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춘(暮春)

(수정)

by 몽중몽
暮春 : 늦봄. 주로 음력 3월


*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평상 위에 금빛 얼룩을 드리웠다.

염온은 붓끝에 먹물을 머금게 한 뒤 종이 위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먹빛은 숨을 쉬듯 번지며 짙고 옅은 결을 만들었다. 가늘고 섬세한 붓질이 이어질 때마다, 작은 새의 모습이 완성되어 갔다.

새에게서 붓이 떨어졌을 때, 대문 쪽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염석이 돌아온 모양이다.

염온의 손끝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동백꽃 몇 송이가 더 필요했다.

“누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일은 잘 끝났어?”

염온은 붓을 놓지 않은 채 물었다.

“힘들어서 고생했어.

염석이 평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으며 답했다.

“돈은 얼마 주지도 않으면서……. 승상저에서 잘린 지 오래인데, 추 장사는 아직도 날 그 집 하인 취급하더라니까.”

“무슨 일이었는데?”

“새를 데리고 오는 일. 말로만 듣던 앵무새더라.”

염온의 붓끝이 잠깐 멈췄다.

“그래?”

“응. 날뛰는 걸 다치지 않게 옮기느라 진땀 뺐어.”

그제야 염온이 붓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새가 사람을 다치게 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아주 귀한 새라서, 새가 다치지 않게 하래. 황제폐하께서 하사하신 새라지 뭐야.

“오…….

얼마나 대단한지, 하사 받은 지는 한참 됐는데 이제야 집에 들였대. 그동안 새를 기를 곳을 꾸미고, 전담해서 돌볼 하인까지 구하느라 오늘에서야 모셔온 거지.

염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녀석 먹이를 봤으면 누나도 놀랐을 거야. 이름도 모를 진귀한 과일들이 잔뜩 쌓여 있더라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은 구경도 못 할 귀한 것들이 새 주둥이로 들어가는 걸 보니 정말…….”

목소리가 높아지자 염온이 눈을 가늘게 뜨며 경고했다.

“방에서 아기 재우고 있어. 조용히 해.”

염석이 얼른 목소리를 낮췄다.

“그나저나, 누나는 요즘 계속 새를 그리는 것 같네.”

“병풍 그림 의뢰인데, 화조도(花鳥圖)를 그려달라고 했거든.”

“그러면 오늘 본 그 새도 화려하니 그림감이 되겠네.”

염온이 작은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귀한 새를 내가 볼 수 있을 리 없지.”

염석의 눈이 반짝였다.

“낙리에게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

“그 사람이라고 가능할 것 같지는 않은데…….”

염온의 호흡이 약간 길어졌다.

“그런데, 오늘 낙리를 보았어?”

“응. 승상저에서 만났는데, 여전히 도련님한테 시달리더라. 그 나이 또래가 워낙 말썽이니까, 고생이지.”

염석이 누나의 표정을 슬쩍 훔쳐보았다. 작은 변화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는 잠시 말을 고르다 말을 이었다.

“지난달에 상(喪)도 끝났대.”

염온은 붓대를 만지작거리며 말이 없었다.

“오늘은 도련님이 그 새를 보고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오래 얘기 못 했는데, 낙리가 나한테 부탁할 게 있다고 하더라.”

염석이 평상에 몸을 기대며 눈치를 봤다.

“그래서 말인데……내가 내일 그 친구를 다시 만나서 물어볼게. 혹시 그 새를 보여줄 수 있는지.”

그제야 염온은 고개를 들어 그를 흘끗 보았다.

“그러든지.”

가볍게 흘러나온 대답은 바람에 스치는 잎사귀처럼 무심했다.

그녀는 곧 붓을 다시 잡고, 아직 비어 있는 꽃잎 하나를 먹빛으로 채워 넣었다.

그녀의 시선도 마음도 다시 그림 속으로 스며들었다.

꽃잎 위로 햇빛이 번졌다.


*


하늘빛이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정원 한편에 놓인 커다란 새장 앞에서, 영유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끼아악!!”

