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陽和) 1

(수정)

by 몽중몽
陽和 : 1. ‘화창한 봄날’이라는 뜻으로, 어진 정치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2. 陽和陰尅(겉으로 사이좋게 지내며, 속으로는 반목한다)에서, 겉으로만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이르는 말.


*


대현(大玄)의 황제 영안제(永安帝)는 평소보다 무거운 표정으로 용상에서 일어났다. 조회(朝會)를 마친 신료들이 차례로 물러나는 가운데, 황제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머물렀다.

“위위경.”

“예, 폐하.”

낙빈이 조아렸다.

“따라오라.”

편전(便殿)에 이르자 황제는 좌우를 물리고 어좌에 앉았다. 금빛 곤룡포의 소매가 팔걸이를 따라 늘어지며, 그 위에 얹힌 손끝에는 은근한 힘이 실려 있었다.

“승상이 경(卿)의 스승에게도 찾아갔는가.”

낙빈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는 무릎을 반쯤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황제는 혀를 가볍게 찼다.

“어지간히 애가 타는 모양이로구나. 소 태사에게까지 찾아간 것을 보니. 듣자 하니 다른 대신들도 하나하나 만나 부탁하고 다닌다지?”

“소신(小臣)이 알기로도 그러하옵니다.”

황제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 소문이 사실인가? 그대 성정이라면 승상의 소문을 그냥 넘기지 않았을 테지.”

단도직입적인 하문에 낙빈은 일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신이……잘 알지는 못하나이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말해보라. 그리 말할 때에는, 대개 주워 모은 것이 있단 소리 아닌가.”

황제의 목소리에 압박감이 실렸다. 낙빈은 숨을 들이쉬었다.

“소문이 아랫사람들을 통해 돌았기에 확실치는 않으나, 사실일 가능성이 크옵니다. 승상이 영 소경을 지나치게 감싸는 탓에, 오히려 의심이 짙어지옵니다.”

영안제가 입가를 올렸다. 그러나 그 웃음에는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짐(朕) 또한 사실로 본다. 후계를 감싸려는 심정은 이해하나…….”

그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대현의 산하는 멀리 아득히 펼쳐져 있었으나, 황제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사로운 정조차 가르지 못하는 자가 조정의 영수라니. 며칠 전, 짐이 친히 물었을 때에도 눈을 피하며 얼버무리더구나.”

황제는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규칙적인 소리가 편전의 적막을 더욱 묵직하게 만들었다. 잠시 후, 그가 단호히 입을 열었다.

“가족을 해치려 든 자를, 대리시(大理寺)에 그대로 둘 수는 없지 않겠나.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낙빈은 깊이 엎드렸다.

“폐하의 뜻이 지극히 옳사옵니다. 법을 다루는 자는, 그 법 아래에 스스로를 놓을 수 있어야 하나이다.”

낙빈은 잠시 뜸을 들인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오나……소신의 미천한 생각으로는, 승상이 아들의 파직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듯하옵니다.”

그는 황제의 표정을 살피며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승상은 자식에 대한 애착이 유달리 깊어, 영 소경의 관직 생활에 조금이라도 흠이 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옵니다. 더욱이…….”

낙빈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한층 더 조심스러운 어조로 이어갔다.

“더욱이 승상의 조정 내 영향력이 적지 않으니, 폐하께서 파직을 내리신다 하더라도 결국은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 할 것이옵니다.”

황제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으나, 낙빈은 고개를 숙인 채 계속했다.

“만약 이 일로 조정에서 큰 논란이 일어난다면……그 과정에서 손상되는 것은 폐하의 위엄일지도 모릅니다. 승상은 아들을 지켜냈다는 명분을 얻고, 폐하께서는 신하의 반발에 굴복하신 것이 되고 마옵니다.”

편전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황제는 낙빈의 말속에 숨겨진 의도를 충분히 이해했다. 승상을 견제하려는 속셈이 훤히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낙빈이 지적한 현실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집안 내에서 서둘러 일을 덮었으니, 지금은 소문뿐이옵니다. 누구도 감히 영 소경을 향해 노골적인 비판을 못하고 있사옵니다.”

황제가 시선을 돌려 낙빈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낙빈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승상 스스로 아들의 사직을 청하게끔 하심이 가장 온당하옵니다.”

“그리 되면, 승상은 내게 빚을 지는 셈이 된다는 것이냐. 자진하여 몸을 낮추는 모양새로 말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황제는 턱을 괴고 고민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하지만……승상은 언젠가 아들을 다시 관직으로 끌어올리려 하겠지.”

