綠衣使者 : ‘푸른 옷을 입은 사자(使者)’라는 뜻으로, 앵무새의 별칭
앵무새가 주인을 죽인 살인범을 증언하였기에. 그 의로움을 높이 사 궁궐에 데려와 기르고 ‘녹의사자’에 봉했다는 당나라 시기 일화에서 유래.
*
햇빛이 마루 끝까지 들어왔다. 늦봄이라지만 한낮의 기운은 벌써 여름을 닮아, 처마 위로 아지랑이가 가늘게 피어올랐다.
복도를 걷던 영유는 뒤따르는 하인이 든 새장을 흘끗 보며 발걸음을 멈췄다. 새장 속 커다란 앵무새는 과일을 먹느라 조용했다.
낙리의 방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영유가 문을 밀고 들어서자, 옷매무시를 하던 낙리가 돌아보았다.
허리에는 띠를 매고 있었고, 방 한쪽에는 이미 검은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어? 나가?”
낙리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예, 그렇습니다.”
영유는 새장을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오늘 얘한테 말을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언제 들어와?”
“밤늦게 돌아올 듯합니다.”
낙리는 부드러운 어조로 답했다.
“엊그제도 나가고 오늘도 나가고…….”
영유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어디 가는 거야?”
“부모님 지인을 뵙고자 교외에 나갈 예정입니다.”
“……그래. 잘 다녀와.”
낙리가 깊이 허리를 굽혔다.
“다녀오겠습니다.”
그의 뒷모습이 햇살 속에 서서히 멀어졌다.
낙리가 나간 후, 영유는 새장을 자신의 방으로 옮기라 명령했다. 그리고 창가에 놓인 새장 앞에 앉았다.
“자, 따라 해 봐. ‘주인님, 안녕하세요’”
영유가 또박또박 발음을 내자, 앵무새는 대신 비명 같은 소리를 냈다.
“크아악!”
“아니야! ‘주인님, 안녕, 하세요’하라고!”
앵무새는 이리저리 고개를 꺾다가 갑자기 외쳤다.
“주인님, 안녕, 아니야!”
영유는 실망한 듯 혀를 찼지만, 곧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한참 동안 새를 붙들고 씨름을 하던 영유는 결국 포기하고 마루로 나왔다. 처마 그늘에선 호위들이 장기를 두고 있었다.
“나도 끼워줘.”
“도련님, 장기는 둘이서 두는 거라…….”
“그럼 투호 하자.”
화살이 항아리에 들어갈 때마다 영유는 “됐다!” 하고 소리쳤고, 하인들도 덩달아 박수를 쳤다.
햇살이 점점 누그러질 때 쯤, 방 안에서 앵무새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영유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산 너머로 기울어져 있었고, 그림자는 어느새 길게 늘어나 있었다.
“벌써 저녁이네.”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
낙리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달빛이 산마루를 넘어 희미하게 번졌다.
*
은은한 달빛이 나뭇가지 그림자를 창문 너머로 드리우며 서재 안까지 스며들었다.
고요한 공간에는 먹 내음과 오래 묵힌 종이의 향이 감돌았다.
서가를 가득 메운 책 사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창호문 너머로 조심스러운 기척이 들려왔다. 노인은 책을 한 장을 넘기며 나직이 말했다.
“들어오게.”
곧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한 젊은이가 들어섰다.
그는 잠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린 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리로 와서 앉게.”
소 태사가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손짓했다.
“괜찮습니다. 서 있겠습니다.”
“앉으라고 하였네.”
재차 권유를 받자 낙리는 마지못해 의자에 앉았다. 등받이에 기대지 못하고 단정히 앉은 모습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 태사는 책장을 넘기며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이번에 병부상서 자리가 비었지.”
낙리는 말없이 들었다.
“승상이 자기 사람을 앉히려는 모양이야. 황상께서 달가워하지 않으시는 기색이 역력한데도 말이지.”
촛불이 살짝 흔들리며 노인의 주름진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요즘 승상이 제 마음대로 하려는 것 같아서 걱정일세. 예전에는 그래도 눈치라는 게 있었는데.”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소 태사가 책에서 고개를 들어 낙리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먼저 날 찾았다니 의외로군. 무슨 일인가?”
낙리가 숨을 고르고 말했다.
“제가 다시 과거를 준비한다고 하니, 도련님이 그러시더군요.”
“무어라 하던가?”
“……자신이 승상에게 말하여 저를 도와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노인의 손이 멈췄다. 책이 천천히 덮였다.
“어린것이 벌써부터 자기 아랫사람을 챙기다니 기특하군.”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자네는 관직에 욕심이 있나?”
낙리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이제 상복도 벗었으니, 자네 나이면 출사(出仕)를 생각할 때가 아닌가.”
낙리는 눈길을 내리깔며 노인의 뜻을 헤아리려 했으나, 더 이상의 말이 없자 조심스레 자신의 생각을 꺼냈다.
“당분간은 승상가에 붙어 있어야 하니 거절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굳이 권유를 받았으니, 위장을 위해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습니다.”
“승상가의 도움을 받으면 안 되네. 승상의 추천으로 관직을 얻으면…….”
서재에 그림자가 일렁였다. 차분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일이 끝난 후 자네는 배신자로 낙인찍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야.”
