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來不似春 :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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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 앉아 두꺼운 고서(古書)를 필사하던 소(蘇) 태사(太師)는 하인의 다급한 전갈에 붓을 내려놓았다.
“승상 대인께서 방문하셨습니다.”
객당(客堂) 앞까지 나선 그는, 하인들과 함께 들어서는 영 승상과 그 곁의 어린 소년을 보았다.
“어서 오시지요.”
“갑작스레 찾아뵙게 되어 송구합니다. “
자수 없는 흑색 비단포(袍)를 걸친 영 승상은, 평소보다 수척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절제된 차림새가, 그 방문의 무게를 말해주었다.
“무슨 말씀을. 언제든 오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까.”
소 태사는 걸음을 옮겼다. 해묵은 먹빛이 스민 심의(深衣)의 소맷자락이 천천히 흔들렸다. 잿빛 소매 끝에 깃든 고요한 기운은, 그의 성품처럼 깊고 무거웠다.
그때, 소년이 앞으로 나서서, 단정히 두 손을 모아 예를 올렸다.
“태사공(太師公)께 문안 올립니다. 영유라고 합니다.”
소 태사는 잠시 아이를 바라보았다. 흐트러짐 없는 예법과 또렷한 목소리가 어린아이답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의젓함이 남다르군요. 앞날이 기대됩니다.”
칭찬에 영유는 입 꼬리를 살짝 올렸다. 영 승상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스치는 듯했지만, 곧 근심 어린 표정으로 돌아왔다.
“안으로 드시지요.”
소 태사의 권유에 영 승상이 아들에게 말했다.
“어른들끼리 나눌 말이 있으니 잠시 물러나 있어라.”
영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 태사는 하인에게 일렀다.
“도련님을 후원(後園) 정자로 모셔라. 마침 꽃이 피기 시작하여 경치가 아주 좋을 것이다.”
영유는 다시금 정중히 인사하고 하인을 따라 자리를 떴다. 그제야 두 사람은 객당 안으로 들어섰다.
*
은은한 향이 감도는 객당 안, 탁상 위에는 김이 오르는 차주전자과 찻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소 태사는 자리에 앉으며 맞은편을 권했다.
영 승상은 자리에 앉고도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입가에 맴도는 말이 있는 듯했으나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소 태사는 그런 그를 모른 척하며 묵묵히 차를 따랐다.
“요즘 그림에 심취하고 있는데, 실력이 제법 늘었다고 생각합니다. 승상께도 한 폭 보여드리고 싶군요.”
“……그러시군요.”
“또 바둑도 한 판 두어야지요. 지난번에 끝맺지 못한 판이 아직도 마음에 걸립니다.”
영 승상은 고개를 끄덕일 뿐, 입술은 여전히 굳게 다문 채였다.
소 태사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 차는 황상(皇上)께서 하사하신 것입니다. 향이 참으로 그윽하지요.”
‘황상’라는 말이 언급되자, 영 승상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실은 드릴 말씀이 있어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소 태사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얼마 전, 황상께서 저를 따로 부르셨습니다.”
그 말에도 소 태사의 표정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다만 그의 손가락이 찻잔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어루만질 뿐이었다.
“저의……둘째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궁 안에 까지 퍼졌다고 하시더군요.”
영 승상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소 태사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문이 사실이기에, 더욱 안타깝습니다.”
영 승상의 안색이 굳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집안 내의 불화였을 뿐입니다.”
소 태사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빙긋 웃었다.
“다툼이 있다고 다들 음모를 꾸며 모함을 하지는 않지요. 그것도 가족 간에.”
영 승상은 한숨을 쉬었다.
“……집안일이니 조용히 수습하려 하였으나, 입은 막는다고 막히는 것이 아니더군요.”
소 태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을 열었다. 눈길은 찻잔에 머물렀으나, 말끝은 살짝 비틀렸다.
“차남은 아직 젊은데, 관직이 제법 높지 않던가요. 자리가 사람을 만들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영 승상의 손이 찻잔 옆에서 잠시 떨렸다.
“황상께서……사실 여부를 물으시더군요. 그리고 ‘책임을 묻겠다’는 말을 남기셨습니다. 허나……아직 젊은 아이를 단번에 내치는 것은 너무 빠른 결단이 아니겠습니까. 아직 그릇이 덜 된 것뿐이지, 기회를 잃어서는…….”
소 태사는 손을 멈추었다. 허공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묘한 연민과 냉기가 뒤섞여 있었다.
“이 나이쯤 되면 알게 됩니다. 피붙이라는 것은 아무리 미련한 짓을 해도……이상하리만큼 감싸게 되지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속삭이듯 덧붙였다.
“승상 역시 그러하시군요. 평소엔 그리 냉철한 분이…….”
영 승상은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수치인지, 분노인지, 혹은 무력감인지……소 태사는 굳이 알려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면……혹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으신지요?”
영 승상은 눈빛을 낮추었다.
“태사께서 조심스레 황상의 뜻을 한번 가늠해 주실 수 있을까 하여……. 그 아이는 근신시키겠습니다. 다만 스스로 물러나는 형식으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그래야……기회가 남겠지요.”
소 태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몸을 약간 기울이며 향이 묻은 차 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그 손놀림은 느리고, 담담하고, 익숙했다.
“저에게 아직 그런 힘이 남아 있을지. 이제는 그저 집에서 소일거리나 하는 늙은이일 뿐인데요.”
그러나 그 말속엔 어딘지 모르게 힘이 스며 있었다.
