妙畵 : 뛰어나게 잘 그린 그림.
*
햇볕이 내리쬐는 나루터. 바람이 불 때마다 버드나무 새순들이 살랑이며 잎사귀 끝을 흔들었다.
염온은 그늘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 장을 보러 나온 아낙네들, 짐을 실으러 온 상인들, 강물에서 빨래를 하는 여인들……저마다의 표정과 몸짓이 달랐다.
염온의 눈길이 문득 멈췄다. 강변을 따라 천천히 걸어오는 사람. 낙리였다. 두 사람의 눈이 공중 어딘가에서 마주쳤다.
낙리는 머뭇거리다 이내 발걸음을 염온 쪽으로 옮겼다.
“또 뵙게 되었습니다.”
낙리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염온도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인사를 주고받던 중, 염온의 시선이 낙리의 손으로 향했다.
“책방에 가시는 길이셨나요?”
“아, 이것 말씀이십니까?”
낙리가 손에 든 작은 보자기를 들어 보였다.
“갔다 오는 길이었습니다. 맡겨둔 강아지를 보러.”
그는 잠시 우물 거리다가 덧붙였다.
“마땅히 맡길 곳이 없어서 책방 주인 어르신께 계속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제게는 유일한 가족이라, 버릴 수도 없고요.”
염온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낙리는 염온이 여기에 있는 이유가 궁금한 듯 몇 번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였으나 결국 입을 닫았다.
잠깐 정적이 흘렀고, 그 사이 바람이 강물 위를 스쳐 버드나무 가지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잔잔하게 퍼졌다.
염온은 작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저는……마님의 초상화가 도무지 잘 되지 않아 사람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초상화요?”
“보고 그대로 그리면 되는 일이라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만……그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낙리는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염온은 그의 반응에 놀란 듯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시선을 강물로 돌렸다.
“마님께서 그러시더군요. ‘내가 곧 무덤에 들어가겠지만, 시체처럼 그리지는 마라’고요.”
“허……부담스러운 말씀을…….”
“그래서 최대한 병색을 지우고 위엄 있게 그려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어떤 부분이 문제였나요?”
낙리가 묻자 염온이 작게 웃었다.
“더 건강하고, 더 인자하게. 그러니까……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하실 것 같은 시절의 얼굴을 원하셨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이니 의뢰하신 대로 해드리는 것이 맞겠지요.”
염온은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레 덧붙였다.
“그런데……가끔은 자신의 그림을 그리고 싶어지는 심정이 들어요. 그래서 실수를 한 것 같아요.”
낙리는 염온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염온이 계속 말했다.
“그림을 좋아해서 굳이 남자 옷을 입고서까지 이 일에 발을 들였는데, 막상 해보니 제가 그리고 싶은 그림과 그려야 하는 그림 사이엔 깊은 틈이 있더군요.”
염온은 눈을 내리깔았다.
“예전에 동생이 그런 말을 했어요. 누나는 그림을 좋아하지만, 결국 좋아하는 대로는 그릴 수 없을 거라고……그랬죠.”
그녀는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그땐 그 말이 틀리길 바랐는데……요즘은, 그 말이 자꾸 떠오릅니다.”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좋아하지 않았다면, 덜 힘들었을까요.”
말을 끝내고 나서야, 염온은 문득 자신이 너무 많은 말을 했다는 것을 느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답답해서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낙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도 고민이 많으면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 마음, 잘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강변을 바라보았다. 물결처럼 버드나무 가지들이 흔들렸고, 나루터에는 평화로운 아침의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염온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히 가십시오. 마님의 초상화……분명 좋은 방법을 찾으실 겁니다.”
낙리의 격려에 염온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
밖은 햇빛이 사라진 지 오래였으나 방안은 대낮처럼 환했다.
우 부인은 자단목으로 만든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못마땅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펼쳐진 종이 위로 화공의 붓 끝이 조심스레 움직이고 있었다.
“그게 뭐냐.”
날카로운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염온은 눈을 깜빡이며 붓을 멈추었다.
“내 얼굴이 그리 곱더냐? 주름 하나 없는 걸 보니, 꼭 어디 시집도 안 간 계집아이 같구나.”
염온은 말없이 붓을 거두고 새 종이를 펼쳤다. 우 부인은 조금 입꼬리를 비틀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가……이렇게까지 말해줘야 하느냐.”
“…….”
“그림 솜씨가 아무리 좋아도, 그려야 할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냐.”
염온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다만 붓에 먹을 다시 찍어 처음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우 부인은 염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이 오래도록 머물다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어련하겠느냐. 사람이 제 자리가 아닌 일을 하려면, 본래 모습을 감추고 꾸며야겠지. 그러니 마음도, 그림도 어찌 곧을 수 있겠느냐.”