낙빈이 담담히 답했다.

“그 아들이, 욕심이 실력을 앞서나 자질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옵니다. 다시 일어서는 일은 오롯이 폐하의 뜻에 달려 있사옵니다. 다만 지금은 승상으로 하여금 먼저 고개를 숙이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이라 사료되옵니다.”

황제는 손끝으로 팔걸이를 천천히 문지르며 골똘히 생각하였다. 낙빈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의 분석은 틀리지 않았다.

“……좋다. 고심해 보도록 하지.”

그는 손을 툭 내저으며 말을 맺었다.

“이제 그만 물러가 보라.”

“예, 폐하.”

낙빈이 일어서 절을 올리고 물러가려 하자, 황제가 문득 손을 들어 그를 불러 세웠다.

“아 잠깐, 방금 말한 것……그대의 뜻인가? 아니면 소 태사가 그대의 입을 빌린 것인가?”

낙빈은 다시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조정 고관의 가문사가 화제에 오르는 일이라, 태사도 근심을 표하며 소신과 상의한 바는 있나이다.”*

황제는 옅게 웃으며 물었다.

“요즘은 태사의 얼굴을 도통 보기 어렵구나. 혹시 짐에게 서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농담조의 말투였지만, 그 끝에는 오래 묵은 그늘이 어렸다.

“어찌 그러한 일이 있겠사옵니까.”

낙빈은 흔들림 없는 얼굴로 차분하게 답했다.

신을 가르친 이는, 폐하의 깊은 뜻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사옵니다.”

황제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대가 돌아가서 전하라. 가끔은 조회에 얼굴을 비추시라고. 조정이 허전하니 말이다.”

“분부 받들겠습니다.”

낙빈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물러났다. 편전의 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영안제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


승상부, 내당(內堂). 낮은 술상을 앞에 둔 영 승상은 술잔을 들고 눈을 내리깔았다.

“흠, 그래도 큰 탈 없이 넘어가긴 했군.”

추홍은 몸을 낮춰 예를 갖추었다

“예, 대인. 여론이 더 움직이기 전에 이 정도에서 마무리된 것만도 다행입니다.”

승상은 술잔을 다 비우고, 눈을 감았다.

“문제는……회(恢)다.”

추홍은 말을 아꼈고 승상은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어찌 됐든 그 아이가 보기엔, 아우가 칼을 겨눈 셈이니. 어지간해서는 그 응어리가 풀리지 않을 거다.”

“장남이시니, 마음을 넓게 가지시지 않겠습니까.”

“장남이기 전에, 양자다. 내 아이인 것은 변함없지만……피가 다르니 마음이 다르다는 생각이, 그 아이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을 것이야.”

승상의 말끝에 한탄이 섞였다.

추홍은 애써 희망적인 말을 붙였다.

“큰 도련님이 그럴 리 있겠습니까. 누구보다 가문을 생각하는 분입니다.”

하지만 그 말에는 망설임이 배어 있었다. 승상도 그 기색을 알아차린 듯 술잔을 내려놓고 낮게 웃었다.

“그래, 군부에서 자리를 굳혀가는 것도 그런 까닭이겠지. 하지만 만에 하나, 마음이 돌아선다면……그땐 감당하기 어렵다. 지금 내 위치에서, 집안까지 균열이 나선 안 돼.”

술상 위의 등잔 불빛이 조용히 흔들렸다.

“소문을 잠재우려면, 결국 형제들끼리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야 해. 사(嗣)는 그럴 생각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정작 회는 아무 말도 없더군. 내 얼굴도 피하고. 사는 또 그것을 알아 형을 피해 다니지.”

“조금은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승상은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다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자식들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것은 아닐세. 다만, 가문이 무너지면 그 속에 든 이들도 함께 주저앉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지. 지금까지 버텨온 세월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자네도 알지 않나. 내 혈육이 이제 몇이나 되겠는가. 이 상태에서 자식들끼리 다투기라도 하면……가문 전체가 무너질 것이다.”

추홍은 동의하며 영 승상을 위로했다.

“그 마음, 언젠가는 아드님들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영 승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술잔을 들다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소 태사에게 빚을 졌지. 예전엔 그 사람과 험악했는데……세상 참 묘하지 않나. 태사가 아니었다면 아들을 지키기 어려웠을 텐데.”

“태사께서도 은연중에 대인께 호의를 보이신 것이 아닐까 합니다.”