*
긴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말없이 객당을 나섰다. 정자까지 이어진 뜰에는 봄꽃이 막 피기 시작해, 은근한 향이 번졌다.
소 태사는 잠시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오늘, 막내 공자를 함께 데리고 오신 것은……무슨 뜻이십니까?”
영 승상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막내가 태사께 꼭 한 번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하더군요. 아이를 굳이 막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린 것이겠지요.”
소 태사는 짧게 웃었다.
‘어린아이까지 데려와서, 집안이 여전히 평온하다는 것을 보이고 싶었던 것이겠지. 나에게……아니, 황상께.’
그는 쉬었던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차남 문제로 마음이 무거우신 건 압니다. 하지만 그만큼……막내 아드님의 마음에도 눈을 돌리셔야 합니다.”
영 승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벼운 바람 속에서 침묵은 오히려 무거웠다.
소 태사도 더는 묻지 않았다.
정자에 이르자, 영유는 이미 그 앞 정원에서 한 청년과 함께 놀고 있었다.
정중했던 예법은 온데간데없고, 바람결 따라 이리저리 뛰며 새를 쫓는 모습은 누구보다도 아이 같았다.
“찾았다, 리야! 거기 나뭇가지에 있었어!”
“도련님, 그건 나뭇잎입니다…….”
청년은 쩔쩔매며 따라가고, 영유는 웃으며 저만치로 뛰어갔다.
아이의 얼굴에 깃든 생기가, 막 익어가는 봄날처럼 따스했다.
소 태사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 희미하게 웃었다.
정자 근처로 소 태사와 영 승상이 함께 걸어오자, 영유는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한껏 뛰놀고 난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지만, 이내 자세를 단정히 가다듬었다.
“태사공, 아버님과 좋은 말씀 나누셨습니까? 정원이 참으로 아름다워서, 즐겁게 기다렸습니다.”
공손한 말씨였지만, 어린 얼굴엔 뛰놀던 기색이 아직 가시지 않아 미소가 번졌다. 소 태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답했다.
“대화는 잘 나누었네. 좋은 시간을 보냈다니, 나도 기쁘군.”
영유는 안도한 듯 미소 지었다.
“시간 나면 종종 놀러 와도 되네.”
“예. 감사합니다.”
그때 영 승상이 말했다.
“그만 돌아가자.”
그는 아들에게 이르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영유가 영 승상의 뒤를 따라가려 하는데, 정자 뒤편의 길에서 느릿한 발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붉은 관복 차림의 중년 관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소 태사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스승님께 인사 올립니다.”
“위위경인가.”
소 태사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낙빈은 시선을 정자 쪽으로 돌리며 말을 이었다.
“조금 전 들렀으나, 스승님과 승상 대인께서 말씀을 나누고 계시다 들어서, 잠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영유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호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분은 누구시지?”
호위 중 한 명이 영유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와 귓속말했고 영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유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낙빈은 아는 척을 하였다.
“승상 대인의 아드님이시군요. 낙빈이라고 합니다.”
“네, 영유라고 합니다.”
영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가볍게 묵례를 한 낙빈은 곧바로 영유의 호위 한 명에게 다가가 작게 물었다.
“이전에 추 장사에게 들었는데, 막내 도련님의 곁에 나와 성(姓)이 같은 이가 있다 하더군.”
호위는 머뭇거리며 낙리를 바라보았다. 낙리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허리를 숙였다.
“낙리라 합니다. 자(字)는 원희(遠睎)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영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야, 자가 있었어?”
낙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낙빈은 곧바로 낙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 고향은 어디지? 음, 그러면 아무래도 친척이겠군, 꽤 멀긴 해도. 부모님 함자(銜字)는…….”
영유는 낙빈이 낙리를 붙들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혹시라도 괴롭힘 당하는 건 아닐까, 은근슬쩍 낙리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낙리는 태연하면서도 예의를 잃지 않는 모습으로 조심스레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낙빈이 꼬리를 이어가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와중, 분위기를 끊듯 영 승상의 발걸음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뒤처진 아들을 데리러 온 듯했다. 낙빈은 곧 자세를 고쳐 잡고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승상대인, 뵙습니다.”
영 승상은 짧은 눈길만 준 채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뿐, 별다른 응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소 태사에게만 다시 한번 가볍게 인사한 뒤, 더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영 승상의 뒷모습이 멀어지자, 소 태사는 잠시 그쪽을 바라보다 낙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서재로 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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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태사는 낙빈을 이끌어 서재로 들어섰다. 방 안은 고요하고 단정했지만, 책상 위에 책들이 어수선하게 놓여 있었다. 소 태사는 그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까 승상과 잠시 이야기했네. 말은 아꼈지만 안색이 좋지 않더군. 아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했어.”
낙빈은 소 태사 옆으로 다가가 책 몇 권을 집어 들었다.
“뭐, 그럴 만도 합니다…….”
소 태사는 손을 멈추고 낙빈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승상가 내부에서는 그 일을 어떻게 정리한 것인지 모르겠군.”
낙빈은 책을 가지런히 놓으며 살짝 웃었다.
“저도 자세한 사정은 아직 모릅니다. 안에서 단속이 꽤 심하더군요. 그래도, 무언가 소식이 있겠지요. ‘새로 생긴 친척’에게 알아봐야겠네요.”
소 태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다. 마지막 책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의자에 앉더니, 잠시의 정적 이후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승상이 부탁을 하나 하더군. 자네 의견을 듣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