소 태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낙리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소 태사가 낙리 자신의 미래를 진지하게 조언해주는 것이 뜻밖이었다.
“자네는 이후의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군.”
낙리는 입을 열었으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소 태사가 잠시 생각하더니 화제를 바꿨다.
“그런 의미에서, 사적인 일은 어떠한가? 혼인 말일세.”
낙리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제 나이에 이르도록 혼인을 하지 않고 있으면 이상하게 보일 테니, 일단 준비하는 모습이라도 보이려 합니다.”
“맞는 말일세. 그 나이면 이미 혼인했어야지.”
낙리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염석이……자신의 누나와 저를 엮고 싶어 하는 듯합니다.”
“염석이라……2년 전에 승상저에서 내쳐진 그 사람인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괜찮겠군.”
“신분이 맞지 않아서…….”
“지금은 자네 쪽이 더 높지 않나?”
낙리가 멈칫했다.
“아…….”
소 태사가 웃음을 지었다.
“자네 ‘선친(先親)’은 비록 벼슬은 못했지만 과거에 급제했지. 자네 역시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신분이고.”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의미심장한 말이 덧붙었다.
“몇 년이나 지났는데, 아직 그 자리에 익숙지 않은 듯 하군.”
낙리가 당황하며 말했다.
“……앞으로 더 주의하겠습니다.”
소태사의 눈빛이 깊어졌다.
"자네는 그 여인과 살아갈 마음이 있나?"
낙리는 입술을 다물었다. 소 태사의 시선이 무겁게 느껴졌다.
대답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날’ 이후, 그의 삶은 오직 한 방향만을 향해 있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 끝 너머의 일은 한 번도 그려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릴 수가 없었다.
“그런 것은……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남의 인생을 제 일에 얽히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소 태사는 잠시 낙리를 바라보다가, 한숨과 같은 웃음을 흘렸다.
“목적 이후를 전혀 안 보는 건……위험한 버릇일세.”
낙리의 눈빛이 흔들리며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심코 자신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내 생각에는 괜찮을 걸세. 10여 년 전 정변으로 세상이 한 번 뒤집혔으니, 그 정도 신분 차는 문제 되지 않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반려를 맞이할 마음은 있는 것인가?”
"저는…….”
말이 막혔다.
“멀쩡한 사람의 인생을 망칠까 두렵습니다.”
소 태사의 웃음이 길게 번졌다.
“우리가 실패할 거라 생각하나?”
“그게 아니라……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촛불이 흔들리며,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가 물결치듯 흔들렸다
서재를 나서자, 달빛이 서까래 끝을 타고 흘러내려 후원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흰 동백꽃들이 조용히 피어 있었다.
낙리는 동백나무 아래 멈춰 서서, 새하얀 꽃잎을 응시했다.
잠시 후 그는 몸을 돌려 발걸음을 재촉했다.
*
승상저로 돌아온 낙리는 복도를 지나 자신의 방 앞에 이르렀다.
문을 여는 순간, 벽에 걸린 족자가 눈에 들어왔다. 염온이 그려준 동백 그림이었다.
그림 속 붉은 꽃잎은 창을 타고 들어온 희미한 달빛에도 선명하게 빛났다.
낙리는 잠시 그 앞에 서서 시선을 거두지 않다가, 천천히 눈을 내리 감았다.
밤공기는 아직도 낮의 온기를 품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속은 한겨울처럼 서늘했다.
문득,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 선생!”
영유의 호위 중 한 명이었다.
“아까부터 불렀는데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낙리는 뒤를 돌아보며 그린 듯 한 미소를 지었다.
“아, 미안합니다. 잠시 멍하니 있었나 봅니다.”
“오늘 하루 종일 어디에 가 계셨습니까?”
낙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는 분을 만날 겸 교외로 나가 바람 좀 쏘이고 왔습니다.”
그는 곧 물었다
“도련님께서는 별일 없으셨지요?”
호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하루 종일 노셨지요. 뭐”
그러곤 작게 혀를 차며 목소리를 낮췄다.
“틈만 나면 공부를 빼먹으시니, 저희까지 꾸중을 듣습니다. 선생께서 좀 잘 타일러 주십시오.”
낙리는 미소로 답하고는, 영유의 방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문 앞에서 기척을 알리자, 안쪽에서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책상 위에는 책이 펼쳐져 있었지만, 벼루의 먹물은 이미 굳어 있었다.
“오늘 공부는 손도 안 대셨다고 들었습니다.”
영유는 기지개를 켜며 고개를 저었다.
“내일 할 거야. 오늘은 기분이 안 나더라.”
“억지로 할 땐 글자만 눈앞에 흘러가게 되지요. 내일 제가 곁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낙리가 웃으며 말하자, 영유도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응. 내일은 내 숙제 좀 도와줘.”
낙리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는 화가가 진귀한 새를 보고 싶어 합니다. 그려보고 싶다더군요. 혹시 앵무새를 잠깐 구경하게 해 주어도 괜찮겠습니까?”
영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가 놀라지는 않을까?”
“그럴 리 없습니다. 멀리서 조용히 보기만 한다 합니다.”
“그러면 뭐……내일이라도 와서 보라고 해.”
영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낙리는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물러났다.
회랑을 걸어가며 발소리를 죽이는 그의 어깨 위로, 달빛이 잔물결처럼 스쳐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