새장 안에서 요란한 소음이 터져 나왔다. 커다란 날개가 활짝 펼쳐지자, 신록(新綠)을 닮은 깃털이 빛났다. 부리가 새장을 쪼아대는 쇳소리가 울렸다.

“신기하다, 정말.”

영유가 종종걸음으로 새장 앞으로 다가섰다. 낙리는 한 걸음 뒤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도련님, 조심하십시오.”

새를 돌보던 하인이 급히 달려왔다. 하지만 영유는 이미 손을 새장 안으로 들이밀고 있었다.

“도련님!”

낙리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하인이 얼른 새장을 멀리 밀어냈다.

“쪼입니다!”

“이 정도면 괜찮잖아?”

영유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하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아닙니다, 위험합니다.”

낙리는 새가 부리로 호두 껍데기를 부수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좋아! 너!

앵무새가 사람 목소리로 또렷하게 외쳤다.

“잘했어! 건강해!”

아랫사람을 대하듯 거만한 말투였다.

영유가 입을 벌린 채 새를 쳐다보았다. 낙리도 눈을 크게 떴다. 하인은 허둥대며 손을 저었다.

“소인이 가르친 말이 아닙니다! 곧 제대로 훈련시키겠습니다. 며칠 후에는 인사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고해라!!”

앵무새의 괴성이 정원에 울려 퍼졌다.

낙리와 영유는 말없이 돌아섰다.

뒤편에서, 앵무새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왔다.

“가봐라—!”

낙리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새장 안에서 초록빛 날개가 불안하게 퍼덕이고 있었다.



정원을 벗어나 조용한 길을 걸을 때였다.

“그리고 보니, 상(喪)이 완전히 끝났다며?”

영유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다시 과거 시험에 응시할 거야?”

낙리가 걸음을 늦췄다.

“……예…….”

영유의 시선이 옆으로 스쳤다.

“관직에 나가는 것,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그 목소리에는 진심이 묻어 있었다. 낙리는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럽게 답하였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진짜야. 아버님께 부탁해 볼게.”

영유의 눈이 반짝였다. 낙리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

“도련님의 마음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영유가 아쉬운 듯 발끝으로 땅바닥을 툭 찼다.

“그래도……나중에라도 생각나면 꼭 말해. 알았지?”

소년은 해맑게 웃었다.

낙리는 그 웃음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별채 쪽으로 돌렸다.

“이제 저녁 드실 시간이니, 들어가시죠.”

기와 위로 번져 있던 붉은빛이 서서히 물러가고, 정원은 자줏빛 그림자 속에 잠겨 들었다.


*


다음날 아침, 염석은 승상저를 찾았다. 일거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그는 하인에게 부탁하여 낙리를 불러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대문 안쪽에서 낙리가 걸어 나왔다. 염석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바쁜 데 불러내서 미안해.”

“아니요, 괜찮습니다.”

낙리는 담담히 웃으며 답했다.

“어제 나한테 부탁하려던 게 있다고 했지?”

“그러니까…….”

낙리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활을 조금 배워보고 싶은데……형님께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야 물론이지.”

염석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리고 낙리가 무언가 덧붙이기 전에 말했다.

“당연히 보수 같은 건 필요 없어.”

낙리는 미소 지으며 ‘감사합니다.’라고 답했다.

“요 몇 달 못 만났었군.”

염석이 넌지시 말했다.

이래저래 일이 좀 많았습니다. 작년 겨울에는 대상(大祥)을 치르느라 고향에 다녀오기도 했어요.”

“아, 그렇구나.”

염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시 과거 준비하려나?”

“……그렇게 되겠지요.”

낙리의 목소리에 짧은 여운이 묻어났다.

잠시 정적이 흐르다 염석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누나가 그 앵무새를 꼭 한번 보고 싶어 하는데, 혹시 가능할까?”

염석의 물음에 낙리가 난처한 빛을 띠며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은 곤란할 겁니다. 승상 대인께서 귀한 새를 다른 귀빈들께 보여드릴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함부로 드나들 분위기가 아닐 겁니다.”

