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梅雨) 2

by 몽중몽

*


회색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 아래,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추녀의 풍경을 느리게 흔들었다.

승상저의 대문 앞에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마차 문이 열리자 비단 치맛자락이 먼저 보였고, 이어 중년 부인이 시녀와 함께 천천히 내렸다.

“오셨습니까.”

대문을 지키던 하인이 깍듯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소(蘇) 부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응답했다.

“안채 마님의 안부를 여쭈러 왔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하인은 정중하게 앞장서며 소 부인과 시녀를 안채로 안내했다.


*


그 시각, 영유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소년의 시선은 펼쳐진 책장보다는 열린 창 밖의 흐린 하늘에 머물러 있었다.

그 곁에 앉은 낙리는 조용히 습자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리야.”

영유가 고개를 돌려 낙리를 바라보았다. 걱정이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너 요즘 어딘가 아픈 건 아니지?”

낙리가 고개를 들었다.

“예? 아닙니다, 도련님.”

“얼굴이 조금 상한 것 같네. 피곤한 눈빛이야.”

“잠을 좀 설쳤습니다. 별일은 아닙니다.”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마. 요즘은 나보다 네가 더 걱정되는구나.”

영유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진심이 묻어 있었다. 낙리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때, 밖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낙리가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방문이 열리며 호위가 들어왔다. 양손에 간식을 담은 쟁반을 들고 있었다.

“도련님, 방금 소 부인께서 방문하셨다 합니다.”

“응? 소 부인이?”

영유가 고개를 돌렸다.

“네, 안채 마님을 병문안 오셨다고 합니다.”

찰나, 낙리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무심히 옷깃을 여미는 동작으로 자연스럽게 감춘 긴장이었다. 영유도, 호위도 알아채지 못했다.

영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마님의 병세가 점점 깊어지시는 것 같아 걱정이구나. 여러 분들이 찾아오시니 송구스럽기도 하고.”

그 말투에는 걱정 못지않게 피곤한 기색이 묻어났다.

“아, 소 부인은 태사공의 따님이야. 어사대부를 역임하신 이 대인(大人)의 부인이기도 하고,”

영유가 낙리에게 설명해 주었다.

“올 초에 태사공의 댁에 새해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만나 뵌 적이 있지. 너는 그때 고향에 내려가 있었으니 몰랐겠지만.”

“그러셨습니까?”

“그런데, 참 이상하더라.”

영유의 눈가에 묘한 표정이 스쳤다.

“태사께서 ‘이제 그만 돌아가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니까, 소 부인께서 ‘오늘은 아버지랑 있고 싶어요.’ 하고 응석을 부리듯 말하셨지. 태사께서는 그저 웃으며 ‘그러거라’ 하시고……소 부인의 아드님이 나보다도 나이가 많다는데 말이야. 언행이 어른답지 못하셨어.”

낙리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조심스럽게 답했다.

“태사께서 연로하시니, 자식으로서 부모님 곁에 있으려 하신 것이겠지요.”

겉으로는 담담히 말했으나 속으로는 약간 어이없음을 느꼈다. 난데없이 뒷말이라니.

하지만 곧 깨달았다. 영유의 말속에 숨은 감정을.

아마도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리라.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부모와 자식 간의 스스럼없는 정, 그것이 이 어린 주인에게는 아득한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는 영유의 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


병풍 뒤쪽에서 짙은 약재 냄새가 새어 나왔다. 방 안은 눅눅한 여름 더위에도 불구하고 서늘했다.

우 부인은 비단 베개에 기대어 반쯤 몸을 일으킨 채 소 부인을 맞이했다. 얼굴은 창백했고 눈가에는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런 모습으로 맞이하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었다.

“무슨 말씀을요. 제가 문안드리러 와야 마땅하지요.”

소 부인이 정중히 답하며 침상 곁 의자에 앉았다.

“몸조리 잘하고 계신지요?”

