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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온이 오동나무 그림을 그린 지 며칠 후, 낙리는 다시 염씨 남매의 집을 찾아왔다.
아침부터 빗방울이 낮은 처마를 두드리며 뚝뚝 흘러내리는 날이었다.
비에 젖은 어깨를 털며 인사하는 낙리의 얼굴에는 평소와 다른 심각함이 서려 있었다.
“활쏘기 훈련 하는 날이 아닌데, 웬일이야?”
낙리를 방안으로 데리고 온 염석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낙리는 잠깐 염석을 바라보더니 다시 염온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누님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따로?”
“네. 혹시 누님과 단둘이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뜻밖의 말에 염온과 염석이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곁에 있던 염석의 아내가 부드럽게 웃으며 나섰다.
“그럼 자리를 마련해드려야죠. 우리 둘은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염석이 염온을 곁눈질 하자, 염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잠시 비켜줘.”
두 사람이 마루로 나가자, 낙리와 염온은 마주 앉았다. 방문은 닫히지 않았으나, 빗소리에 묻혀 대화가 밖으로 새어나가지는 않았다.
염온이 낙리를 빤히 바라보자 낙리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 형님이 추 장사님을 통해……누님과 제 혼사 이야기를 타진했다고 합니다.”
염온의 눈가가 살짝 경직됐다. 당황스러움과 어이없음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밖의 염석을 흘겨보았다.
“정말……. 석이가 마음대로 한 일이에요. 낙 선생을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 마세요.”
그 말에 낙리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염온의 눈을 똑바로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누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네?”
“누님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염온은 잠시 침묵했다. 창밖의 빗소리가 더욱 거세어졌다.
“처음 만났을 때는……”
염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낙리의 한숨이 비 내리는 소리와 함께 흩어졌다. 염온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여전히 알기 어려운 사람이지만, 성실하고 좋은 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말이 끝나자 낙리의 얼굴에 묘한 안도의 빛이 스쳤다
“다행입니다. 사실 저도……처음엔 저도 누님이 어려웠어요.”
“아…….”
“하지만, 지금은 누님이 좋은 분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럽기도 하고요.”
염온이 고개를 갸웃하자, 낙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계속했다.
“사내들 못지않게 당당하게 사시고, 그림 속에서도 그런 기운이 드러나요.”
염온은 뜻밖의 말에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낙리의 얼굴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형님이 혼사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마냥 거부할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물론 아직은……그저 좋은 분이라고 생각하는 정도입니다만.”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한참 정적을 메웠다. 이윽고 염온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낙 선생은 이 혼사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가요?”
“아직 누님의 마음도 분명히 정해지지 않았는데, 제가 섣불리 말씀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다만, 저 역시 이제 나이가 나이인지라,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
그의 시선이 염온을 향해 살짝 기울었다.
“누님께서도……그렇지 않으신가요?”
염온은 그 말에 눈길을 허공으로 돌렸다. 그녀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듯 잠시 조용하다가, 서서히 말을 이었다.
“사실 저는 결혼을 그리 바란 적이 없습니다.”
낙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저는 세간의 시선쯤 무시할 수 있지만, 저 때문에 다른 가족들까지 곤란해질 수 있으니까요.”
염온의 눈빛이 흔들렸다.
“다만, 결혼하게 되면 제가 더 이상 자유롭게 살 수 없는 것이 걱정이에요. 일은 둘째 치고, 무엇보다 그림 자체를 그리지 못하게 될까봐……. 그림 그리는 손이 묶이는 것만은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요.”
낙리는 그 말에 미소를 띠더니, 농담처럼 물었다.
“그렇다면, 누님이 그림 그리는 걸 흔쾌히 이해하고, 화공일까지 괜찮다 여기는 사람이라면, 조건이 조금 나빠도 받아주실 건가요?”
염온은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맞받았다.
“낙 선생은……어떠세요?”
낙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잠시 표정이 굳었다가, 한탄하듯 고개를 저었다.
“저는……아직 제 일도 정리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뭐, 지금도 잘하고 계신데요…….”
염온은 미소를 짓다가 낙리의 눈빛에 스친 미묘한 긴장과 입가의 경직을 보았다.
그녀는 눈썹을 살짝 올렸다.
더 묻고 싶었지만, 빗소리가 다시 커지자 말끝을 삼켰다.
“그럼……조금 더 생각해보는 게 좋겠네요.”
“그렇게 하죠.”
침묵이 흘렀다.
잠시 눈이 마주쳤다가 피했다.
빗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
*
낙리가 방에서 나서자, 아내와 함께 마루에 앉아 있던 염석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오래 했어?”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낙리가 애매하게 웃으며 답했다.
“다음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는 신발을 신으려다 멈추었다. 그리고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 그런데 형님.”
“응?”
낙리는 조금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며칠 전 추 장사님께 들으니, 형님께서 제 혼사 이야기를 꺼내셨다고 하더군요.”
“아, 그래…….”
“그런데 그분께서 말을 전하며……조금 곤란한 말씀을 하시더군요.”
“곤란한 말?”
“형님 댁에 대해……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염석의 얼굴에 순간 그늘이 스쳤다. 눈매가 살짝 굳어지며, 낮게 물었다.
“누나가 바깥일 하는 것?”
“그것 보다는…….”
염석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그럼, 혹시……신분 이야기를 한 건가?”
낙리는 잠시 눈치를 보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니 저도 좀 난처했습니다. 그런 일도 있고 하니…….”
