梅雨 : 매화나무 열매가 익을 즈음에 내리는 비라는 뜻으로, 6월부터 7월에 걸쳐 계속되는 장마 또는 장마철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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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리는 승상저 대문을 들어섰다. 우립(雨笠)을 눌러썼으나 빗줄기를 막기에는 부족했고, 젖은 옷자락은 몸에 달라붙어 무겁게 늘어졌다.
그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별채 쪽으로 향하다가, 본채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 멈춰 섰다.
영회와 추홍이었다. 낙리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기 전, 영회의 차갑게 굳은 눈가를 보았다. 그는 서둘러 옆으로 비켜섰다.
영회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고, 추홍은 우산을 들고 다급히 뒤를 따랐다.
“도련님, 우산을 쓰십시오. 이렇게 비를 맞으시면…….”
“필요 없네. 자네는 아버님께 가보시게.”
차갑게 말을 끊은 영회는 걸음을 재촉했다. 추홍이 머뭇거리며 그를 붙들려했으나, 이미 그의 뒷모습은 빗속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추홍은 당황한 얼굴로 영회의 뒤를 따랐고, 낙리는 그들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낙리의 존재 따위는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낙리는 빗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아버님께서 나를 자식으로 생각하기는 하신가? 지금 나에게 지방에 내려가라고 하시는 의도를 내가 모를 줄 아시오?”
“도련님, 내려가셔서 공적을 쌓으시면 곧 장군이 되실 것입니다.”
추홍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인께서 다 안배해 두셨습니다. 오로지 도련님을 생각하시어 내리신 결정입니다.”
“듣기 좋군. 누가 들으면 자네나 아버님이나 정말로 나를 생각하는 것으로 여기겠소.”
영회가 걸음을 멈추고 추홍을 바라보았다.
“하기야, 자네. 원래 연기를 잘하지 않나.”
추홍의 얼굴에서 혈색이 사라졌다. 빗방울 사이로 그의 동요한 표정이 선명히 드러났다.
영회는 자신이 내뱉은 말의 무게를 깨달은 듯 잠깐 멈칫했다.
“미안하네.”
하지만 그는 끝내 우산을 거절하고는 비에 젖은 옷자락을 휘날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낙리는 고개를 깊이 숙인 채, 두 사람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빗방울이 무표정한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원은 빗소리만 가득했다. 인기척 없는 정원을 가로질러 그는 다시 별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무겁게 젖은 옷자락이 발목에 휘감겼다.
*
낙리가 별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영유가 나타났다. 소년의 얼굴에는 긴장과 초조가 엿보였다.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집안 분위기가 좋지 않은데 괜히 나다니지 말라고 했잖아.”
영유의 목소리는 짜증스러웠지만, 그 밑에는 불안이 깔려 있었다.
낙리는 젖은 옷자락을 움켜쥐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죄송합니다.”
영유는 한숨을 쉬며 목소리를 낮췄다.
“아버님이랑 큰 형님이 또 다투셨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젖은 몸을 털어내고 나서야, 낙리는 영유의 방 앞에 섰다. 문틈으로 불빛과 종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문을 열자, 영유가 고개를 들었다. 소년의 손에는 붓이 들려 있었으나 종이 위에는 글자 하나 없었다.
“왔구나.”
소년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입술을 삐죽거렸으나, 목소리는 한풀 꺾여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낙리는 사과를 하였으나 어린 주인의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영유는 한숨을 쉬며 책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금방 돌아올 줄 알았지. 괜히 기다렸잖아.”
“죄송합니다.”
낙리가 다시 한번 사과하자, 영유는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그럼 됐어.”
잠시 뜸을 들이던 영유가 책을 낙리 앞으로 밀었다.
“이거 좀 봐줘. 선생이 책을 읽고 글을 써오라 했는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하나도 떠오르지 않아.”
낙리는 책을 펼쳤다. 경전의 한 구절이 붓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이 구절에 대해 쓰시면 됩니까?”
“응, 그런데…….”
영유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정말 집중이 안 돼.”
소년의 눈은 글자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집안이 요즘……너무 살벌해. 큰형이 지방에 내려가는 게 앞날을 위해 좋은 일이라 들었는데,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모르겠다니까.”
낙리는 눈을 반쯤 내리깔았다.
