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의사자(綠衣使者) 2

by 몽중몽

*


이른 아침, 염온은 승상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높은 담장과 대문을 올려다보았다. 승상부인의 초상화를 완성한 이후 이곳에 오는 것은 꽤 오래간만이었다.

문 앞의 하인이 방문 이유를 묻자, 간단히 답했다.

“별채에 머무시는 낙(駱) 선생을 보러 왔습니다. 염온이라고 합니다.”

얼마 있지 않아 낙리가 나타났다.

“오셨군요.”

“어려운 부탁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요.”

저택을 가로지르는 동안 바람이 잎사귀를 흔드는 소리와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이 공간을 메웠다.

염온은 낙리의 표정을 슬쩍 보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지난번에 석이가 했던 말은……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낙리는 염온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침 햇살 사이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넓은 정원의 한쪽에 커다란 새장이 있었다.

“이쪽입니다. 위험하니 손은 대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횃대 위의 새는 숲을 머금은 듯 초록빛이었다. 날개를 펼치자, 붉고 푸른 빛깔이 번졌다.

염온은 눈을 크게 뜨고 새를 유심히 살피다 감탄했다.

“저렇게 선명한 빛깔의 깃털은 처음 봐요.”

새의 옆에 붙어 있던 하인이 웃으며 말했다.

“남쪽 바다 건너에서 들여온 아주 귀한 새랍니다. 성질이 사나워 늘 긴장해야 하지요. 요즘은 이상하게 잠잠합니다만.”

“정말 아름답네요. 이 빛을 그림에 담을 수 있을지…….”

염온은 마치 그 빛을 잃을까 두려운 듯, 새의 깃털 한 올 한 올을 눈에 새기며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치 낯선 화공의 눈길을 이해라도 했는지, 앵무새는 천천히 깃을 다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참 새를 바라보던 염온이 고개를 돌렸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었어요.”

그녀는 새를 돌보는 하인에게 인사를 하고는 아쉬운 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낙리 역시 묵례(黙禮)한 후 느린 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대문으로 향하던 중, 맞은편에서 발걸음이 다가왔다. 두 사람은 동시에 멈췄다. 영유였다.

낙리가 먼저 고개를 숙였고, 염온도 허리를 굽혔다.

“저 사람은 누구야?”

영유의 시선이 염온에게 머물렀다.

영유의 물음에 낙리는 재빨리 답했다.

“전에 말씀드린 화공입니다.”

염온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염온이라 합니다.”

염온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아, 그래. 수고해.”

영유가 가볍게 손을 흔들고 멀어졌다.

영유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염온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소매를 움켜쥔 손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약간 의아한 표정이 된 낙리에게 말했다.

“도련님은 석이를 아시니까요. 제가 여자라는 걸 알게 되면…….”

말끝을 흐렸다.

“곱지 않은 말을 들을 것 같아서 긴장했습니다.”

그러나 곧 가볍게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말을 이어갔다.

“마님처럼 제가 여자인 것을 아셔서 그림 의뢰를 맡기는 분들도 있지만, 대개는 여자가 남복(男服)을 입고 일하면 이상하게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가능하면 숨겨야 해서……조금 조심스럽긴 하죠.”

낙리는 염온의 말을 되새기는 듯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빛에 그림자가 스쳤다가 이내 평소의 온화한 미소로 돌아왔다.

낙리는 영유가 사라진 쪽으로 시선을 주며, 한숨 섞인 어조로 말했다.

“저 어리신 도련님께서 그리 깐깐하게 여기실까 싶습니다만……. 그럴 수도 있겠군요.”

말끝이 바람에 실려 부드럽게 흩어졌다.


*


염온이 대문을 나섰다.

낙리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숨긴다…….’

자신도, 그녀도.


*


점심 무렵, 염온이 집에 도착하니 부엌은 이미 분주했다.

“누나, 다녀왔어?

칼질을 하던 염석이 반갑게 얼굴을 들었고, 옆에서 국을 젓던 그의 아내도 미소 지었다.

“일을 잘 마쳤나요.”

염온은 소매를 걷어붙이며 부엌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네, 별일 없었어요. 새가 정말 신기하더군요. 햇빛에 깃털이 빛나는데, 보석 같았어요.”

말하는 동안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네가 알려준 덕에 정말 멋진 것을 보았어. 고맙다.”

염석이 슬며시 웃으며 물었다.

“새도 새지만……낙리도 만난 거지?”

염온은 눈을 돌리며 ‘응’ 하고 짧게 대답했다

“감사하다는 말도 했어.”

그 말에 염석이 빙긋 웃었다.

“좋은 사람이지. 그 친구.”

염석의 아내가 수줍게 맞장구쳤다.

“그런 분이라면 아가씨와 잘 어울릴 텐데요…….”

염온은 그릇들을 챙기며 가볍게 웃어넘겼다.

“괜한 말씀을 하시네요.”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웃음은 조금 뻣뻣했다. 순간 부엌 안에 감도는 따뜻한 기운 속에 묘한 정적이 스쳤다.

염석은 더 말하지 않고 칼을 들어 채소를 썰었다. 도마 위에서 둔탁한 소리가 일정한 박자를 이루며 정적을 깨뜨렸다. 그러나 그의 눈길은 염온에게 머물렀다.



