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隱事) 1

by 몽중몽
隱事 : 숨겨 두고 남에게 드러내지 아니하는 일. 혹은 그렇게 해야 할 일


*


그림 향내가 묻어나는 공간. 염온은 화상(畵商) 앞에 앉아 있었다.

벽장에는 종이와 안료가 켜켜이 쌓여 있고, 벽에는 완성된 화첩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지난번에 그린 병풍화를 보시고는 손님께서 무척이나 칭찬하시더군.”

화상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흐뭇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특히 그 앵무새 그림은 아주 생생한 것이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다고 하셨네.”

염온은 눈매가 환해지며 웃었다.

“다 어르신께서 잘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지요. 저야 아직 부족한 것이 많은데…….”

“겸손하기는. 실력은 숨길 수가 없는 법이지.”

화상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새 의뢰가 하나 더 들어왔다네. 자네를 지목해서 찾는 분이 있어. 친분 있는 분께 소개를 들었다고 하네. 큰 작업을 마쳐 피곤하겠지만, 괜찮겠는가?”

염온은 잠시 놀란 듯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 기분 좋은 긴장감이 떠올랐다.


*


그날 저녁, 염온은 다른 세 명과 함께 저녁상에 둘러 앉아 있었다.

기름등잔이 은은히 빛을 흩뿌리며, 음식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방 안을 따스하게 채웠다.

활쏘기 연습을 끝낸 후 염석에게 붙들린 낙리까지 포함하여 식사까지 함께 하게 된 상황이었다.

염석은 낙리와 염온의 반응을 번갈아 살피며 분위기를 보고 있었지만, 둘 다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각자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염온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을 꺼냈다.

“오늘 의뢰가 하나 더 들어왔어. 내일 바로 다녀오려고.”

“또? 전의 그 그림들 마친지 얼마 안 되었는데, 힘들지 않아?”

“내 그림을 보고 꼭 나에게 부탁하고 싶다고 하셨대.”

그녀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들뜸이 묻어났다.

“마당의 오래된 나무를 그려 달라는 주문이야. 수도 북쪽에 있는 댁이라 아침 일찍 나섰다 와야 할 것 같아.”

“누나, 너무 멀리까지는 다니지 마.”

염석이 낙리를 힐끗 보며 말했다.

염온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새삼 무슨 소리. 화상 어르신은 믿을 만한 분만 소개해 주시잖아.”

“어느 댁이야?”

염석이 다시 묻자, 염온은 담담히 답했다.

“전(前) 어사대부 댁이래. 지금은 부인께서 혼자 사신다고 들었지.”

낙리의 숟가락이 공중에서 멈췄다.

“어사대부라면, 혹시……태사(太師)이신 소(蘇) 공(公)의 사위 분이신가요……?”

염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하더군요.”

낙리는 얼굴빛이 바래졌으나 곧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숟가락을 다시 움직였으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째서 염온을?’

낙리는 더 이상 식사를 할 수 없었다.


*


다음날 아침, 염온은 화구를 정리하여 등에 지고 수도 북쪽으로 향했다.

저택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대문을 들어서니 잘 가꾸어진 정원이 눈에 들어왔고, 그 한가운데 우뚝 선 오동나무가 아침 햇살을 받아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왔는가.”

중년 부인이 나와 맞이했다. 기품 있는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저 오동나무를 그려주면 되네. 오늘 중으로 가능한가?”

“예, 가능합니다.”

염온은 공손히 답했다.

부인이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편하게 있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염온은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펴고 화구를 꺼내기 시작했다. 붓을 정리하고 먹을 갈며 그림을 시작할 준비를 하는데, 사랑채 쪽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부인의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염온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인사를 올렸다.

허리를 굽힌 순간, 자신에게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시선을 느꼈다.

염온은 살짝 미간을 좁혔으나 별다른 생각 없이 다시 그림 준비에 집중했다.

그녀는 흰 종이를 펼치고 붓을 들어 올려 짙어진 나뭇잎 그림자를 종이에 옮기기 시작했다.

여름 햇살이 깊이 내려앉아, 오동나무의 커다란 잎맥마다 은빛이 번졌다.


*


같은 시각, 낙리는 저택 앞 길가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어젯밤부터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공연한 걱정을 하는 게 아닌가…….”

스스로 중얼거리며, 다시 발길을 돌릴까 망설였다.

그냥 평범한 그림 의뢰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괜히 나서서 수상한 눈길을 끄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어린 소녀가 다가왔다.

무명옷 차림의 소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공손히 말했다.

“낙 선생이시지요?”

낙리는 움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맞습니다만.”

소녀는 작은 미소를 띠며 손짓했다.

“저희 어르신께서, 선생이 오늘 이곳에 오실 거라 하시며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소녀는 낙리를 이끌고 저택 뒤편으로 향했다. 뒷문을 지나 조용한 길을 걷다가 사랑채 앞에 이르렀다.

안내를 받아 들어서던 낙리는, 안쪽에 앉아 있는 소 태사를 보고 굳어버렸다.

낙리가 황급히 인사를 올리자 노인은 손을 저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허허, 그렇게 불안한 표정을 하니, 내가 무슨 나쁜 사람 같지 않은가?”

낙리는 더욱 깊이 몸을 숙였다.

“들어와 앉게.”

“예.”

은은한 향이 감도는 사랑채 안은 고즈넉했다. 소 태사가 차를 권하며 말을 이었다.

