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늦은 저녁 무렵, 작은 방 안에는 촛불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낙리는 서안(書案) 앞에 앉아 조심스럽게 붓을 움직이고 있었다.
“낙 선생님.”
문 밖에서 들려온 하인의 목소리에 손이 멈췄다. 붓끝에서 먹물이 한 방울 떨어져 종이에 작은 얼룩을 만들었다.
붓을 내려놓은 그는 짧게 숨을 고르곤, 태연한 기색으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추 장사님께서 부르고 계십니다.”
“알겠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재빨리 서신을 접어 품속 깊숙이 밀어 넣고는 옷깃을 가다듬은 후 방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서자, 정원에 부는 바람은 완연히 더운 기운을 품고 있었다.
문서를 정리하던 추홍은 낙리가 들어서자 고개를 들었다.
긴 책상 위에 서책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고, 어지럽게 놓인 서류와 장부를 기름등잔의 불빛이 비추고 있었다.
“왔나.”
낙리는 방 안으로 들어서며 한순간 눈길을 책상 위의 서류에 흘려보냈다. 그러나 곧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앉게.”
추홍이 문서들을 한쪽으로 밀어내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도련님 말일세.”
낙리가 단정한 자세로 맞은편 의자에 앉자 추홍은 용건을 꺼냈다.
“요즘 도련님께서 공부는 열심히 하고 계신가?”
“그런 편입니다.”
“그런 편이라니. 제대로 말해보게.”
추홍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낙리를 바라보았다.
“아주 열심은……아니시지만, 게으르지는 않으십니다. 나날이 나아지고 계십니다.”
낙리의 대답은 조심스러웠다. 추홍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흠. 요즘 너무 놀기만 하시는 것 같은데, 도련님은 아직은 어리시니 자네가 잘 보필해야 하네.”
“그리하겠습니다.”
“명심하게. 도련님의 장래가 자네 장래에도 영향을 줄 거야.”
“예.”
낙리는 고개를 숙인 채 성실한 태도로 답했다.
“그리고 말이네…….”
추홍은 곧바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얼마 전에 염석과 이야기를 했는데, 자네에 대해 관심을 보이더군.”
낙리의 눈썹이 움직였다.
“자네가 혼인은 했는지, 정혼자는 없는지 물어보던데.”
“그렇습니까.”
낙리의 대답은 건조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누이와 자네를 이어주고 싶어 하는 것 같네만. 그 녀석이 자네에게도 의사를 타진했었나?”
“들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가. 그 녀석은 자네 장래가 괜찮아 보이니까 미리 연을 맺으려는 모양이지. 마음은 알겠다만…….”
추홍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솔직히 그리 좋은 인연은 아니야. 그 집안은 그럭저럭 살기는 해도 그냥 평민이지 않나. 자네야 비록 형편은 어렵다 해도, 사대부 집안의 자제인데.”
낙리는 대답 없이 듣고 있었다. 그러나 추홍의 말이 이어질수록 그의 눈이 서서히 내리깔렸다. 차가운 눈빛은 숙인 고개 아래로 사라졌다.
“뭐, 자네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 생각해 보게.”
말을 마친 추홍은 다시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낙리가 일어서며 고개를 숙였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별채로 돌아오는 길, 풀잎 위로 습기가 축축하게 올라와 발걸음을 묵직하게 만들었다.
낙리는 방문을 닫아걸고 나서야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먹물이 번져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서신을 찢어서 촛불에 가까이 가져갔다.
작은 불꽃이 천천히 종이를 삼켰다.
재가 된 종이를 잠시 바라보던 낙리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저 멀리 담장 너머로 별들이 하나둘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허공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었다.
*
새로 쓴 서신을 부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새벽녘부터 낙리의 손에 봉투 하나가 전해졌다.
서신을 읽던 낙리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서신을 접어 품속 깊이 갈무리했다.
한 시진 뒤, 낙리는 성안의 한 찻집 앞에 서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지만, 그는 주변을 조심스럽게 둘러보며 찻집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점원이 반갑게 맞았다. 낙리는 품속에서 봉투를 꺼내어 내밀었다.
“이분을 만나러 왔습니다.”
겉봉의 이름을 확인한 점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쪽 방에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낙리는 점원을 따라가면서도 찻집의 손님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점원이 문을 열어주자 안에서는 한 중년 남성이 차를 앞에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와 문을 닫은 낙리가 말없이 인사를 올리자 낙빈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오, 어서 오게.”