세 사람은 점심상에 둘러앉았다. 밥과 국에서 김이 오르며 방안 가득 따스한 냄새가 퍼졌다.

숟가락을 들던 염석이 슬쩍 염온을 보았다.

“누나, 이제 나이도 적지 않잖아. 우리야 괜찮은데……밖에서 보는 눈이 곱지 않아. 괜한 말들이 오가기도 하고.”

옆에서 국을 떠주던 염석의 아내도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러게요, 아가씨. 여자가 혼자 지내시기엔 세상이 편하진 않으니……혹시 생각해 둔 혼처라도 있으신지요?”

염온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표정은 평온했으나 눈길이 살짝 흔들렸다.

“난 괜찮아. 그림도 있고, 먹고살 만큼은 되니까.”

“괜찮다고만 하면 우리가 더 걱정돼. 누나 장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거든.”

그 순간 염온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돌렸다.

“식사 끝나고 하자. 밥상머리에서 할 얘기는 아니지.”

세 사람은 더 말하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마쳤다.



식사 뒤, 차향이 은은히 퍼졌다. 염온은 찻잔을 손에 들었다가 가만히 내려놓고 동생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며칠 전에 낙리에게 혼사 이야기를 꺼내고, 일부러 나랑 마주하게 한 거야?”

짧은 물음에 방 안 공기가 가라앉았다.

염석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에이, 그건 아주 잠깐이었어. 누나도 알잖아, 내가 억지로 밀어붙이는 성격은 아니라는 거.”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곧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 친구가 꽤 괜찮은 조건이야. 신분을 내세우지도 않고, 누나가 그림 그리는 것도, 심지어 남장을 하고 화공 일을 하는 것도 꺼리지 않잖아.”

곁에 있던 염석의 아내도 거들었다.

“게다가 아가씨 그림을 이해하셨다면서요. 그런 안목, 흔치 않아요.”

염온은 찻잔을 들고 입술에만 가져갔다. 향만 맡을 뿐 삼키지 않았다.

복잡한 감정이 가슴을 스쳤다. 낙리가 자신의 그림을 알아봐 준 그 순간, 기쁘면서도 괜히 마음이 노출된 듯 불편했던 기억.

“……낙리의 생각은 물어보고 하는 말이야?”

예상치 못한 반문에 염석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 친구가 괜찮다고 하면, 누나도 생각이 있는 거야?”

“……잘 모르겠어.”

방 안에는 일순 정적이 흘렀고 차만 서서히 식어갔다.

염온은 몸을 일으켰다.

“오늘 본 새를 그려야겠어. 내일이 되면 잊을 것 같으니까.”

염석은 누이의 태도에 벽을 느끼고는 농담처럼 웃으며 말했다.

“역시 누나는 종이 앞에서라야 안심하는구나.”

그러나 염온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와 문을 여닫는 소리만이 작게 울렸고, 염석과 아내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밖으로 나온 염온은 숨을 고르듯 한숨을 삼켰다.



핑계였지만, 지금은 정말로 종이 앞에 앉고 싶었다.

자신의 방에 홀로 앉은 염온은 안료를 갰다.

오늘 본 새가 붓끝에서 되살아났다.

사납다던 말과 달리 새는 의외로 얌전하였다. 고개를 갸웃하며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은 오히려 홀릴 만큼 고왔다.

하지만 그 동그란 눈은 달랐다.

붓끝이 종이를 스칠 때마다 그 눈빛을 떠올렸다.

겉으로는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분명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 그 차분함은 날개를 접고 숨을 고르던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종이 위의 눈동자를 한 번 더 진하게 찍었다. 먹이 번지며 눈빛에 긴장감이 도드라졌다.

낯설게 빛나는 그 눈빛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순해 보이지만 위험하다고 했다.

문득 다른 눈이 겹쳐 떠올랐다.

온화해 보이지만 깊은 곳에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감춘, 낙리의 눈이 그 안에 스며들었다.

알 수 없는 불안과 호기심이 얽혀들며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염온은 잠시 붓을 멈췄다가 다시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림 속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는 듯했다.


*


새장 안의 앵무새는 횃대 위에서 깃털을 다듬으며 눈앞의 사람을 흘낏거렸다.

“순하네…….”

낙리는 중얼거렸다. 며칠 전까지 날뛰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때 앵무새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새장 문 쪽으로 날아갔다. 놀라울 만큼 매끄러운 움직임이었다.

“뭐지?”

앵무새는 잠금쇠를 빤히 보다가, 부리로 고리를 틱, 틱, 건드리기 시작했다.

“설마……”

등줄기를 스치는 서늘함에 눈이 커졌다. 앵무새는 자물쇠 구조를 이해한 듯 차례로 잠금장치를 조작했다.

담당 하인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아이고, 또 저러네!”

가죽장갑을 낀 손이 문을 잡으려는 순간, 앵무새가 번개같이 부리를 내리꽂았다.

“아야!”

두꺼운 장갑 덕에 다치진 않았지만, 새의 힘은 생각보다 거셌다.

새장은 다시 잠기자, 앵무새는 격렬하게 날개를 퍼덕이며 울부짖었다.

“크아아악! 크아아악!”

하인이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요 며칠 가만히 있는다 했더니, 역시…….”

낙리는 여전히 놀란 눈을 거두지 못했다.

새의 눈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자 낙리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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