“몸조리랄 것이 있겠습니까. 이미 관에 한 발짝 들여놓은 몸인걸요.”

우 부인이 쓸쓸히 웃었다.

소 부인은 위로의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우 부인이 먼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아드님이 승진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축하드릴 일입니다.”

소 부인의 얼굴이 순간 환해졌다.

“천만의 말씀을요. 그저 집안 어른들의 덕과 황상의 자애로 한림원(翰林院)*에 부름 받은 겁니다. 과거 시험 성적이 썩 빼어난 것은 아니라, 처음엔 교서랑(校書郞)**으로 나갔다가 이번에야 비로소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지요.”

겸손한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감출 수 없는 뿌듯함이 배어 있었다.

“그래도 스스로의 힘으로 출사한 것이 훌륭하지요. 요즘은 다들……남의 그늘 없이는 한 발 떼기도 어려운 세상인데.”

우 부인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이불 끝을 매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은 차분했으나 어딘가 냉담했다.

“이 집의 아이들도 그 그늘이 사라지면 얼마나 설 자리가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소 부인의 미소가 잠시 굳었다. 그녀는 몸을 약간 뒤로 젖혔다.

“그렇다 해도, 큰 아드님께서는 반정에 공이 크셨지 않습니까. 황상께서도 인정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공이라…….”

우 부인은 낮게 웃었다.

“그렇게들 말하더군요. 핏줄 덕인지 큰애는 그나마 나은 편이지요.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듬직해 보여도,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흔들리는 갈대 같습니다. 자기 자리도 못 지키니 말입니다.”

우 부인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스쳤다.

“둘째는……제 그릇도 모르고 욕심만 가득하니. 세상일이 뜻대로만 되는 줄 아나 봅니다.”

말을 마치고 우 부인은 가볍게 기침을 했다. 곁의 시녀가 재빨리 물을 따라 건넸다.

소 부인은 찻잔을 들어 천천히 입술을 적시며 침묵했다. 난처한 표정이었지만, 우 부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새기듯 듣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한 끝에 소 부인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오래 머물러 폐가 된 것 같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래요…….”

우 부인이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대문 앞에서 하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소 부인은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덜컹이며 움직이자, 소 부인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마부에게 말을 건넸다.

“확인은 제대로 했느냐?”

“예, 마님. 그 사람이 알려준 대로였습니다.”

소 부인은 창밖의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는 행상들의 호객 소리가 요란한 거리를 따라 천천히 달려갔다.


*


마차가 멈춰 선 곳은 소 부인의 친정, 소 태사의 저택이었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대저택은 승상저와 달리 고요했다. 사람의 기척이 드문 듯, 정원엔 적막함이 감돌았다.

문을 지나 정원으로 들어서자, 매실 향이 바람에 실려왔다. 그곳에서 백발의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버지.”

소 부인은 발걸음을 멈추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소 태사는 딸을 보자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

“네가 왔구나. 정원에 매실이 잘 열렸나 보고 오는 길이었다.”

소 부인은 눈길을 정원에 돌리며 말했다.

“지난번에 제가 따 두었어요. 주방에 매실청도 만들어 두었고요.”

소 태사는 잔잔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나무는 원래 새들이 먹으라고 남겨두는 것이란다.”

소 부인은 멈칫했다가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줄은 몰랐습니다.”

부녀는 나란히 걸으며 집 안으로 향했다.



방 안에는 절제된 기품이 감돌았다. 소 부인은 시녀에게 차를 준비하도록 하고 아버지와 마주 앉았다.

시녀가 나간 후, 소 태사가 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승상부인은 잘 만나고 왔느냐?”

소 부인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병세가 깊긴 하지만 당장 큰일이 날 것 같진 않았습니다. 허나 제가 의원은 아니니, 단정 지을 수는 없지요.”