“나나 내 딸이나 죄 없는 사람을 괴롭히는 일은 하지 않네. 그저 딸아이가 그 사람의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하기도 하고…….”

소 태사가 낙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네와 혼담이 있다는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네.”

낙리의 손끝이 떨렸다.

“의논하러 찾아오겠다고 들었는데, 열흘이 넘게 연락이 없으니 걱정했네.”

낙리는 찻잔을 받아들어 마른 입속을 적셨다. 향긋한 내음이 입안에 맴돌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어르신께서 신경 쓰실 만한 일은 아닐 것 같아서……감히 찾아뵙지 못하였습니다.”

“내 자네를 꽤 어릴 때부터 알아오지 않았나.”

소 태사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자네도 내 제자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네.”

순간 낙리의 눈가가 살짝 떨렸으나 곧 표정을 수습하고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이를 알아차린 소 태사는 눈주름이 깊어졌으나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자네가 불편해하면 나도 불편하네. 그러니 신경을 쓸 수밖에.”

낙리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허직(虛職)으로 밀려난 지 오래라, 이 늙은이에게는 사람이 많지 않아.”

“제가 전할 수 있는 것은, 어린애의 일상에 대한 것이 아니면 건너서 들은 것뿐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네.”

소 태사의 답은 담담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창밖을 바라보던 소 태사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나는 혼사 문제로 고민한 적이 없어서 별 도움은 안 될 것 같구나.”

소 태사의 시선이 다시 낙리에게 돌아왔다.

“나는 어렸을 때 집안에서 정해준 대로 결혼했고, 그것에 만족했지. 제자나 아랫사람들의 중매를 선 적은 몇 번 있지만, 자네처럼 고민하는 경우는 못 보았네. 왜 그리 망설이는가?”

낙리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시라는 말씀이신지요?”

소 태사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네 마음이지. 그렇지만…….”

그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너무 오래 망설이면, 좋은 사람을 놓칠 수도 있는 법이네.”

“…….”

소 태사는 찻잔 속을 바라보며 느린 어조로 물었다.

“자네는 그 여인에게 마음이 있는가?”

낙리는 찻잔을 움켜쥔 채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겨우 입을 열었다.

“……모르겠습니다.”

“모른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소 태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이미 마음이 움직였다는 뜻일 거네.”

그는 말을 멈추더니 낮게 덧붙였다.

“그런데 자네는 그 여인이 자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본 적 있나?”

낙리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소 태사의 눈빛이 꿰뚫듯 다가왔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겨우 답했다.

“아직……아닙니다.”

그 말을 하고 나서야, 스스로도 놀랐다.

‘정말 나는 모른다. 내 마음도. 그녀의 마음도…….’

“허허, 그럼 그것부터 확인해야지. 상대가 자네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면, 비밀을 드러낼 필요도 없지 않은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낙리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염온이라고 했던가? 그 사람은 가족들 뜻대로 순순히 움직일 사람이 아닐 것 같군. 자네가 제일 먼저 할 일은 상대편의 마음을 확인해보는 것이네. 아울러 스스로의 마음도 다시 확인하고.”

소 태사는 찻잔을 다시 들며 계속하여 말했다

“상대 마음이 확인되면, 자네 신분에 관한 것부터 조금씩 알려보게. 처음부터 다 쏟아낼 필요는 없어. 만약 거부한다면 그것으로 끝이고.”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

“다만, 그 처자는 남장을 하고 일을 다닐 정도로 특이한 성정이니, 신분 따위는 개의치 않을 걸세. 비밀도 지킬 수 있을 테고.”



낙리는 몸을 일으켰다.

“귀한 조언……감사드립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예를 올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났다.

문이 닫혔다.

소 태사는 천천히 찻잔을 비우고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


그 무렵.

정원의 그늘 아래서 염온은 마지막 붓질을 마치고 붓을 내려놓았다.

아직 마르지 못한 먹선 위로 햇빛이 번져 윤이 났다.

“다 그렸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소 부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예, 방금 끝났습니다.”

소 부인은 그림을 살펴보며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잘 그리는구나. 젊은 사람이라 크게 기대를 안 했는데.”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정성껏 그렸습니다.”

염온이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도 부탁하게 될 듯하네. 승상 부인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지? 만족해하시더군.”

염온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고 소 부인은 그 표정을 보고 살며시 웃었다

“우 부인과 나는 사이가 나쁘지 않다네. 또, 우리 아버지와 승상 대인도 소문과 달리 사사로이는 그리 앙금이 깊지 않아.”

“저는 그저…….”

염온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전 초상화를 그렸을 때는 그분께서 탐탁지 않게 여기시는 듯했거든요.”

소 부인은 손끝을 부채에 가져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은 원래 엄격한 성정이지. 병을 얻은 이후로는 더욱 까다로워지셨고. 요즘은 병세가 깊어 자리에서조차 일어나지 못한다 들었네. 안타까운 일이지.”

“병세가……좋지 않으시다고요?”

염온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하인이 냉차를 가져왔다. 염온은 일어나 그늘 밖으로 나왔다.

찻잔을 받아든 순간,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마당은 고요했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만이 들려왔다.


*


낙리는 기둥 뒤에서 정원을 바라보았다.

염온이 그림 옆에 서 있었다.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발걸음을 재촉해 저택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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