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촌이란(方寸已亂) 1

by 몽중몽
방촌이란(方寸已亂) : ‘마음가짐이 이미 혼란스러워졌다'는 뜻으로, 마음이 흔들린 상태에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이르는 말

*


낙리가 염 씨 남매의 집을 다시 찾은 것은 염온에게 새를 보여주고 이레 후였다.

뒤뜰에 들어서자, 활이 울리는 긴장된 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퍼졌다.

염온은 시위를 끝까지 당겨 올리고, 숨을 죽였다가 손을 풀었다. 화살은 나뭇가지를 스치며 과녁에 꽂혔다. 그녀의 뺨을 스치는 활시위의 긴장된 그림자가, 낙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왔어?”

뒤돌아보자 염석이 빙그레 웃으며 낙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리를 곧게, 그렇지. 시선은 표적 한가운데에.”

염석은 짧게 지도를 하다가, 갑자기 안방 쪽을 바라보았다.

“이런, 우리 마님이 혼자 힘들겠구나. 아기가 깼을지도 모르니 잠깐 다녀오마. 잠깐만, 두 사람끼리 연습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겨진 낙리는 순간 활을 쥔 손이 어색해졌다. 그러나 염온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활을 다시 들어 올렸다.

활시위가 팽팽히 당겨지고, 찰나의 정적 끝에 화살은 가볍게 표적에 꽂혔다.

“계속하시지요.”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담담히 말했다.

낙리는 짧게 숨을 고르며 활시위를 당겼다. 나뭇결이 손가락에 스치고, 심장이 울리는 소리가 자신에게만 들리는 듯했다. 화살은 표적 근처에 꽂혔으나 중심을 살짝 비껴갔다.

“처음치곤 잘하시네요.”

염온이 미소를 지었다.

“덕분입니다. 더 배워야지요.”

낙리는 그렇게 짧게 답하며, 다시 활을 들어 올렸다.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염온이 물었다.

“……내가 화공 일을 하는 건, 석이에게서 들었나요?”

낙리는 활시위를 놓아 표적을 맞힌 뒤 대답했다.

“아니요. 그림 그리신다는 것은 들었지만, 화공 일까지는 몰랐습니다.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어떻게?”

염온이 시선을 표적에 고정한 채 되물었다.

낙리는 활을 내리고, 입 꼬리를 올렸다.

“누님이 그린 그림을 화상(畵商)이 파는 것을 보았어요. 낙관(落款)은 안 남기셨지만, 바로 알겠더군요.”

염온의 눈썹이 가볍게 치켜 올랐다.

“……그걸 보고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니, 신기하네요.”

낙리는 숨을 고르듯 표적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생계를 위해서든, 그냥 원해서든……사람이 일을 하는 게 어찌 이상하겠습니까.”

두 사람 사이에는 바람만이 스치며 고요가 감돌았다.

그 고요를 깬 건 낙리였다.

“처음 뵈었을 때도……”

낙리가 활을 들며 중얼거렸다.

“활을 쏘고 계셨지요.”

염온의 시선이 옆으로 스쳤다. 남장을 하고 활을 쏘는 모습을 보고도 놀라거나 무어라 싫은 표정을 하지 않았다. 그저 태연하게 인사를 하였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것이야말로 낯설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낙 선생은 참 특이한 분이군요.”

낙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특이하다 하실 것까진 없을 겁니다.”

손이 떨렸다.

화살이 과녁을 벗어났다.

염온은 낙리의 활 끝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뭔가 묻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저도 석이에게 배운 것입니다만, 마음이 흔들리면 화살도 어긋나기 마련입니다”

염온이 말했다.

낙리는 웃으려 했지만 웃음이 어색했다.

“제가 아직 미숙해서 그렇습니다.”

염온은 굳이 더 묻지 않고 활을 고쳐 잡았다. 화살이 시위를 떠나 깨끗한 선으로 과녁을 꿰뚫었다.

낙리의 화살은 또다시 과녁을 비껴나갔다. 그의 손끝엔 미세한 긴장이 아직 남아 있었다.

염온은 부드러운 웃음을 띠며 고개를 기울였다.

