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은 아침 햇살이 초가지붕에 내려앉았다.
낙리는 벽에 걸린 청회색 포(袍)를 집어 들었다. 옷깃을 여미는데, 밖에서 짧고 날카로운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왜 저러지…….”
낙리는 미간을 좁히며 방문을 열었다. 마당 쪽으로 걸어 나가자, 대문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게 기세만은 대단하구나.”
염온이 문 앞에 서있고 그 앞에서 작은 개가 짖어대는 중이었다.
낙리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염온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낙 선생, 실례가 많습니다. 아침부터 찾아뵈어서.”
“아닙니다. 들어오시지요.”
염온은 안으로 들어섰다. 강아지는 마당을 맴돌며 여전히 그녀를 향해 짖었다.
하지만 염온이 품에서 배추 조각 몇 개를 꺼내 바닥에 놓자, 강아지는 냄새를 맡더니 이내 조용히 입을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너 집 지켜야지……. 누님은 괜찮지만.”
낙리는 짐짓 한숨을 쉬었고 염온은 작게 웃었다.
염온이 강아지의 긴 털을 쓰다듬는 동안, 낙리가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 그 그림…….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날은 날이 늦어 제대로 인사도 드리지 못했어요.”
“제가 제대로 고친 것인지 모르겠군요.”
“누님 덕에 그림이 훨씬 살아났습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염온이 고개를 들어 낙리를 보았다. 낙리는 잠시 뜸을 들이다 물었다.
“그런데……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염온은 강아지를 한 번 더 쓰다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낙 선생께 여쭤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혹시……지금 시간이 괜찮으신지요?”
낙리는 난처한 얼굴로 답했다.
“그게……오늘은 도련님께서 아침부터 부르셔서……지금은 나가 봐야 합니다.”
“아.”
염온이 잠깐 생각하는 듯 하더니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은 어떠신지요? 가능하시면 우리 집으로 와 주실 수 있을까요?”
“시간은……됩니다만.”
낙리는 망설이다 반문했다.
“지금 여기서 말씀해 주시면 안 되는 이야기인가요?”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아서요.”
염온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눈빛은 무언가를 살피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낙리의 목소리에 불안이 스쳤다. 염온은 한동안 입을 다물고 생각하는 듯했다.
강아지가 발밑에서 배추를 씹는 소리만이 마당에 울렸다.
“이전에 낙 선생이 제게 들려주셨던 이야기 있지요. 그 일에 관해서예요.”
염온의 대답에, 낙리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하지만 그는 곧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알겠습니다, 누님. 그러면 내일 정오 전에 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염온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대문 쪽으로 돌아섰다. 강아지는 여전히 배추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대문이 닫혔다.
낙리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찬바람이 옷자락을 스쳐 지나갔다.
*
화려하지는 않으나 고급스러운 안목을 드러내는 가구들 사이, 창가를 마주한 서안(書案) 앞에서 영유는 부지런히 붓을 놀리는 중이었다.
그의 곁에는 낙리가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의 글을 지켜보고 있었다.
영유는 한 장 가득 글을 채운 후, 붓을 내려놓았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먹이 묻은 손을 들여다보는 그의 표정에는 미묘한 불만족이 서려 있었다.
“이번에도 선생님께 또 잔소리를 듣겠지?”
그가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리야, 네 눈에는 내 글씨가 어때?”
낙리는 서안 위로 몸을 숙여 영유가 쓴 글씨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괜찮으신데요, 도련님.”
“괜찮다고? 그래서 선생님이 매일 잔소리를 하시나 보지.”
영유는 종이를 옆으로 밀어내며 투덜거렸다.
낙리는 빙그레 웃었다.
“무난한 수준에 만족하시면 안 되지요. 이제 어른이 아니십니까. 내년에는 혼례도 치르고 관직에 오르실 몸이신데, 그리고 승상 대인의 아드님께서는 남들과 달라야지요.”
영유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흥. 너와는 다르지.”
