草木黃落 : 초목의 잎이 누렇게 물들어 떨어진다는 뜻으로 가을철을 이르는 말.
*
노을빛이 사그라질 무렵, 염온이 대문을 들어섰다. 마당 한쪽에 쌓인 낙엽이 서늘한 바람에 몇 개 굴러갔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선 염온은 보자기를 내려놓고, 바닥에 조심스럽게 화구(畵具)들을 펼쳐 정리하였다.
그리고 종이 한 장을 꺼내 펼쳤다.
종이 위에는 옅은 목탄으로 그려진 동백꽃과 작은 동박새 한 마리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염온은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거꾸로 매달린 동박새의 날개 모양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낙리가 바라는 ‘무언가’를 제대로 담아냈는가 하는 점이었다.
“누나, 이제 왔어? 늦게까지 어디 다녀왔어?”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염온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언제 문을 연 건지, 염석이 방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응. 새 구경하느라 친구 집에 좀 다녀왔어.”
“친구? 어느 친구?”
염석이 안으로 들어서며 고개를 갸웃했다.
“재작년에 윗마을로 시집간 친구. 정이라고.”
염석은 방 한쪽에 편히 앉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아……그 친구? 내가 혼인잔치에 갔었잖아. 누나보다 두 살 어렸지?”
“맞아.”
“걔가 시집간 지 이 년이나 됐네. 누나도 슬슬 좋은 인연 만나야 할 텐데. 그러니까…….”
“걱정 마, 알아서 잘할게.”
염온이 픽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 집 마당에 감나무가 있거든. 거기에 동박새가 둥지를 틀었더라고. 정이가 괜찮다고 해서 거기서 그림까지 그리고 왔어.”
염석은 펼쳐 놓은 목탄화를 힐끗 보았다.
“또 새 그림 그려달라는 손님이 있는 거야?”
“아니. 그냥 부탁받은 일이야.”
염온은 그림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왜 그래?”
염석이 누나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정이와 이야기를 하다가……. 동백나무와 동박새에 관한 설화를 들었는데 말이지…….”
“설화?”
염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의 조각들을 맞추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옛날에……한 나라에 폭군이 있었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방 안에 잔잔히 퍼졌다.
*
낙리는 자신의 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
창밖에서는 바람이 일어 낙엽을 흩뿌렸고, 방 안에서는 등불이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벽에 걸린 족자로 향했다
낮에 염온에게서 돌려받은 그림은 아직도 묵향을 풍기는 듯했다.
짙은 먹으로 단정하게 그려진 동백나무.
그 아래 은은하게 번진 여백.
그 고요한 먹빛 사이로 두 가지 색만 또렷하게 살아 있었다.
붉은빛을 머금은 동백꽃과 초록빛 동박새 한 마리.
가느다란 가지에 거꾸로 매달린 동박새는,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새의 눈망울은 작은 점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안에 깃든 생기는 그림 전체를 다시 살아 숨 쉬게 하였다.
낙리는 그림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가갔다.
그림에 손을 뻗어, 여백을 따라 손끝을 미끄러뜨렸다.
동박새의 작은 눈망울이 낙리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낙리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때 소 공께서는 왜…….’
올해 초 그 정원의 풍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소 태사의 저택을 찾았던 그날, 낙리는 영유의 곁에서 묵묵히 서 있었다.
영유가 소 태사를 향해 공손히 인사하며 말했다.
“아직 상중이라 명절 인사는 삼갔습니다만, 평안하신 지 여쭙고자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찾아준 것만으로도 기쁘네.”
몇 마디의 대화가 이어지고, 소 태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영유에게 말했다.
“후원(後園)에 요사이 꽃이 피기 시작했지.”
그리고 셋은 정원 쪽으로 향했다.
소 태사의 정원에는 아직 이른 봄의 쌀쌀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한쪽의 흰 동백들은 이미 촉촉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꽃이로군요.”
영유가 동백나무 앞에 멈춰 서서 감탄하자 소 태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가 드니 화려한 색보다는 이렇게 소박한 색을 즐기게 되더군. 붉은 동백도 좋지만, 흰 동백은 청아하지 않은가.”
낙리는 영유의 뒤에서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네.”
소 태사가 동백꽃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동백꽃에 얽힌 설화가 있다네.”
그가 잠시 꽃을 쓰다듬었다.
“내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태사의 시선이 낙리에게로 향했다.
“어느 왕과 그 동생에 대한 이야기였지.”
잔잔한 미소와 달리 의미심장한 눈빛이었다.
“자네는 아는가?”
‘왜 나에게 묻는 거지?’
그는 소 태사의 눈빛 속에 담긴 무언가를 읽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영유가 고개를 돌려 낙리를 바라보았다.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낙리는 가슴이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천천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나라에 포악한 왕이 있었는데, 자신과 달리 선량한 동생과 조카들을 경계했습니다.”
영유는 방금 전 오고 간 찰나의 긴장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저 순수한 호기심이 어린 얼굴이다.
“폭군은 착한 동생과 그의 아들들을 죽일 기회만 생각하다가, 동생에게 조카들이 보고 싶으니 궁궐로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형의 속셈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식들과 닮은 아이들을 양자로 삼고, 진짜 두 아들은 다른 곳에 숨겨 두었지요.”
정원에는 바람이 불어와 흰 꽃잎을 살랑이게 했다.