말끝을 흐린 낙리는 잠시 멈췄다가 신중한 어조로 덧붙였다.
“이 이야기는 앞으로 저와 누님도 포함해서 당사자들끼리 이야기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염석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을 무시하고 밀어붙일 생각은 없었어. 다만 천천히 분위기를 보면서……기회를 만들어보려 했을 뿐이지.”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두 사람의 마음일 테니까. 네가 내키지 않으면, 주저 말고 솔직히 말해.”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낙리는 재빨리 손을 저으며 고개를 숙였다.
“내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서로 충분히 이야기할 시간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염석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비가 그치면 또 뵙겠습니다.”
낙리는 정중히 인사하고 발길을 옮겼다.
그는 우립(雨笠)을 쓰고 빗줄기 속으로 나서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
낙리가 떠난 후 염석 부부가 방으로 들어오자, 염온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가씨, 낙 선생과 무슨 이야기를 하셨어요?”
염석의 아내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도 궁금하죠?”
그녀는 염석을 끌어들였다. 염석은 고개를 끄떡이며 염온의 앞에 앉았다.
염온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빗소리가 들렸다.
“확실해지면 말할게요. 아직은……정리되지 않았으니까요.”
“에이, 우리한테는 말해도 되잖아.”
염석이 웃으며 재차 물었지만, 염온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염석을 노려보았다.
“그보다 석이, 너는 왜 멋대로 내 혼사 이야기를 꺼낸 거야?”
염석은 잠시 머쓱한 얼굴을 했다가, 낙리에게 했던 것과 같은 말로 둘러댔다.
“두 사람이 싫어하면 억지로 진행할 생각 없었어. 그냥 천천히…….”
그는 염온을 살피며 덧붙였다.
“그런데 누나가 그렇게 기분 나쁜 기색은 아니네?”
염온이 염석을 노려보았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염석이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낙리에게 들었는데, 추 장사 그 양반 참…….”
염석이 혀를 찼다.
“잘 주선해 줄까 싶어 혼사 이야기를 꺼냈더니, 뒤돌아서서 좋지 않은 말을 했다더라. 괜히 이야기 했어.”
염온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내가 바깥일 하는 걸 두고 뭐라고 했어?”
“추 장사가 아랫사람들 집안 사정까지 알 만큼 세심한 사람은 아니지.”
염석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다가, 아내에게 손짓하여 자고 있는 아기의 귀를 막도록 하고는 이어서 말했다.
“신분 이야기를 한 것 같아. 내가 말하러 갔을 때에도, 낙리가 몰락하기는 했어도 사대부 집안 출신이라는 말을 하기는 했었거든. 어쩐지…….”
염석의 아내가 한숨을 쉬었고, 염온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면 내가 승상저에서 잘린 지 꽤 되었는데 아직도 필요하면 불러서 부려먹지. 그런다고 다시 자리에 앉혀줄 생각도 없으면서.”
염석은 얼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자기도 뭐 크게 잘난 신분은 아니면서. 게다가 좋지 않은 소문이 한둘이 아니어서 평생 승상부 속관 자리를 벗어나지 못할 사람이야.”
염온은 눈꼬리를 올리며 농담조로 맞받았다.
“그 가문에 평생 붙어 있을 수 있다면 미래가 밝은 거 아니야?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못할 테니.”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무슨 좋지 않은 소문이 있는데?”
“승상께서 지금의 자리까지 오르는 동안, 추 장사가 앞장서서 더러운 일은 다 처리했지.”
염석의 목소리에 비웃음이 섞였다.
“지금이야 점잖은 척 하고 다니지만, 그 본색은 변한 게 아니야.”
“어떤 더러운 일을요?”
염석의 아내도 관심을 보였다.
“내가 괜히 하는 말이 아냐. 승상의 정적들 뒷조사해서 약점 잡고, 없는 소문도 퍼뜨려 무너뜨린 것, 내 눈으로 본 적도 있어. 솔직히 말해, 승상께서 지켜주지 않으면 그 사람, 하루아침에 목숨 부지하기 어려울 거야.”
염온이 잠시 찡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추 장사는 승상의 심복이잖아. 게다가 승상의 아들을 구해서 지킨 공까지 있는데 설마 버림받겠어?”
염석의 아내도 맞장구쳤다.
“맞아요. 그런 은인을 버리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겠어요.”
염석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시 조소를 흘렸다.
“그렇지, 승상 대인이나 도련님에게야 다시없는 은인이겠지. 하지만 그 일도……알고 보면 좀 무서워.”
“뭐가?”
“뭐가요?”
두 여자가 동시에 물었다.
“당시 상황을 잘 생각해 봐. 반정(反正) 공신인 승상의 체면 때문에 넘어간 일이지만…….”
그는 공연히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더 낮췄다.
“추 장사가 자기 친구하고 연극을 해서 관군(官軍)들을 속였다고 하잖아? 그런데 생각해 보라고. 관군들이 왜 속았겠어?”
염석이 두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죽였다고 생각했으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그때 관군들이 노리던 표적은…….”
염석의 목소리가 속삭임처럼 작아졌다.
“갓난아기였던 도련님이었어.”
염온이 잠시 생각하다가 흠칫하였고 염석의 아내도 오싹한 표정이 되어 입을 막았다.
“설마……!”
“어머나…….”
밖의 빗소리는 더욱 거세어졌다. 처마 끝에서 떨어진 물줄기가 마당의 돌을 거칠게 두드리며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