붓을 든 손은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다시 그림을 그려나갔다. 한 번 더, 건강하고 인자한 얼굴. 우 부인이 요구한 그 모습으로.
“참으로 공들여 그리는구나.”
우 부인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정작 네 마음은 한 줌도 안 보인다. 그림에라도 제 마음을 담고 싶을 법한데, 그렇지 않으냐?”
일순 염온의 붓 끝이 떨렸다. 그러나 염온은 곧 손을 고쳐 잡았다.
“하기야, 당연하지.”
우 부인은 등받이에 몸을 더 기대었다.
“너희 같은 평민들은 재주든 뭐든 팔아야 살 수 있으니 말이다. 거기에 마음 따위가 필요하겠느냐. 하지만.”
그녀는 잠시 기침을 하다가 말했다.
“성의는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제대로 돈을 받으려면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려내거라.”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촛불들이 살며시 흔들리며 그림자를 만들어냈다가 다시 지웠다. 우 부인은 잠시 조용히 있다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피곤한 기색을 드러냈다.
“됐어. 오늘은 그만하자. 피곤하구나.”
우 부인이 손을 흔들자 시녀들이 다가와 부축했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염온은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미완성된 그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염온의 입술에서 억눌린 숨이 흘러나왔다.
염온은 화구를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펼쳐진 종이 위에 시선이 머물며 그녀는 잠시 멈칫하였으나, 이내 미련을 지우듯 종이를 조심스레 말아 끈으로 묶었다.
*
염온이 방을 나서자 문 앞에서 기다리던 시녀 한 명이 따라왔다.
그녀는 두 손을 꼭 모은 채 염온의 얼굴빛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마님께서 요즘 따라……말씀이 거칠어지셨지요. 너무 마음 상하지 마세요…….”
시녀는 염온의 걸음을 따라가며 이어갔다.
“밖에도 소문이 났겠지만……한동안 집안이 소란스러웠거든요. 그 일로 마님께서 신경을 많이 쓰시고, 건강이 더 좋지 않아지셨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사실은……며칠 전, 마님께서 쓰러지셨답니다. 약을 바꾸고 나서야 간신히 안정되셨어요.”
염온은 걸음을 멈추고 시녀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그렇군요. 노고가 많으십니다.”
시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마님께서 나흘 후에 다시 오라 하셨습니다. 괜찮으신지요?”
“괜찮습니다. 그때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염온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밖으로 향했다.
안채를 나서 대문 쪽으로 향하니, 회랑과 마당이 겹겹이 이어졌다. 오늘따라 이 저택의 크기를 실감하며 염온은 걸음을 옮겼다. 멀찍이 낯익은 그림자가 등(燈)을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낙리였다.
“낙 선생?”
“아, 누님.”
낙리가 다가오며 가볍게 눈인사를 하였다.
“동생분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세요. 저더러 대문까지 배웅을 부탁했어요.”
“네? 석이가요?”
염온이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낙리는 빙긋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형님은 마님 성정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저도……걱정이 되어서요.”
낙리는 등불로 앞을 비추며 염온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오늘도……헛일이었습니까?”
조심스러운 물음에 염온은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네…….”
짧은 대답이 끝나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하늘을 가릴 듯 높은 담장에 부딪혀 흩어지다가 낙리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림이 나빠서가 아니라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
“마님께서는 지금 화풀이할 곳이 필요하신 것뿐입니다. 누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염온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다 해도 견디지 못한 건 내가 부족한 탓이겠죠. 그림도 그렇고요.”
“그렇게까지 자신을 깎아내리지 마세요.”
낙리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배어있었다.
대문에 이르자 염석이 반색하며 다가왔다.
“누나! 늦었네.”
그는 곧 낙리에게도 눈길을 주며 활짝 웃었다.
“고마워. 역시 넌 좋은 녀석이야.”
낙리도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럼 저는 들어가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조심스레 문을 닫는 소리를 뒤로 하고 한동안 걸어나오자 밤거리는 분주했다.
길 위의 사람들도 종이 치기 전 들어가려 빠른 걸음으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염온의 말에 염석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걱정되어서 온 거야.”
“그런데, 마님이 그렇게 무서운 분이야?”
“그렇다니까…….”
염석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 내가 여기서 일할 때도 마님 성정에 대해 듣기는 했어. 그땐 그냥 사람들 뒷말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 보니 괜히 퍼진 말은 아니더라.”
“그렇구나……. 고마워.”
두 사람은 인파에 섞여 나란히 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