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우(霖雨) 1

by 몽중몽
霖雨 :
1. 여름철에 여러 날을 계속해서 비가 내리는 현상이나 날씨. 또는 그 비.
2. 가뭄을 푸는, 사흘 이상오는 비.
3. 은혜와 덕택


*


하늘은 잿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낮이라 하기엔 빛이 어두웠고, 산들바람에 이따금 풀잎이 뒤집혔다. 沮延(저연)이라 새겨진 비석 앞에서 하인들은 낫을 들고 잡초를 베어내느라 온몸이 흙투성이였다. 벌초가 끝나자 그들은 한쪽에 물러서며 고개를 조아렸다.

영유는 공손히 앞으로 나아갔다. 어린 얼굴에 진지한 표정을 짓고 정중히 헌작(獻爵: 제사 때 술잔을 올림)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깊이 절했다.

“어르신, 영유가 찾아뵙습니다.”

영유 뒤에 서 있던 추홍이 이어서 절을 올렸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그리움과 아픔이 서려 있었다.

낙리는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봉분 위의 잡초 냄새와 흙냄새가 섞여 코끝을 찔렀다. 영유의 경건한 태도와 추홍의 무거운 기색이 어딘가 멀게만 느껴졌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뒤틀렸으나, 낙리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띠지 않았다.

“리야, 너도 인사드려라.”

영유가 일어서며 말했다.

낙리는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애써 스스로를 달랬다. 어차피 저것은 의관묘(衣冠墓)*이다. 허망한 흙더미에 절하는 것이 무슨 대수인가. 원수의 가문에 붙어사는 것보다야 가벼운 굴욕이다.

그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땅에 이마가 닿는 순간, 흙냄새가 짙게 밀려왔다. 절을 마치고 일어서면서도 눈빛은 얼음처럼 식어 있었다.

비가 올 듯 하늘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구름은 산허리를 낮게 끌어안고, 바람도 잦아들었다.

추홍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올 것 같습니다. 서둘러 내려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행은 서둘러 하산 길에 올랐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내려가며 영유가 낙리에게 말을 걸었다.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는 무게가 배어 있었다.

“저 묘에 묻힌 어르신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느냐?”

“잘은 모릅니다…….”

낙리가 애써 정색하며 답했다.

“폐주 시절에……그 폭군에게 아버님이 밉보여서 영 씨 집안이 몰살당하다시피 했다. 그때 어르신과 추 장사가 없었더라면 나는 이 자리에 없었을 거야.”

영유의 목소리에 깊은 존경이 묻어났다. 낙리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명한 이야기라 저도 들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이었군요.”

“갓난아기였던 나를 추 장사가 빼돌려 숨겼고 어르신은 미끼가 되어 죽었지, 그 덕에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어.”

영유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눈가가 붉어지려는 기색을 겨우 누르며 그는 말을 마쳤다.

“내 눈앞에서……”

추홍이 걸음을 멈추고 목이 메인 채로 말했다.

“친구가 병사들에게 찢겨 죽었다.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어.”

영유는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추홍의 얼굴도 굳어져 있었고, 주변의 호위들과 하인들 모두 숙연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췄다.

낙리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떨리는 손을 주먹 쥐어 진정시켰다.

“나는 그분의 은혜로 지금까지 살 수 있었다.”

영유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소년의 목소리는 순수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정말 열심히 살 거야. 그분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그 친구도 도련님이 이렇게 훌륭하게 자란 것을 보면 기뻐할 것입니다.”

추홍은 영유의 어깨를 다독였다. 주변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낙리만이 다른 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겉으로는 경청하는 듯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부글거렸다.

영유와 추홍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낙리는 그 뒷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 입술 틈으로 소리 없는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그때 죽었어야 했다.’

먹구름이 갈라지며 날카로운 빛이 사방을 할퀴고 지나갔다. 굉음이 온 산을 뒤흔들었다.

속삭임은 바람에 섞여 사라졌지만, 그 말의 그림자는 발걸음마다 길게 드리워졌다.


*


우르릉―!

요란한 천둥이 창밖에서 울렸다. 소 부인은 잠시 창밖을 보다가 다시 소 태사를 바라보았다.

“구름을 보니 내일까지 올 것 같네요.”

소 태사는 바둑판 위에 백돌을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한동안 가물었는데 다행이다. 비는 만물을 살리기도 하고……씻어내기도 하지.

그리고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때를 잘 봐야 할 텐데…….”

소 부인은 흑돌을 들어 올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조심스럽게 한 귀퉁이에 돌을 놓았다.

“비가 그치기 전에 한 번 더 방문해 보겠습니다.”

“그러거라.”

“그나저나 이번에 꼭 우리 집에도 들러주세요. 손자들이 보고 싶어 하니까요.”

“큰 아이야 한 달 전에도 보았지 않았느냐.”

소 태사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아버지께서 요즘 한가하시니까요.”

“그러게 말이다.”

소 태사는 바둑판을 내려다보며 백돌을 집어 들었다.

“이렇게 한가해진 것도……승상의 배려 덕이지.”

소 태사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딸과 바둑이나 두며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으니.”

그는 돌을 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나도 그 사람을 위한 일을 해주어야 도리지.”

잠시 멈췄다가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후계 문제도 정리해 주고, 무리한 욕심을 막아주는 것이 진정한 우정 아니겠느냐.”

“말씀대로예요.”

소 부인은 태연하게 맞장구를 치며 흑돌을 놓았다.

소 태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흘끗 보았다.

“충성스러운 부하가 주군의 어린 핏줄을 지키고자 목숨을 바쳤다지.”

소 태사의 손가락이 바둑돌을 천천히 굴렸다.

그를 기억하고, 기리고……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던 모양이야.”

침묵하다가 낮게 덧붙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난 다른 일들은…….”

몰랐던 것도 아니지요.”

소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알면서도……부하의 충성과는 다른 무게로 여긴 거예요.”

“재앙은 멀리서 오지 않는 법이지.”

소 태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빗소리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죄스러운 마음이라도 품었다면……적어도 제대로 기억이라도 했다면…….”

바람이 불자 종이창이 떨렸다. 소 태사의 목소리는 그 떨림에 섞여 희미해졌지만, 마지막 문장은 또렷하게 울렸다.

“어쩌면……지금 자신의 지척에 있는 누군가를 알아봤을지도 모르는데…….”

소 부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둑돌이 판 위에 놓이는 소리와 빗소리만이 적막한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 의관묘(衣冠墓) : 시신 없이 옷과 갓을 묻은 묘소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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