얼어붙은 물가와 헐벗은 버들, 그 틈에 고요히 서 있는 세 그루의 나무.

거칠게 그어진 소나무와 유연한 대나무, 그리고 고고한 매화나무가 바람을 견디고 있었다.

“그것은…….”

낙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염온은 순간 당황했지만, 화첩을 닫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낙리가 그림을 바라보도록 두었다.

가는 먹선 위로 얇은 담묵이 안개처럼 깔려 있었고, 강물은 잔설처럼 흘렀다.

“겨울 풍경인가요?”

낙리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그림 속으로 흘러들었다.

“눈은 없는데도, 눈 오는 풍경보다 더 겨울 같네요.”

염온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을 뿐,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완성하지 못한 그림입니다. 누가 보라고 그린 건 아니고. 그냥……제가 그리고 싶어서.”

낙리는 그림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찬바람 속에서 꺾이지 않는 나무들.

무심한 듯 선들이 이어졌지만, 그 안에는 강한 의지가 숨겨져 있었다.

“……참, 좋습니다.”

낙리는 한참을 바라보다 이윽고 말을 이었다.

“이 그림은……마음을 담으셨군요. 그래서인지, 보고 있으면 추운 풍경인데도……이상하게, 따뜻합니다.”

염온은 문득 시선을 피했다.

“과찬입니다.”

“아닙니다.”

낙리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소나무는 변하지 않는 기개를, 대나무는 부드러운 강인함을, 매화는 잃을 수 없는 품격을 말하고 있네요. 이 그림은……정말로 잘 담은 그림이에요.”

그 말에 염온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낙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가 하는 말이, 위로나 예의가 아니라는 걸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있던 낙리가 문득 시선을 거두며 낮게 말했다.

“저는……가끔, 가족들 얼굴이 흐려질 때가 있습니다. 저도 손재주가 있었다면……그 얼굴을 그림으로라도 남길 수 있었을 텐데.”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낙리는 그림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마치 결심하듯 입을 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하나 부탁드려도 될까요?”

염온이 낙리를 바라보자 낙리는 그녀를 마주 보며 정중히 말했다.

“동백나무를……그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분명했다.

“그러지요.”

염온은 조용히 답했다.


*


반쯤 열린 창문을 통해 스며든 바람이 종이를 흔들었다. 문진(文鎭)을 다시 놓으며 염온은 창 밖을 바라보았다.

뜰 한쪽에는 만개한 붉은 동백이 고요히 서 있었다.

그녀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종이 위엔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다.

붓을 쥔 손이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붓 끝을 먹물에 적셨다. 붓털이 먹물을 머금고 점점 무거워졌다.

종이 위에 붓이 닿자, 진한 먹빛이 종이의 결을 따라 번져나가며 동백나무의 굵직한 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손목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붓 끝에서 피어나는 선들이 줄기에서 뻗어 나오는 가지들을 그려나갔다. 먹의 농담을 조절하며, 굵은 가지에서 가는 가지로, 다시 더 세밀한 잔가지들로 이어지는 맥락을 따라갔다.

회색 담묵으로 잎사귀를 더하고, 줄기 옆에 바람의 결을 암시하는 여백을 남겨두었다.

줄기를 다 그리고 나서는 붉은빛을 들었다.

곱게 풀어낸 붉은 채묵(彩墨: 안료)이 선명하게 빛났다.

염온은 둥근 붓으로 꽃송이를 그려나갔다.

처음엔 봉긋이 맺힌 꽃봉오리.

다음은 활짝 핀 꽃잎.

가장자리엔, 막 떨어진 꽃 한 송이.

마지막으로는 가는 붓으로 꽃술을 점찍듯이 그려 넣었다.

화폭 속 동백나무가 완성되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뜰의 동백은 그대로 있었고, 그녀의 종이 위에도 또 한 그루의 동백나무가 자라 있었다.


*


—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났다.

계절은 두 번의 겨울과 봄을 지나, 다시 동백이 피는 철을 맞았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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