‘장남을 멀리 보내 두고, 부인마저 세상을 뜨면……차남을 후계로 세우려는 수순이겠지.’
낙리는 잠깐 침묵했다가 부드럽게 얼버무렸다.
“마님께서 편찮으시니 곁을 지키고 싶으셔서 그런 게 아닐까요.”
그러나 영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마님이 돌아가시면 작은 형이 집안 제사를 잇게 되잖아. 큰형은 그게 싫은 거겠지.”
낙리의 시선이 무심코 영유에게 향했다.
‘이 아이, 다 알고 있구나.’
영유는 책상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큰형이 속상한 건 알지만, 아버지가 정하신 거라면 따르는 수밖에 없잖아. 그래야 집안이 무너지지 않아.”
낙리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전에는 작은 도련님을 무서워하셨는데……이제는 사이가 많이 좋아지셨습니까?”
영유는 잠시 생각하다가 끄덕였다.
“응, 작은 형도 많이 달라졌어. 요즘은 나한테 관심 없기도 하고…….”
영유의 손가락이 책 모서리를 세게 긁어댔다.
“그래도 가족이잖아. 큰형도 마찬가지고. 아버님은 늘, 가족끼리 사이좋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왜 이렇게들 싸우시는지 모르겠어.”
낙리는 책장을 덮으며, 입술만 가볍게 움직였다.
“……그러게요.”
‘동생을 죽이려 했던 자를 가족이라고 믿는구나. 이 집안사람들은……끝내 모르겠지.’
촛불이 흔들리며 소년의 어린 얼굴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낙리는 그 모습에 일순 한줄기 연민을 느꼈으나, 이내 마음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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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빗방울이 쉼 없이 떨어져 내리며, 습한 기운이 저택 전체를 감쌌다.
낙리는 그동안 외출하는 일도 없이 자신의 거처에만 머물러 있었다.
보름째 되는 날, 영유의 예습을 도와주고 있었을 때였다. 영유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큰형이 결국 지방으로 내려가신대. 오늘부터 가족들이 이사 준비를 시작했어.”
낙리는 손에 든 책을 천천히 넘겼다.
‘결국 그렇게 되었군…….’
영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안채에서 난리가 났어. 마님께서 격분하시고 병상에서까지 뛰쳐나오려고 하셔서, 시녀들이 말리느라 고생했대. 결국 큰형이 직접 무릎을 꿇고 말렸다고 해.”
소년의 얼굴에는 걱정이 지나갔다.
“너는 당분간 별채에만 있어. 괜히 눈에 띄었다가는 경을 칠지도 몰라.”
“예…….”
영유는 침묵하다가, 낮게 덧붙였다.
“마님은 나랑 작은형은 싫어하시는데, 큰 형한테는……그래도 약간은 너그러우셔. 예전에는 작은형에게도 잘해 주셨다고 하는데 난 기억이 없어. 내가 아는 건……늘 무서운 모습뿐이셨거든.”
낙리는 곧장 대꾸하지 않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편찮으시니 그렇겠죠.”
영유는 얕게 웃었다.
“네가 집안 사정을 잘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거야. 마님은 원래 우리를 싫어하셔. 우리가 서자(庶子)라서 그래.”
낙리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제가 쓸데없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영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책으로 시선을 향했으나, 글자를 읽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날 저녁, 방으로 돌아온 낙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한참 생각했다. 이제 일이 어떻게 흘러가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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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햇살이 비추는 날이었다.
낙리는 영유의 시중을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문틈으로 밀어 넣은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고향의 지인’에게 왔다는 편지였다.
문을 잠근 그는 촛불 옆에서 조심스레 편지를 펼쳐보았다.
평범한 안부 내용이었다. 그러나 종이 위의 짧은 문장들을 따라 내려가던 시선이 한 곳에 멈춰 섰다.
일상의 내용을 가장한 글의 행간에는, 있어서는 안 될 내용이 있었다.
낙리는 편지를 움켜쥐었다. 손이 떨렸다.
그는 서둘러 종이를 촛불에 갖다 댔다. 하지만 손이 심하게 떨려 불꽃이 손끝을 스칠 뻔했다. 그제야 겨우 손을 놓았다.
타버린 종이의 쓴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낙리는 한참 동안 재를 내려다보았다.
문자는 사라졌지만, 그 의미는 지워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