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陽和) 2

by 몽중몽

*


나뭇가지 사이로 초록빛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햇살을 받은 작은 깃털은 연둣빛 비단처럼 부드럽게 빛났고, 하얀 눈 테두리 속 눈망울은 생기 넘쳤다. 작은 체구로 허공을 날며 때로는 꽃 속을 파고들고, 때로는 거꾸로 매달려 나뭇잎 뒷면을 훑는 모습은 정원의 공기를 들썩이게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년의 눈빛이 반짝였다. 소년이 숨을 죽이며 새의 날갯짓을 좇고 있을 때, 멀찍한 정자에서는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어른들의 기척이 들려왔다.



영 승상과 소 태사는 봄볕이 스며든 정자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나무 그늘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탁자 위의 찻잔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정말로……이번에 태사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영 승상은 깊이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언젠가 반드시 보답드리겠습니다.”

소 태사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온화하게 웃었다.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오래 함께 걸어온 사이 아닙니까.”

“그래도 이번 일만큼은…….”

영 승상이 다시 감사를 표하려 하자, 소 태사가 가볍게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그만합시다. 보답 같은 말은 듣는 이가 민망해요. 대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해봅시다. 북방 쪽 소식이 심상찮다 들었는데…….”

하지만 영 승상은 쉽게 화제를 돌리지 못했다.

“외손자 분이 과거 준비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 제가 도울 일이…….”

“괜한 염려십니다.”

소 태사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웃음이 담겨 있었지만,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그런 말씀은 이제 그만하세요.”

영 승상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두 사람 사이엔 일순 정적이 맴돌았다. 그 틈을 타 정원에서는 소년의 맑은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퍼졌고 향긋한 꽃잎이 그 웃음 뒤를 따르듯 흩날렸다.

그런데…….”

소 태사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이 정원 끝, 새를 바라보는 소년에게 닿았다.

“아드님 말입니다.”

영 승상의 몸이 미세하게 굳었다.

“……예?”

“둘째 아드님이 아니라, 오늘 함께 오신 막내 아드님 말이예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소 태사의 눈은 여전히 소년을 향하고 있었다.

“승상.”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막내 아드님에게……좀 더 마음을 쓰심이 어떠하겠습니까.”

영 승상의 손이 찻잔을 든 채 멈췄다. 그의 표정에 스치듯 불편함이 드러났다.

“나이가 드니 괜한 참견을 하게 되는군요.”

소 태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가 막내 공자에게 그리 서먹하게 대하시는 것은……혹 저 아이 때문에 충성스러운 부하를 잃으셨기 때문입니까?”

영 승상의 턱이 굳게 다물렸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야말로 가장 명확한 답이었다.

“그때, 소중한 아이를 어떻게든 지켜달라고 부하에게 명했던 것은 바로 그대가 아닙니까.”

소 태사의 목소리에 깊은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그 희생으로 살아난 아이를 외면하신다면, 그 부하의 희생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 당시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는 말입니까?”

영 승상의 얼굴에 괴로운 표정이 스쳤다. 오랜 침묵 끝에,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명한 것은 사실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자식만은 살리고 싶었지요.”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그 사람의 죽음을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영 승상은 말끝을 흐렸다. 그의 눈빛이 어두워져 있었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습니다.”

영 승상은 차갑게 말하며 입술을 닫았다. 그러나 고개를 돌린 그의 시선은 어느새 정원에 닿아 있었다.

새를 쫓으며 해맑게 웃는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 채, 햇살 속에서 웃고 있었다.



소 태사와의 자리를 파한 영승상은 하인을 불러 지시했다.

“이만 돌아갈 참이니……저 아이를…….”

잠시 머뭇거리던 영 승상이 이어 말했다.

“유를 불러오너라.”

그 목소리는 여전히 진중하였으나 끝맺음에 작은 흔들림이 배어 있었다.


*


정자를 떠나자, 발아래 자갈이 잔잔히 부서지는 소리만 길을 메웠다. 바람에 흔들린 나뭇잎이 드문드문 햇살을 쏟아냈다.

마차 앞에 다다르자 수행인들이 말없이 자리를 정비했다. 영 승상은 마차에 올라앉았지만, 문을 닫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눈길은 잠시 하늘로, 다시 정원 쪽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는 한참 미동도 없이 그대로 있었다.

마차 주위로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낮은 수풀 속에서 새소리가 작게 울렸다.

승상은 영유의 마차 곁에서 대기 중이던 청년을 불렀다.

“자네.”

낙리는 깜짝 놀라며 승상의 마차 쪽으로 달려왔다.

“예, 대인.”

영 승상은 한 손으로 마차 기둥을 짚고,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막내는……평소에 어떤가?”

낙리는 일순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곧 공손하게 답했다.

