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저녁 무렵, 하늘은 짙푸른 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낙리는 비틀거리는 영유를 별채까지 부축하며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도련님, 일찍 주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응, 너무 피곤하다.”
영유는 길게 하품을 하였다.
“아, 그런데 리야…….”
“예.”
“뭔가 따뜻한 게 먹고 싶은데, 가져다줄 수 있겠니?”
“곧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별채 주방엔 요즘 사람이 부족해 간단한 간식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못했다. 결국 본채로 가야 했다.
발걸음을 옮기며 낙리는 오늘 하루를 되짚었다.
영유로서는 어른들과 마주하며 예를 갖추어야 했던 터라, 정신적으로도 꽤 지쳤을 것이다.
‘자기 필요할 때만 끌고 다니는 아버지를 위해, 저리도 열심이라니. 정작 그 아버지는 아들이 어떤 얼굴로 곁에 서 있었는지도 모를 텐데.’
*
본채 주방에서 간단한 과자와 따뜻한 차를 받아 나오던 참에, 낙리는 안채 쪽에서 나오는 사람 하나와 마주쳤다.
처음에는 그저 낯선 젊은 남자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다가올수록 어딘가 익숙한 기색이 감돌았다.
걸음이 다가오자, 낙리는 문득 깨달았다.
염온이었다.
바지저고리 위로 흰 도포를 덧입은 단정한 차림. 검은 끈으로 묶어 뒤로 늘어뜨린 머리칼은 두건 아래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걸음걸이는 군더더기 없이 정제되어, 눈길이 그리로 먼저 갔다.
‘……처음에는 저 남장 모습이 어색하다고 느꼈는데.’
지금 눈앞의 염온은, 그저 또래의 평범한 청년처럼 보였다.
‘애초에 여인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렇게 느낀 걸지도.’
염온과 시선이 마주치자, 낙리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아는 척을 해야 할까. 아니면 못 본 척 지나갈까.
망설이던 그때, 염온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혹시……동생 분 때문에 오신 겁니까?”
염온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아닙니다. 안채 마님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왔습니다.”
“그러시군요. 마님께서 직접 부르실 정도면 실력이 훌륭하신 모양입니다.”
낙리의 자연스러운 칭찬에 염온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과찬입니다.”
염온은 겸손하게 웃었다.
“그런데…….”
염온이 시선을 돌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님이 굉장히 무서운 분일 거라고 생각해서 긴장했는데, 오늘 뵈어서는 잘 모르겠더군요.”
낙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 인상, 오래가진 않으실 겁니다.”
“네?”
“마님은 아랫사람들에게는 무자비한 분이 맞으니까요. 조심하세요.”
단호한 목소리에는 경고의 빛이 담겨 있었다.
염온은 낙리의 진심 어린 충고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돈을 받고 하는 일이라서요. 석이가 갑자기 일을 잃는 바람에 슬슬 집안 사정이 빠듯해서……의뢰를 가려서 받기도 어려웠어요.”
그녀는 말끝에 쓴웃음을 얹었다.
“그렇군요……. 그 사고 때문에 참…….”
낙리는 한탄하였다. 염석이 일을 그만두게 된 배경에는 낙리 자신의 지분도 있었기에 다시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놀라지 않네…….’
염온은 낙리의 담담한 반응에 오히려 당황하여 표정이 흔들렸다.
자신이 화공(畵工)으로 일한다고 밝히면 약간은 놀라움이나 의외라는 기색을 보일 것이라 예상했는데, 낙리는 마치 당연한 일인 양 아무렇지 않게 반응하였다.
‘보통은……여자가 그런 일을 한다고 하면 적어도 조금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나?’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스름 속 멀리서 저녁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저는 이만…….”
염온이 먼저 말을 꺼냈다.
“네, 살펴 들어가십시오.”
염온이 떠난 후, 낙리는 별채로 돌아왔다.
영유의 방에서는 잠든 숨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간식을 가져오라고 말하던 건, 까마득히 잊은 듯했다.
낙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준비해 온 과자와 차를 부엌에 내려놓고, 자신의 작은 방으로 갔다.
‘슬슬 나설 시간이군.’
어둠이 완전히 내린 저택 안, 등불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낙리는 고요히 머리끈을 매며 눈매를 다잡았다.
*
강물이 잔잔히 흐르는 소리만이 어둠을 채웠다. 나룻배 위에서 기다리던 낙리는 어둠 너머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원희.”
자신의 자(字)를 부르는 목소리에 낙리는 몸을 굳혔다. 분명 부하를 보낼 줄 알았는데, 낙빈이 직접 나온 것이다.