낙리는 미안한 기색으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나중에 제가 도련님께 살짝 여쭈어보겠습니다. 어차피 지금은 새가 상당히 예민한 상태라, 누가 가도 제대로 구경하기는 힘들 겁니다.”

“그러면 뭐, 어쩔 수 없지.”

“죄송합니다.

“곤란한 부탁 해서 내가 미안하지.”

염석은 웃으며 말을 돌렸다.

아무튼. 조만간 우리 집에 한번 와.”

“네.”

“참, 우리 아기도 좀 봐줘. 올봄에 태어났거든.”

낙리의 눈이 커졌다.

“정말입니까? 몰랐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괜찮아. 한동안 못 만났으니까.”

염석이 웃었다.

“그러니까 꼭 와야 해. 알았지?”

낙리가 미소 지었다.

“네, 꼭 가겠습니다.”


*


며칠 후, 낙리는 약속대로 염석의 집을 찾았다.

어서 와.

염석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안에서 염온이 걸어 나왔다.

오셨어요.

염온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낙리도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오래간만입니다.

일순 어색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염석이 얼른 말을 이었다.

자, 들어가서 차나 한잔 하자.

방 안에서 낙리는 염석 부부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고 작은 선물을 건넸다. 잠든 아기의 얼굴을 보며 그가 환하게 웃자, 염석의 아내가 수줍게 웃음을 돌려주었다.

차를 한 잔 나눈 후, 염석이 마당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이제 연습을 시작해 볼까?



햇살이 부드럽게 드리우던 평상이 있던 자리에는, 붉고 노란빛이 선명한 표적이 세워져 있었다.

“팔꿈치를 조금 더 올리고.”

염석은 낙리의 자세를 바로 잡아주었다. 뒤쪽에서 팔짱을 낀 염온이 묵묵히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탁—

화살은 표적을 살짝 빗나가 뒤쪽 나무에 박혔다.

“처음치고는 괜찮아. 하지만 너나 누나나 표적이 아닌 나무를 더 좋아한다니까.”

“나는 이제 꽤 나아졌는데?”

염온이 말했다.

“아직 멀었어.”

염석이 고개를 저었다.

“무예가 뛰어난 형님의 기준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여기서 누나 편을 들어주네.”

염석이 투덜거렸지만 그러면서도 낙리의 자세를 다시 고쳐주었다.

“너나 누나나 사람만 안 다치게 쏘면 돼. 그냥 정신수양 삼아 하는 거니까.”

낙리는 화살을 다시 시위에 걸며 중얼거렸다.

“혹시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요…….”

염석의 눈썹이 올라갔다.

“무관이 될 생각이 있어?”

“그것은 아닙니다. 그럴 만한 체력도 아니고요.”

염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넌 문관이 어울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물었다.

“그런데, 혹시……정혼한 사람이 있어?”

그 말과 동시에 낙리의 활시위가 툭 풀리며 화살은 표적을 한참 벗어나 날아갔다. 염온이 팔짱을 풀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없습니다.”

낙리가 답했다.

“아직 서둘 필요는 없겠지요.”

“아, 뭐……귀족도 아니니 그렇게 급할 건 없지.”

염석이 헛기침을 하며 일어났다.

"화살 좀 줍고 올게."

그는 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뜰에는 활줄의 잔향과 먼 바람 소리만이 남았다. 낙리와 염온이 어색하게 함께 서 있었다.

“그럼……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낙리가 고개를 숙였다.

“네.”

염온이 공손하게 답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형님 덕분에 조금이나마 실력이 늘었습니다.”

“처음치고는 잘하셨어요.”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바람이 지나가며 두 사람의 옷깃을 스쳤다. 낙리의 시선이 일순 염온의 손끝에 머물렀다가 이내 거두어졌다.

그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염온은 옷깃을 가볍게 여미며 시선을 돌렸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예. 안녕히 계십시오.”

낙리가 돌아섰다. 염온은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나무 쪽을 힐끗 보았다. 동생이 화살을 빼내는 척하며 이쪽을 슬쩍 보고 있었다.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염온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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