“도련님께서는 늘 성실하십니다. 글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으시고, 무예 수업도 정해진 시간에 빠지지 않으십니다. 노는 것도 좋아하시지만, 수업을 받으실 때면 아주 진지하십니다.”

승상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얼마 전에는……정원에서 꽃을 직접 꺾으셨습니다. 대인께 드리신다며, 하인들을 시켜 아침 일찍 대인의 서재로 보내도록 하셨지요.”

그 말에 승상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그 아이가, 요즘 집안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 것 같지는 않더냐.”

그는 다소 망설이며 말했다.

“혹시 의기소침해지거나……제 형들을 피하는 일은 없었느냐.”

낙리는 생각하다 조심스레 답했다.

“처음엔 조금 그런 기미가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요즈음은 오히려 더 의젓해지셨습니다. 수업도 먼저 챙기시고, 형님들 앞에서도 말과 행동을 조심하시려 애쓰십니다.”

승상의 시선이 잠시 먼 곳에 머물렀다.

“오늘, 외출에……불만을 보이진 않았는가?”

그가 다시 묻자 낙리는 고개를 조아리며 공손한 어조로 답했다.

“아닙니다. 도련님께선 기뻐하셨습니다. 대인 곁에 있을 수 있어서. 그리고 대인께 도움이 된다고 느끼신 것 같았습니다.”

그 말에 승상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가느다란 바람이 마차 안으로 스며들어 뺨을 스쳤다. 그는 바람결에 실려온 듯한, 정원에서 웃던 아이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렇군…….”

이윽고 마차 문이 닫혔다.



어스름이 내려앉은 대문 앞, 바퀴 소리가 울렸다. 마차가 멈추자 하인들이 서둘러 달려왔고, 영 승상은 천천히 마차 밖으로 나왔다.

먼저 내려 서 있던 영유가 승상에게 고개를 숙였다.

영 승상은 무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옮기려다 멈추었다.

“피곤하지는 않으냐.”

“예?”

“오늘 하루 긴 외출이었으니 말이다. 괜찮냐는 말이다.”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영유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잠시 후, 소년의 입가에 조심스런 웃음이 번졌다.

“괜찮습니다. 아버님 곁에 있었으니 즐거웠습니다.”

영 승상은 대답 없이 아들을 바라보다, 문득 시선을 마당으로 돌렸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다시 영유를 보며 물었다.

“그 꽃은……어디서 꺾은 것이냐.”

영유의 표정에 놀람이 스쳤다.

“……어, 별채의 정원에서 꺾었습니다.”

“그랬느냐.”

그 말뿐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그 한마디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내일은 내 일정이 없으니, 오전에 별채 정원에 나가도록 하겠다.”

영유가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저도 함께입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영 승상은 짧게 말한 뒤, 문 안으로 들어갔다.

영유는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서쪽 하늘의 붉은 빛이 서서히 드리우고 있었다.


*


저녁 등이 하나둘 밝혀지는 복도, 영유는 방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본 그는 자신을 따라오던 낙리를 손짓해 불렀다.

“리야.”

낙리는 영유의 곁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아버님께서……아까 너를 부르셨다지?”

낙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셨어?”

영유의 말투는 덤덤했지만, 손끝이 소매 안에서 살짝 움찔거렸다.

“도련님에 대해 이것저것 여쭤보셨습니다.”

“……나에 대해서?”

“예. 평소 공부는 잘 하고 있으신지, 무예는 성실히 익히시는지, 요즘 기분은 어떠신지……그런 사소한 것들이었습니다.”

소년의 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면서 낙리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전에 정원에서 꺾으셨던 매화꽃도 기억하고 계시더군요. 대인께서 그걸 눈여겨보셨던 것 같습니다.”

“……그건 그냥, 한 번 뿐이었는데.”

영유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뿌듯함이 어려 있었다. 낙리는 그 변화를 알아차렸으나 모른 척하였다.

“또, 집안 분위기 때문에 도련님께서 혹시 기운이 꺾인 건 아닌지 염려하셨습니다. 아주 세세하게 물어보셨지요.”

소년은 등불이 흔들리는 벽에 기대어 선 채,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낙리는 조심스레 덧붙였다.

“말씀은 적으셨지만……도련님을 꽤 신경 쓰고 계신 듯했습니다.”

영유는 그 말을 들은 뒤에도 잠시 조용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기쁨이 서려 있었고, 소매 끝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에는 묘한 설렘이 감돌았다.

“……그래?”

이윽고 소년이 되묻자 낙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유는 입술을 다문 채 작게 숨을 들이켰다. 곧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발걸음에는 평소에 없던 가벼움이 있었다.


*


낙리는 영유가 방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방 안의 기척에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말없이 등을 돌려 적막한 복도 속으로 사라져갔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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