“위위경께서 친히 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낙리가 정중히 인사하자, 낙빈이 배 위로 발을 옮기며 낮게 웃었다.
“‘친척’을 만나는 자리 아닌가.”
낙빈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눈빛만큼은 찬찬히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위위경과 제가 친척으로 되어있는 것이 오히려 경계를 사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낙리의 신중한 말에도 낙빈은 손사래를 치며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의심할 자는 없을 거네. 나는 가까운 친척도 거의 없고, 그나마 남은 사람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으니까.”
그는 시선을 돌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나. 폭군 치하에서 입바른 소리를 하던 사람들은 먼저 죽었고, 입에 발린 말을 하던 자들은 조금 나중에 죽었다고. 폭군의 의심은 결국 모두를 잡아먹었거든.”
낙빈은 계속 웃으며 가벼운 어조를 유지했다.
“그나마 간신히 살아남은 일류 아첨꾼들도, 폭군이 쫓겨날 때 같이 몰락했지. 그때 나는 그들을 돕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일순 차가워졌다가 이내 온화해졌다.
“오죽하면 족보를 뒤져야 찾을 먼 친척을 골라서 자네를 입양시켰겠나.”
낙리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입양이 아니라 이미 죽은 이들의 족보를 짜깁기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폐주(廢主) 시기를 거치며 망한 가문이 한둘이 아니지. 낙씨 가문도, 승상의 가문도……. 스승님의 가문도 예외는 아니었고.”
낙빈은 잠시 말을 멈추고 물끄러미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과거를 겪고도 아직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자들이 있다는 게 놀랍지 않나.”
그리고는 다시 눈을 들어 낙리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듣자 하니, 황상께서 영 승상을 꾸짖었다더군. 자네도 알고 있었나?”
“아닙니다.”
낙리가 낮게 대답하자 낙빈은 흡족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자네가 잘 도와준 덕이겠지.”
“저는 한 게 없습니다.”
낙리는 담담히 대답했다.
“영 소경이 어리석게 일을 저질렀을 뿐입니다.”
“아니지. 승상이 은밀히 덮지 못하게 내부에서 적당히 키워준 것도 자네 공로였고, 이쪽에 미리 귀띔해 소문이 퍼지게 만든 것도 잘한 일이네.”
낙리의 표정이 흐려졌다.
“아랫사람들 피해가 컸습니다. 그게……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그건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 거다.”
낙빈의 목소리에 안타까움과 냉정함이 겹쳐 들렸다.
“일이 어떻게 흘러가든, 늘 아랫사람들에게 불똥이 튀게 되니까.”
그는 한동안 강물을 바라보다가 다시 낙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네도 알겠지만, 이번 일은 승상에게 꽤 큰 흠이 되었어. 꾸지람을 들었다는 소문은 조정 안팎에 빠르게 퍼질 테지.”
그는 낙리의 눈빛을 읽으려는 듯 한참을 바라보다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기분은……대충 짐작이 가. 요즘 어떤 자들과 얼굴을 마주하는지, 나도 알고 있네.”
낙빈은 말끝을 흐리다 덧붙였다.
“원수들을 태연히 마주하는 것도 모자라, 그 어린애 시중까지 들고 있으니……쉽지 않겠지.”
낙리는 내색 없이 답했다. 준비된 말투였다.
“괜찮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다니, 말은 쉽게 하는군.”
낙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곧 그 웃음을 곧 거두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절대 경거망동하지 마라.”
그의 목소리는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다.
“영 승상은 한두 번 보았을 뿐이고 추홍과도 몇 번 대화한 것이 전부지 않나.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아직 자네가 다 안다고 생각하진 않아.”
“명심하겠습니다.”
낙리는 짧게 대답했다.
낙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영 승상 하나 없앤다고 끝나는 일도 아니다. 알다시피 그에겐 이미 장성한 아들들이 둘이나 있고, 각각 군부와 조정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그를 쓰러뜨려도 곧바로 자리가 채워질 것이야.”
그의 말끝이 낮아졌다.
“그전에 먼저, 그 애와 주위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는 것이 우선이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낙빈이 재차 물었다.
“그 집안 분위기는 어떤가? 아들들에 대한 집안 내 조치는?”
낙리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답했다.
“차남이 형과 동생에게 사과하고 근신 중입니다. 겉으론 고요하지만, 내부 분위기는 어둡습니다.”
“제 형을 모함하고 동생을 해치려 한 놈이 받은 처벌이 고작 그거라니…….”
낙빈의 목소리에는 냉소가 실려 있었다.
“추 장사는 그 아이를 아낀다더니, 항의 한 마디 없었고?”
“예.”