“괜찮아요. 누구나 처음엔 활이 손에 안 붙는 법이지요. 자꾸 쏘다 보면 손도 마음도 익숙해집니다.”

“그렇군요.”

짧은 대답이었지만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염온은 낙리를 더 보지 않았다. 대신 다시 활을 들어 표적을 겨냥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는 생각에 잠긴 듯한 기색이 스쳤다.

이 사람은 숨기고 있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분명 가벼운 일은 아닐 터.

화살이 날아가 과녁에 박히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염석이 천천히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염온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활시위를 놓고 곧장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들의 긴장된 공기조차 느끼지 못한 듯, 밝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둘이 함께 연습은 잘했어?”

염온은 대답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낙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살짝 숙이며 짧게 대답 했다.

네, 나름대로.”

염석은 태연한 얼굴로 낙리와 염온을 번갈아 살피며 웃었다.

“좋아. 이제 내가 좀 봐줄 테니, 제대로 연습하자. 생각보다 잘하는 것 같긴 한데, 내가 봐줘야 더 빨리 능숙해질 거야.”

낙리는 시선을 과녁에 고정한 채 주춤하다가 활시위를 놓으며 손목을 풀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염석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도 좀 더 연습해 보는 게 좋을 텐데.”

염온이 활을 정리하며 말했다.

“나도 먼저 들어갈게. 안녕히 가세요. 낙 선생.”

낙리는 염온이 돌아서는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염석에게 낮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뒤뜰을 떠났다.

염석은 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조용히 활을 정리했다.


*


느린 발걸음으로 승상저로 돌아온 낙리는 옷만 갈아 입고는 곧바로 영유의 방으로 향했다.

“리야!”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반갑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책상에서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던 영유가 고개를 들었다. 책상 위에는 펼쳐진 경전(經典)과 지필묵(紙筆墨)이 널려 있었다.

“마침 잘 왔네. 숙제 좀 도와줘. 필사(筆寫) 하는 거, 너무 귀찮아.”

영유의 밝은 얼굴을 본 낙리는 멈칫했으나, 이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도련님?”

영유는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활짝 웃었다.

“반만 네가 대신 써줘. 나는 시간 없어.”

“그러면 선생님께 혼나지 않겠습니까?”

“그 선생님은 모르실 거야. 네가 잘 흉내 내서 쓰면 돼.”

낙리는 조용히 영유의 맞은편에 앉았다.

“알겠습니다. 도련님.”

낙리는 웃으며 붓을 들었으나, 웃음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영유는 낙리의 앞에서 종알거렸다.

“큰 형님이 다음 달에 남쪽으로 간대.”

낙리의 손이 멈췄다. 붓끝에서 먹이 번졌다.

“……그렇습니까.”

영유는 낙리의 목소리가 순간 낮아진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싫은 기색이더라. 안 내려간다고 했다가 아버님에게 꾸중을 들었나 봐. 형님도 아버님도 그 일로 기분이 안 좋으셔. 혹시라도 두 분 뵈면 조심해.”

낙리는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그렇군요. 그러면 큰 도련님 가족들도 다 같이 내려가시는 것인가요?”

“응. 그런 것 같아.”

‘오래 머무를 모양이군.’

영유는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러다 문득 “난 다 끝났어!”하고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신나는 걸음으로 창가의 새장 쪽으로 갔다.

“오늘도 얘한테 말을 가르쳐 주어야 하거든! 자, 따라 해. ‘안녕, 하세요’”

“……수고해라.”

“어휴, 멍청이.”

멍청이.”

“그거 말고!”

영유가 살짝 언성을 높였다.

그 소음을 배경으로 낙리는 여전히 조용히 붓을 움직이며 경전을 베껴 썼다. 창밖으로는 오후의 햇살이 스며들어 오고 있었다.


*


낙리는 그날 밤 소 태사에게 전갈을 보냈다.


*


영유의 우려와 달리, 승상저는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한 달이 지나는 동안 낙리는 염석에게 활쏘기를 배우고자 몇 번이나 더 그의 집을 찾았다.

그리고 가끔 염온과 마주쳤다.

낙리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기 어려웠고, 동시에 눈을 마주치기도 두려웠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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