낙리는 맞은편에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이렇게……사람 눈에 곳에서 만나자니 걱정이 됩니다.”
그의 말에는 조심스러운 불만이 담겨 있었다.
“서신도 그냥 하인을 통해 전달받아서 놀랐습니다.”
“하하, 괜찮다.”
낙빈이 웃으며 찻주전자를 들어 낙리의 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네가 서신을 검사받거나 미행을 당하지 않을 정도의 신뢰는 얻고 있지 않느냐? 그 정도 의심을 받았다면 이미 살아 있지 않았겠지.”
농담처럼 들렸지만, 낙리는 그 눈빛이 웃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만나자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신지…….”
낙리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승상가에 대한 것은, 서신으로 전해드린 것 이상으로는 저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영 중랑장이 아직 버티고 있는 중일 거야. 계속 그러면 좋으련만…….”
낙빈이 계속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그런 것 보다. 내가 이번에 승진이 좌절되어서 누군가에게 불평이나 하려고 부른 것이다.”
“예?”
“원래라면 병부(兵部)로 갈 수 있었는데, 승상이 막는 바람에 무산되었지. 하지만 병부상서를 승상의 사람으로 앉히는 것은 막아냈어.”
낙빈의 목소리는 여전히 가벼웠지만, ‘승상’을 언급할 때 순간 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낙빈이 다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지금 자리를 지키게 되었지.”
굳이 반응하지 않는 것이 정답이었다고 생각하며 낙리는 안도하였다. 낙빈의 진짜 속내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내 부하 하나가 승진해서 나와 같은 품계가 되었단 말이야. 어찌나 의기양양한지, 참 얄미워.”
차를 마시며 한참 이런저런 잡담을 이어가던 낙빈이 문득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사실, 오늘은 큰 이야기를 하려던 것도 아니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낙리의 얼굴을 살폈다.
“스승님 말씀이, 네가 고민이 많은 것 같다고 하시더구나. ‘친척’인 내가 한 번쯤은 속내를 들어보고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지.”
낙리는 찻잔을 든 채로 굳어졌다.
낙빈은 걱정된다는 듯 낙리의 표정을 찬찬히 훑다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혹시 혼사 때문이냐? 요즘 너에게 말이 오간다 들었는데.”
낙리는 무심코 시선을 피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
“저는……가족을 만들 자신이 없습니다.”
내용과 달리 그 목소리는 단호했다.
낙빈이 낙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
“너도 참……. 그런 말을 하면 어쩌나. 네 부모님 제사는 어쩌려고.”
낙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제 앞날조차 불확실합니다. 그런 제가 남을 끌어들여 함께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낙빈은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혀를 찼다.
“그럼 네 미래를 행복하게 만들면 그만 아닌가. 그런데 말하는 것을 보니……그 여인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군.”
낙리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 사람이든 누구든, 저는 타인을 제 삶 속으로 함부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말을 이어가는 낙리의 표정이 굳어졌다.
“게다가 저는……가족에게조차 거짓을 씌운 채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그 말에 낙빈의 표정이 서서히 변했다. 가볍던 웃음이 가라앉으며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 말은.”
낙빈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네 가족이 될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는 뜻이냐? 만일 그 사람이 너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네 비밀을 지켜 주지 못한다면?”
낙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적을 깨며 낙빈이 더욱 차갑게 물었다.
“그 사람 때문에 모든 게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런데도 말할 건가?”
“……모르겠습니다.”
“그럼 입막음을 할 거냐?”
그 말에 낙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거부감이 번뜩였다.
낙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가족을 만들 수 없습니다.”
“……순진하구나.”
낙빈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나도 내 가족에게 모든 걸 말하지는 못한다. 피붙이조차 그렇다. 하물며 그 여인은 아직 가족이 될지조차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고민까지 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생각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낙리는 눈을 감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의 망설임을 읽은 듯, 낙빈이 목소리를 낮추어 덧붙였다.
“스승님께 의논드리자. 지금 네 마음만으로는 답을 내릴 수 없다.”
낙빈이 일어섰다.
“그 전까지는 혼자 결정하지 마라.”
무더운 공기가 은은한 차향을 밀어내듯 스며들어, 방 안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