낙리는 수긍했다.
“보면 볼수록 분명해집니다. 추 장사는 그 아이를 ‘승상을 위해’ 아낄 뿐입니다. 충성의 대상이 다르지요.”
말이 끝난 후, 낙리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승상가의 공기 속에는 늘 뿌연 것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낙빈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집안 하나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자가……나라를 제대로 보필할 수 있을까.”
그건 분명 영 승상에 대한 말이었다.
낙빈은 낙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이내 명령했다.
“그래. 이제 돌아가게. 지금은 그 애 곁에 머무는 게, 자네 몫이다.”
낙리는 침묵으로 동의를 표했다
낙빈은 더는 말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낙리는 묵묵히 그를 배웅하였다.
밤공기는 서늘하게 식어 있었고, 낙리의 마음도 그러했다
말없는 강물 위, 달빛이 조용히 부서졌다. 나룻배는 정처 없이 흔들렸다.
*
강가의 서늘한 바람을 뒤로 한 채, 낙빈은 말을 달렸다.
그는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곧장 한 저택으로 향했다. 대문 앞에 다다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하인이 문을 열었다.
말에서 내려 숨을 고르기도 전에, 낙빈은 안으로 발을 옮겼다. 서재로 향하는 길에도 그를 막는 이는 없었다.
서재의 문을 열자 묵향이 공기 속에 엷게 가라앉아 있었다. 방 안에는 소 태사가 홀로 앉아 있었고, 벼루 옆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산수도(山水圖)가 펼쳐져 있었다.
낙빈은 서재 한쪽에 익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손을 씻고 먹을 가는 동안, 짧은 말들로 소 태사에게 낙리와 나눈 대화를 전했다.
소 태사는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하였고, 낙빈도 필요 이상으로 말을 길게 늘어놓지 않았다.
먹을 가는 움직임에 벼루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소 태사는 그 옆에서 여유롭게 붓을 놀리며, 종이 위로 수묵을 번져나가게 했다.
산허리와 구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 원희와는 방금 전까지 이야기하고 왔습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먹을 갈던 낙빈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조심스럽게 보고를 마무리했다.
소 태사는 아무 대답도 없이, 가늘게 흐르는 선 하나를 추가했다. 낙빈은 묵묵히 먹을 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명령대로 얌전히 따르고 있고, 주어진 위치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덧붙였다.
“그 영유라는 아이에게……어쩌면, 동정심 같은 것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 애를 완전히 외면하거나, 증오하는 눈빛은 아니었습니다.”
그제야 소 태사의 손이 멈췄다. 붓끝이 허공에서 아주 짧게 머문 후, 그는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마치 아무 뜻도 담지 않은 듯 가볍게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낙빈의 귓가엔 오래 남았다.
“그 아이는 영 승상의 아들입니다. 원희가 증오하는 원수의 피를 그대로 이은 존재 아닙니까. 게다가…….”
“그렇지만 그 애는 아무것도 모르지 않나.”
소 태사의 차분한 목소리가 낙빈의 말을 끊었다.
“어른들의 죄가 어떻든……그저, 죄 없는 아이일 뿐이지. 그런 애한테 악감정을 가지는 건,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이지.”
“하지만 그렇다면……곤란한 일 아닙니까. 원희가 마음을 흐리면…….”
“막내 공자가 올해 몇 살이지?”
소 태사는 붓을 내려놓고 손을 닦으며 물었다. 낙빈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열한 살인가, 열두 살인가 할 겁니다.”
소 태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면 몇 년 후면 더 이상 애도 아니겠군. 한 삼사 년 후라면 벼슬자리를 준비하며 고관들 사이를 오갈 나이가 되겠지. 그러고 보니, 원희가 우리 앞에서 승상가에 대한 원한을 말하며 이를 갈던 것이 열다섯 살이었지?”
그는 시선을 들지 않은 채, 조용히 말했다.
“그때가 되어도……원희가 여전히 그 애를 동정할까?”
낙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이 멈춘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소 태사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 밝은 웃음은 아니었지만, 나쁘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하기야 알 수 없겠지.”
“?”
“사람 마음이란 게 참 묘하다. 거짓으로 시작한 일도, 겉으로나마 오래 하면 진심이 되지. 곁에 머물며 줄곧 잘해주다 보면, 처음엔 흉내였던 감정이 엉뚱한 데로 흘러가는 법이지.”
낙빈은 고개를 저었다.
“……전 아마, 그러진 못할 겁니다.”
소 태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붓을 들어, 구름 아래 덧그린 산등성이를 천천히 메워나갔다.
다시, 서재에는 묵향과 벼루 위 규칙적인 마찰음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