승상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보면 좋겠지만.”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솔직히 말하자면, 마음이 편치 않네.”

추홍이 고개를 들었다.

“소 공이 명예직으로 물러났다고 해서 정치적 숨결까지 거두었다고 생각하는가? 제자들이 조정 곳곳에 있고, 황상께서도 여전히 태사를 신뢰하시지 않는가.”

“그렇습니다만…….”

게다가 그 사람이 거두어 기른 아이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벼슬길에 들었는지 아는가?”

추홍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이 바로 소 태사의 힘이야.”

승상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황에서 도움까지 받았다는 것이…….”

말끝을 흐린 뒤, 자조 섞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소 태사가 이대로 가만히 물러앉을 인물은 아니지 않은가. 기회만 닿으면 다시…….”

“하지만 대인.”

추홍은 부드럽게 반박했다.

“소 태사는 그리 욕심 많은 분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큰 재산을 모으지도 않으셨고, 가문을 다시 일으키려는 기색도 없지 않습니까.”

“재산이나 가문의 부흥에는 관심 없을지 몰라도.”

승상은 추홍을 똑바로 보았다.

명예와 권력만큼은 끝까지 놓지 못할 사람이다.”

추홍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소 태사는 이제 연로하고 후계가 될 아들도 없습니다.”

그는 승상의 표정을 살피며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처럼 가끔 존재감을 보일 뿐, 몇 년째 위험한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시간은 대인의 편입니다.”

승상은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그렇다면 좋겠고.”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가 감돌았다.

“어쨌든 예는 갖춰야겠지. 빚을 진 것도 불편한데, 무례한 모습까지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추홍은 조심스럽게 일어서며 말했다.

“제가 먼저 태사 댁에 들러 대인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다녀오게.”

추홍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고, 승상은 술잔을 비웠다.

등잔 불빛이 일렁였다.


*


노을빛이 마루에 길게 드리운 시간, 영유는 붓을 잡고 있었다.

작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짙은 먹빛이 선지(宣紙) 위에 비뚤비뚤한 획을 그려 놓고는, 끝내 중심을 잃은 듯 옆으로 비슬비슬 기울었다. 붓끝이 종이를 긁었고, 엉성하게 기운 마지막 획은 번져 흐려졌다.

“또 이 모양이네.”

영유는 붓을 툭 내려놓았다. 그 앞엔 ‘和風暖陽’이란 글씨들이 구겨진 채 쌓여 있었고, 낙리는 그것들을 조심스레 모아 정리하고 있었다.

삐뚤빼뚤한 획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연습지를 주워 모으며 낙리는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이 정도면 자신이 처음 붓을 잡았을 때만도 못했다. 이렇게 계속 악필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때, 영유가 종이를 발끝으로 슬쩍 밀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리야. 작은 형이 관직 그만뒀대.”

낙리는 고개를 들며 적당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까? 아직 전해 듣지 못했습니다.”

“추 장사가 와서 말해주었어. 작은 형이, 나랑 큰 형에게 많이 미안하다고 했대. 그래서 조정 일도 그만두고, 집에서 반성하신대.”

낙리는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그러하시군요. 이제 도련님들끼리 사이좋게 지내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종이를 다시 집어드는 낙리의 마음은 냉담했다.

사직을 했다면 시골로라도 보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그대로 황도에 남겨 둔 것을 보면 머지않아 다른 관직을 주어서 다시 조정에 내보낼 생각이리라.

게다가 ‘반성’이라며 집에 머무르게 하면 결국 피해자인 영유와 마주치게 된다.

하지만, 집이 크니까 서로 마주치지 않고도 살 수는 있으려나.

영유는 말없이 낙리의 손을 힐끔 보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일 태사 어르신 댁에 다시 인사드리러 간대. 작은 형 일 도와주셨다고.”

영유는 붓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너도 나랑 같이 가자.”

낙리는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숙여 아무 감정 없이 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승상의 의도는 짐작이 갔다. 또다시 보여주려는 것이다. 자식들끼리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그는 구겨진 선지를 다시 펼쳤다. 손끝에 먹이 묻었다.

영유는 다시 붓을 들었고, 낙리는 아무 말 없이 그 옆에서 뒷정리를 계속했다.




* 군주 앞에서는 자신의 스승이나 부모라도 낮추어 말해야 한다.

군주의 친부모, 선대 군주와 그 정실 후비(后妃), 학문적·종교적 성인(聖人)을 칭할 때는 예외.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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