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추(悲秋) 1

by 몽중몽
悲秋 : 슬픈 가을. 두보(杜甫)의 시 제목에서 유래


*


닫힌 창호문 너머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었으나, 방 안은 여전히 어스름했다.

낙리는 방문과 창문이 모두 닫힌 방 안에서 염온과 마주 앉아 있었다.

“무슨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고 이러십니까?”

낙리는 농담조로 말했으나, 목소리 끝에는 미약한 불안이 배어 있었다.

염온은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일전에 그림을 그리려고 지인의 집에 찾아갔습니다. 그 집 나무에 동박새가 둥지를 틀고 있어서요.”

“네.”

“그런데 그 친구에게서 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동백꽃과 동박새에 관한 설화였지요.”

염온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어떤 폭군과 그에게 희생된 부자(父子)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염온은 말하며 낙리를 조용히 관찰했다.

순간 낙리의 몸이 굳었다. 하지만 그는 애써 자세를 바로 했다.

“낙 선생께서도 알고 있으신가요?”

낙리는 일순 침묵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동백나무가 되고, 아들들은 동박새가 되었다는……설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낙리는 느리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 아픈 이야기지요.”

“저는 그 설화를 듣고 조금 무서웠습니다.”

염온의 말에 낙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에 나오는 두 형제……때문에요.”

“어떤……형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궁으로 불려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아이들을 말합니다.”

낙리의 눈빛이 흔들렸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아……. 그런 내용도 있었지요.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요.”

“중요하지 않지요.”

염온은 수긍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여전히 낙리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죽고 나서 꽃이나 새가 되었다는 언급도 없으니까요.”

염온은 계속 말을 이었다.

“설화의 핵심은, 억울하게 죽은 왕제(王弟)와 그 아들들이 새로운 삶을 얻었다는 것이지요. 양자들이 대신 죽었다는 부분은……그저 왕제가 자식들을 숨겼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염온은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그런데 왜 굳이 대역이 죽었다는 사실을 암시했을까요?”

“…….”

“그리고 그렇게 희생된 대역들에 대해서는 결말까지 아무런 언급이 없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염온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니, 어쩐지 현실에도 있었을 법한 내용 같아서 무서웠습니다.”

“그렇네요.”

무릎 위에 얹힌 낙리의 손이 살짝 떨렸다.

“그리고……. 대역이었던 두 아이들에게도 가족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당연히 있었겠지요.”

이윽고 입을 연 낙리의 대답은 겨우 들릴 정도로 작았다.

“……만약에 그 가족들이 동백나무와 동박새를 본다면 어떤 심정일까요?”

낙리의 입술이 떨렸다. 그는 입을 열려다 다물었다.

“가슴 아프겠지요.”

염온이 스스로 답했다.

“고귀한 아버지를 두지 못한 죄로 무고하게 희생되고, 더 이상 언급조차 되지 않는 가여운 아이들. 그들의 가족은 피눈물을 흘렸을 겁니다.”

낙리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대역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존재들을 보며…….”

염온은 말을 멈췄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분노하지 않았을까요?”

방안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낙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염온이 다시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낙리의 표정은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군요.”

염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녀는 한숨처럼 작게 말했다.

“이야기를 하나 더 들려 드리겠습니다.”

“…….”

“오래전에, 승상가의 막내 도련님이 죽을 뻔한 그 사건 말입니다.”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때 추 장사와 그 친구가 목숨을 걸고 연기를 하여 관군을 속였다고 하지요. 친구는 미끼가 되어 희생되었고, 추 장사는 자기 친구를 밀고한 배신자의 오명을 뒤집어쓰면서까지 도련님을 지켜 냈다고 들었습니다.”

“……꽤 알려진 미담이지요.”

낙리가 대답했다. 입가가 비틀어지듯 움직였다. 웃음이 아니었다.

“참으로 감동받을 만한 충성심입니다.”

“그런데요.”

염온이 말했다.

“그 연극으로 관군들이 속은 이유는.”

그녀는 잠시 숨을 삼켰다.

“정말로……죽였기 때문이었겠지요. 도망자와, 그 품에 안긴 아기를. 그래서 더 이상의 수색을 멈추었겠지요?”

낙리는 주먹을 쥐었다. 꽉 쥔 주먹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그러면, 그 아기는 누구였을까요.”