소 태사는 찻잔을 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승상이 부인의 병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는 짐작이 가더구나.”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요사이 아들들의 승진을 퍽 서두르고 있지. 특히 장남의 장군직에 공을 들인다더구나. 복상(服喪)에 들어가기 전에 자리를 굳히려는 모양이다.”

“승상다운 처사군요.”

소 부인의 목소리에 냉소가 스쳤다.

“친자를 위해 후계에서 물려놓고도, 그 장남이 여전히 충성스러울 거라 믿는 모양입니다.”

소 태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허나 거역하기 어려운 일이다. 서운한 것이 있어도 자식이 부모와 척을 지기는 어려운 법이니까.”

그가 웃으며 농담처럼 덧붙였다.

“너도 그렇지 않으냐?”

“저는 아버지께 서운한 것 없습니다.”

소 부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소 태사의 눈에 잠시 그늘이 드리웠다.

“그래, 네가 그리 말해주니 다행이다.”

소 부인은 대답대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마침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너라.”

시녀가 들어와 조심스럽게 차를 올렸다. 은은한 향이 방 안에 퍼졌다.

시녀가 물러나자 차를 한 모금 음미한 뒤, 소 태사는 대화를 이어갔다.

“아무튼 승상은 큰아들을 통해 군부에 세력을 확고히 하고 싶은 듯하다.”

소 부인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

“이미 조정을 틀어쥐고 있는데 군부에서까지 세력을 탐하다니, 욕심이 과합니다. 황상이나 다른 신료들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군요.”

소 태사는 수긍하며 중얼거렸다.

“과한 욕심은 언젠가 화를 부르는 법이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차향만이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소 부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날을 보아, 다시 한번 병문안을 가야겠습니다.”

소 태사는 창밖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가 올 것 같구나.”

회색 구름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


낙리는 영유의 책들을 품에 안고 복도를 따라 걷고 있었다.

정원 쪽 창이 열려 있어 흐린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먹구름은 낮게 깔려 있었고, 금세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듯했다.

‘또 비가 내리려나.’

그는 무심히 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요즘 들어 자주 느끼는 불안감이 또 엄습했다. 공연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으나, 정원은 고요했고 인기척은 없었다.

한숨을 쉬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들어가겠습니다.”

“들어와.”

낙리가 방에 들어서자 영유가 반갑다는 듯이 말했다.

“마침 잘 왔다. 내일 외출할 일이 있어. 사흘 정도 나갔다 올 거야.”

“그러시면 내일 수업은 어쩌시려 하십니까?”

“괜찮다, 허락받았어.”

영유는 덧붙였다.

“너도 같이 가야 돼.”

낙리는 책을 끌어안았다. 내일모레는 자신도 나가야 했는데.

“모레에는……제가 약속이 있습니다.”

“중요한 일이니 너도 동행해.”

영유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낙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어디로 가시는 것입니까?”

“성묘를 간다. 은인의 묘에 갈 거야.”

낙리의 손가락이 책을 콱 움켜쥐었다. 영유는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며칠간 내린 비 때문에 묘가 망가지지 않았는지 확인하러 사람을 보낼 예정인데, 비만 안 오면 나도 갈 거야. 이번에는 내 부하인 너를 그분 묘에 소개해주고 싶어.”

낙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중요한 일이라면……제 약속을 미루겠습니다.”

“그래.”

창밖에서는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영유는 빗소리를 들으며 중얼거렸다.

“내일은 개었으면 좋겠는데…….”

낙리는 눈빛이 드러나지 않도록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생각했다.

아예 홍수가 났으면 좋겠다고.




* 한림원(翰林院) : 왕명 작성, 교서·조서의 문안(文案) 작성을 담당하는 관청. 조선의 예문관.

한림원 임명은 (임금의) 부름을 받는다[召] 표현되기도 했다

** 교서랑(校書郞) : 문서 교정, 필사 담당. 정 8품~정 9품

*** 한림공봉(翰林供奉) : 한림학사를 보좌하며 문서 초안 담당. 종 6품~종 7품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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