“폭군에게 보내진 두 양자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낙리의 손이 무의식 중에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는 계속 이어갔다.
“그 후 폭군은 동생이 자기를 속인 것을 알았습니다. 동생과 그의 진짜 아들들을 궁궐로 끌고 온 폭군은, 동생에게 칼을 쥐여주며 명했습니다. 군주를 속인 죄로 네 자식들을 죽이라고. 그러자 두 아이들은 새로 변하여 날아갔으며 동생은 붉은 피를 토하면서 칼로 자결하였습니다. 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점점 커져서 우렛소리로 변하더니, 번개가 치고 벼락이 떨어져 궁궐이 무너지고 폭군은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습니다.”
낙리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정원의 고요함 속에 명료하게 울려 퍼졌다.
“궁궐이 무너진 자리에서 큰 나무 한 그루가 생겨났으며 하늘로 날아간 두 마리의 새는 다시 내려와 나무에 둥지를 틀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동백나무와 동박새라는 전설입니다.”
이야기가 끝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소 태사의 시선이 여전히 낙리에게 머물러 있었다.
영유는 동백꽃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화 같은 이야기이네.”
“동화입니다.”
낙리는 영유를 응시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 너무 슬프지 않습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영유가 담담하게 말했다.
“폐주(廢主)의 일화를 연상시켜.”
낙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습니까.”
“지난날의 어지러움이 가라앉고, 옥좌가 제자리를 찾았으니 지금의 태평이 있는 것이지.”
영유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낙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예…….”
그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렸다.
소 태사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르신.”
영유가 돌아보며 묻자, 소 태사의 얼굴에는 어느새 온후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렇지.”
그는 자상한 어조로 답했다.
“그러니 힘든 시기를 함께 해쳐온 영 대인과의 인연은 각별하네.”
“아버님께서도 어르신과의 우의(友誼)를 항상 잊지 않고 계십니다.”
영유가 공손히 말했다.
‘그런데…….’
낙리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폭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입술이 떨렸지만, 그는 그 말을 속으로만 삼켰다.
낙리는 깊은 한숨과 함께 눈을 떴다.
정원의 풍경이 흐릿하게 사라지고, 다시 자신의 방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째서……?’
소 태사는 왜 굳이 자신에게, 그 설화를 말하게 했을까?
하필 영유 앞에서.
대역들의 이야기를.
낙리는 그림을 다시 바라보았다.
붉은 동백꽃.
초록 동박새.
왕제(王弟)와 그 아들들은 새로운 삶을 얻었다.
하지만 돌아오지 못한 양자들은.
동박새에 이른 손끝이 떨렸다.
종이를 찢을 듯 손톱을 세웠다가, 서서히 떨어졌다.
낙리는 등불을 껐다.
창밖에서는 낙엽이 계속 흩날리고 있었다.
바람에 실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단풍들.
핏방울처럼 선연(鮮姸)했다.
*
바람 소리가 창틈으로 스며들어왔다. 스산한 소리였다.
“……그것이 동백나무와 동박새라는 전설이야.”
설화를 다 들은 후, 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염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설화, 조금 이상하지 않아?”
“뭐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꽃과 새가 되었다잖아.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인데.”
염온은 목탄으로 그린 동박새를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짚으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이야기 중간에 나오는 양자들은……어떻게 된 걸까?”
염석은 잠시 생각하더니 눈썹을 찌푸렸다.
“돌아오지 못했다면……죽은 거겠지?”
“그들도 꽃이나 새가 되었다는 말은 없는데. 단 한 줄로 언급되고 끝이라니…….”
“뭐, 높으신 분들의 목숨과 일반인의 목숨이 가치가 같을 수 없으니까.”
염석이 혀를 찼다.
“원래 그런 거 아니겠어?”
염온은 대답 대신 그림만 바라보았다. 한참 만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네가 예전에 나한테 말해준 이야기 있었지?”
“뭐?”
“예전에……승상가의 이야기를 해준 적 있었잖아.”
염온은 염석을 보며 나직이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네가 그랬지? 관군들이 추 장사의 연극에 속았던 건, 정말로 죽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염석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지.”
염온은 침묵에 빠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도망자와 그 품에 안긴 아기를 죽였다고 관군들은 믿었다. 하지만…….’
염온의 시선이 그림 위에서 멈췄다. 입술이 떨렸다.
‘분명 둘 다 확실하게 죽이긴 했을 것이다. 다만 착각한 것은, 그 아기가 누구였는가…….’
염온은 생각의 꼬리에서 벗어나, 염석에게 물었다.
“그때 아기와 함께 죽은, 그 친구라는 사람의 집은 어떻게 됐어?”
염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모르겠는데. 유족이 있었다면 승상가에서 챙겨주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 별 이야기가 없는 걸 보면 가족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염석은 조금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황명을 어기고 죄인의 혈육을 빼돌리려 한 것으로 되었으니, 가족들도 화를 당했을지 모르지.”
염온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의 표정은 깊은 그늘에 잠겨 있었다.
“누나?”
염석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염온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면……그 집안의 하인이나 노비들도…….”
말끝이 사라졌다.
바람 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말라버린 낙엽 몇 장이 바람에 실려 뱅글뱅글 뒹굴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갈색으로 바스러지는 낙엽들 사이로, 동백나무의 짙푸른 잎이 유독 선명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