낙리가 입술을 깨무는 것을 보며 염온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가족들은……기꺼이 아기를 내주었을까요? 만일 내주지 않으려 했다면…….”

낙리의 주먹이 더욱 굳게 쥐어졌다.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었지만, 그는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의 턱이 떨렸다.

“이전에 말씀하셨지요.”

염온의 목소리는 더 이상 담담하지 않았다.

“선생께서는, 동백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잊지 않을 것이 있다고.”

낙리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낙 선생이 막내 도련님을 구하셨을 때, 저는 당신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염온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었다. 너무나 터무니없었으니까.

어린아이를, 자신이 구해 낸 소년을 보며 드러낼 리 없는 감정.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살의(殺意)였다

“그때 선생의 눈빛은…….”

“그만하세요.”

마침내 낙리가 입을 열었다.

그는 염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무너지기 직전의 성벽처럼 금이 가 있었다.

정적이 흘렀다.

“……그래서.”

목소리가 갈라졌다.

“제가 그 대역의 가족이라는 말입니까?”

염온은 낙리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만약 제가 틀렸다면……정말 죄송합니다.”

염온의 목소리가 떨렸다.

“무례를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염온을 향하던 낙리의 눈이 천천히 비껴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닫힌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가을빛이 그의 얼굴 위로 흘렀다.


*


낙리가 떠나간 후, 염온은 홀로 방 안에 앉아 있었다.

바닥과 낮은 상 위에는 그림들이 흩어져 있었다.

목탄으로 거칠게 그린 밑그림들.

검은 선으로만 남은 꽃과 새의 형상들이 서로 겹치고, 지워지고, 또다시 그려져 있었다.

어떤 것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문질러져 있었고, 어떤 것은 지나치도록 또렷했다.

염온은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전에 그린 동박새 그림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그림 위에 머물러 있었으나, 사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듯했다.

밖에서 가벼운 헛기침 소리가 들리자 염온은 고개를 들었다.

“누나?”

문이 살짝 열리며 염석이 슬그머니 방 안을 살폈다.

들어가도 되려나?”

염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은 바닥의 그림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낙리랑……무슨 대화를 그렇게 오래 했어?”

그는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나가는데, 얼굴이 안 좋더라. 좀 멍한 것 같기도 하고.”

“……나중에 말해 줄게.”

“누나도 얼굴이 좋지 않아.”

염석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두 사람 사이에 문제라도 생긴 거야?”

“아니.”

염온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직은? 그게 무슨…….”

염석이 눈을 크게 떴다.

“괜찮아.”

염온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짧게 답했다.

그러나 마음속은 복잡하였다.

‘오늘 그에게 물은 것은 옳았을까.’

염온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니, 애초에……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을까.’

그녀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으로 다가가 천천히 밀어 열었다.

창호문이 열리자 동백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짙푸른 잎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염온은 물끄러미 나무를 바라보았다.

동백나무는 아직 꽃을 피우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붉게 물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


서늘한 바람이 낙엽을 날리며 스쳐 지나갔다.

해가 높이 떠 있었으나, 스산한 기운에 행인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낙리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걸음은 일정했지만, 그의 눈은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허공을 헤맸다.

‘……어쩌면 오늘과 같은 날이 올 줄 알았어야 했지.’

자신의 과거에 대한 단서를 흘렸을 때부터,

낙리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었다.

스스로도 의아했다.

‘왜 나는 바로 거절하지 못했을까?’

낙리는 멈춰 섰다.

염온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끝까지 가실 것입니까?”

염온이 물었다.

낙리는 답하지 않았다.

“제가 감히 당신의 고통을 모두 이해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염온은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지금 가시고 있는 길이 얼마나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길이 될지는 짐작합니다. 낙 선생께서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멈출 수는……없습니까?”

한참의 침묵 끝에 낙리는 답했다.

“……시간을 주십시오.”

염온은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당장은……답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하다고, 멈출 수 없다고, 이미 늦었다고.

당연히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

‘그런데 왜…….’

낙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염온의 얼굴이 떠올랐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붙잡으려 했던 그 얼굴이.

‘만약, 정말로 만약에…….’

낙리는 생각의 끝을 맺을 수 없었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다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발밑에서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바람이 재촉하듯 등을 밀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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