그리고 곧바로 덧붙였다.
“나는 너처럼 그렇게 공부를 잘하지는 못하니까.”
낙리는 시선을 살짝 낮추며 정중하게 말했다.
“도련님께서는 총명하시니, 마음만 제대로 잡고 공부하시면 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큰 성과를 이루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말은 잘한다, 참.”
영유는 빙긋 웃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불만스러운 기색이 사라져 있었다.
붓을 정리하던 낙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련님, 내년에 어떤 부서로 들어가실지 정해졌습니까?”
영유는 자신이 쓴 글씨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심하게 대답했다.
“아버님 말씀이, 병부(兵部)로 갈 것 같다고 하시더라.”
낙리는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잠시 입을 열 듯 하다, 다시 다물었다.
영유가 눈을 들자, 낙리는 그제야 말했다.
“소문으로만 들은 것입니다만……. 병부상서께서, 승상 대인과의 사이가 그다지 원만하시지는 않은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렇지.”
영유는 고개를 끄떡였다.
“나도 그게 걱정돼서 아버지께 여쭤봤어. 그런데 괜찮다고 하시더라. 그리고 작년에 들어온 식객 두 사람, 나와 함께 병부로 들어가게 될 거라고 하셨어.”
영유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너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낙리는 그 말을 듣고 부드럽게 웃었다.
“내년에 제가 반드시 합격하여, 병부로 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영유는 고개를 저으며 짓궂게 웃었다.
“아니, 그러면 네가 내 상관이 될 수도 있잖아. 그것은 싫어.”
장난스럽게 말한 영유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났다는 듯 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내 혼사, 상복을 벗자마자 바로 진행할 줄 알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에 살짝 불안이 스쳤다.
“어째서인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하더라.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낙리는 붓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슬쩍 눈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자연히 풀리겠지요.”
그 이유를 알고는 있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리야, 그런데……너, 낙 상서와는 먼 친척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영유가 화제를 돌리듯 묻자, 낙리는 태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십 대조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야 이어지는 관계라고 들었습니다. 사실……예전에 추 장사께서 말씀해주시기 전까지는, 그 분이 저와 성이 같다는 것조차 몰랐습니다.”
영유는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가까운 친척이라 해도, 그 분이 너를 도와줄 일은 없겠지. 괜찮아. 앞으로 내가 많이 도와줄 수 있으니까.”
영유는 웃으며 낙리의 어깨를 가볍게 톡 쳤다. 평소 하던 장난스러운 동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낙리는 고개를 숙이고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책장을 넘기는 사이, 창밖으로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이 지나갔다.
낙리는 그것을 바라보다, 다시 영유가 쓴 글씨로 시선을 내렸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먹이,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
서재를 나오자 어느새 비스듬히 누운 햇살이 눈을 찔렀다.
영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친구를 만나러 외출하려던 계획이 무산된 탓이었다.
“리야, 너 말이지. 굳이 사실대로 말할 필요가 있었어……?”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낙리가 책을 안고 뒤따르며 부드럽게 말했다.
“외출 약속이 있으시다 했으니,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선생님 말씀이 옳습니다. 아직 상중이시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선생의 말과 다르지 않았다.
영유가 다시 한숨을 내쉬려던 때, 정원 모퉁이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영유의 걸음이 멈췄다.
영사였다.
그의 매무시는 여전히 깔끔했으나,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다.
영유의 어깨가 순간 굳었다. 소년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형님.”
낙리도 허리를 굽혔다
영사는 인상을 찌푸린 채, 마치 두 사람을 보지 못한 듯 스쳐 지나가려 했다.
그러나 두어 걸음 가다 멈춰 섰다.
“유야.”
그가 뒤돌아섰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듣자하니, 네 혼사가 지체되고 있다더구나. 무슨 이유인지 들었느냐?”
영유는 잠시 멈칫하였지만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직 상중이라……혼사를 본격적으로 논하기가…….”
“그런 게 아니다.”
영사가 영유의 말을 잘랐다. 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듣자하니 상대 가문에서 서자(庶子)를 탐탁지 않아 하는 모양이더구나.”
영유의 숨이 멎었다.
“혼담이 오가는 규수는 그 집안의 적녀(嫡女) 아니더냐. 내키지 않을 만도 하지.”
영유는 눈을 크게 떴다가, 금세 표정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형님……저희 형제 모두 마님 소생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쪽에서도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제 출신을.”
영유는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복상이 끝나고 제가 출사(出仕)하면……상황이 나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서로 예를 다해 진행하면 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영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영유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차가운 시선이었다.
그리고 말없이 시선을 거두었다.
잠시의 정적 후, 영유는 정중하게 말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래.”
영사는 짧게 내뱉고는 먼저 걸음을 돌렸다.
그의 등이, 순간 영유보다 더 작아 보였다.
하지만 영유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영사가 멀어지자, 영유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걸음을 옮기는 그의 어깨가 약간 처져 있었다.
낙리는 묵묵히 뒤를 따랐다.
‘혼사가 늦어지는 이유를……둘째 공자가 모를 리 없건만.’
상대 집안은 여전히 가늠하고 있었다. 영유가 과연 가문을 이을 수 있을 것인지.
“나는 괜찮아.”
한참을 걷던 영유가 입을 열었다.
“그저……형님이 나를 미워하시는 것 같아서.”
말끝이 흐려졌다.
“그래도…….”
영유는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려 했다.
“형님도 사정이 있으실 거야.”
영유는 웃으려 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가, 금세 내려왔다.
“……그렇겠지?”
낙리는 영유의 손끝이 미미하게 떨리는 것을 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영사가 사라진 모퉁이가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은, 적어도 형을 죽이지는 않았다.
‘둘째 공자가 억울할 것은 없겠지. 예전에 동생을 해치려 한 일은 그냥 넘어갔으니.’
그는 숨을 깊이 들이켰다.
‘게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이 소년도 사실은…….’
낙리는 생각을 멈췄다.
하지만 가슴속에 내려앉은 납덩이는 가벼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숨을 쉴 때마다 더 무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낙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바람이 정원을 스쳐 지나가며, 낙엽 한 장을 영유의 발밑으로 굴렸다.
영유가 그것을 밟고 지나갔다. 바스락, 소리가 났다.
*
다음 날 아침.
가을 햇살이 낮게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바람이 헝겊 발을 흔들며 서늘한 기운을 들여왔다.
낙리는 방 안 한쪽에 단정히 앉아 있었고, 염온은 그 맞은편에 앉아 차를 따라 그의 앞에 밀어 두었다.
“막내 도련님께서 힘드시겠습니다.”
염온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나저나 둘째 도련님이 동생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건, 그리 현명한 행동이 아닐 텐데요.”
낙리는 찻잔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는 잠시 후 덧붙였다.
“그런데 이해는 됩니다. 억울하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염온이 낙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억울할 것도 없지 않나요?”
낙리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말했다.
“어쨌든, 둘째 공자가 또 무슨 일을 벌이지 않을까……그게 걱정입니다.”
“낙 선생.”
염온이 말했다.
“도련님을……많이 생각하시네요. 충성심이라기보다……정(情) 같은 것 느껴집니다.”
낙리는 계속 창밖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제 자리에서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염온은 그저 말없이 낙리를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확인하듯.
침묵이 길어졌다. 낙리가 견디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런데……저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네.”
염온은 짧게 답하고는, 천천히 일어났다.
낙리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갔다.
염온이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닫았다.
달칵.
작은 소리와 함께 방 안이 갑자기 고요해졌다.
낙리의 눈이 커졌다. 그는 염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염온이 돌아와 다시 앉았다. 그녀는 낙리를 똑바로 보며 낮고 조심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옛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그녀의 눈은 낙리를 향해 고정되었다.
방 안의 공기가 천천히, 그러나 깊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