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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송(老松)의 그림자가 바둑판 위를 길게 드리웠고, 일순의 정적 속에 스산한 바람 한줄기가 정자 기둥 사이로 지나갔다.
스승과 제자는 한참이나 말없이 바둑돌을 놓았다.
소 태사는 바둑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낙 상서(尙書), 승상 쪽에서 자네에게 공세를 멈추지 않는 것 같더군.”
낙빈은 손끝에 힘을 주어 돌을 내려놓았다.
“예, 이제 겨우 일 년을 넘겼는데……벌써 그만두어야 하나 싶습니다. 작은 실수 하나에도 목을 겨누듯 달려듭니다.”
낮게 가라앉은 음성에는 억눌린 분노가 살짝 비쳤다.
소 태사는 무심한 듯 백돌을 내려놓았다.
“실수를 하면 안 되지.”
말끝이 바람결처럼 가벼웠으나, 그 가벼움이 낙빈의 어깨를 더욱 짓눌렀다.
“그렇지 않아도 자네는 황상의 총애로 그 자리를 얻었다는 세간의 인식이 강하네. 흠을 잡히면 황상께 누가 되는 일일세.”
바둑판 위에는 돌들이 서로 물러서지 못한 채 얽혀 있었다.
묵묵히 바둑판을 바라보던 낙빈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군사 쪽으로 영향력을 되찾고 싶은 모양입니다.”
소 태사는 짧게 혀를 찼다.
“많이 불안한 모양이야.”
정자 밖에서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 태사는 한숨을 내쉬듯 말을 이었다.
“하기야, 이해해 주어야 하나.”
낙빈이 고개를 들었다.
“영 대인이 폐주시절에 당한 일을 생각해 보게. 그 사람에게는 손에 쥔 권력을 놓는 것이 곧 죽음일 것이야.”
낙빈은 바둑판 위의 돌무더기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조정에 남아있는 관료들 대부분이 그렇지 않습니까.”
지나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나풀거리는 가운데, 한동안 바둑판 위에는 차가운 돌들이 부딪히는 소리만 가득했다.
소 태사가 천천히 돌을 들며 입을 열었다.
“빈아.”
“예? 예.”
평소에는 아무리 친근한 자리에서도 늘 직함으로만 부르던 스승이다. 자(字)나 호(號)도 아닌 본명을 부르니, 오히려 낙빈은 어색하고 불편했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바둑이란 말이지…….”
방금 낙빈이 둔 돌 옆으로, 백돌 하나가 정확하게 자리 잡았다.
소 태사는 시선을 들어 낙빈을 바라보았다.
“길고 긴 장기전이란다. 처음 몇 수는 보잘것없어 보여도, 결국 그 모든 수들이 모여 하나의 큰 그림을 완성하는 법이지.”
소 태사는 턱을 가볍게 쓸며 말을 이었다.
“형세가 불리하다고 초조하게 돌을 밀어붙이면, 결국 자기 수를 가두게 되는 법이야. 한 수 뒤를 보는 자와 열 수 뒤를 보는 자는, 결국 다른 자리에 앉게 되어 있거든.”
노인의 손가락이 바둑돌 하나를 톡톡 두드렸다.
“그래서 포석(布石)이란 게 참으로 중요하지.”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여기서 저와의 대국부터 이기셔야…….”
“내가 지고 있었나?”
“…….”
백돌의 위태로운 연결을 보며 낙빈이 고민하고 있을 때, 소 태사는 웃으며 두 개의 백돌을 바둑판 위에 내려놓았다.*
바둑판을 정리하며 낙빈은 생각했다. 황상께 아뢸 이야깃거리가 생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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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최선을 다했지만 이겨버렸다는 이야기로군.”
“태사에게는 실례되는 말이오나, 차라리 바둑 실력이 형편없다면 쉽게 져줄 터인데……꽤 실력이 좋아서 말입니다.”
영안제(永安帝)는 가볍게 웃었다. 온화한 공기 속에서 담담한 대화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바깥 정원으로 옮겨가며, 찻잔에서 피어오르던 김이 무색하리만큼 표정이 조용히 식었다.
한동안 정적이 흐른 후 황제는 다시 입을 열었다.
“헌데, 소 태사는 요즘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이었지만, 낙빈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황실과 폐하의 안위를 고심하고 있을 따름이옵니다.”
“흠…….”
영안제는 그 말을 곱씹으며, 의미를 헤아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은 그렇게들 생각하고 있겠지. 경(卿)이 짐에게 스승의 복권을 졸랐을 거라고. 그런데 승상과의 충돌을 꺼린 짐이 거절했을 거라고 말이야.”
낙빈은 공손히 몸을 낮추었다.
“그렇지만, 경은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꺼낸 적이 없지. 스승과 소원해지기라도 한 것인가?”
“아닙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렇다면?”
“신하 된 몸으로 폐하께서 원치 않으시는 일을 어찌 감히 입에 올리겠사옵니까.”
낙빈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황제는 생각에 잠겼다.
낙빈을 볼 때마다 소 태사가 제자를 참으로 잘 길렀다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낙빈을 곁에 두는 것은 그가 충직한 제자여서가 아니다.
황제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여기서는 스승과 소원해졌다고 말하는 게 더 낫지 않겠나? 아니면 소 태사가 이제 권력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거나.”
“폐하의 눈을 속일 수 없음을 알기에 감히 거짓을 꾸미지 못할 뿐이나이다.”
“그렇군.”
황제는 손에 든 찻잔을 기울이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다시 물었다.
“이전에 말한 것은 어찌 생각하는가? 경을 공격하는 이들을 짐이 친히 조용히 시킬 수도 있는데.”
낙빈은 더욱 깊이 조아렸다.
“이미 과분한 성은을 입었사옵니다. 하온데 이 정도의 풍파조차 스스로 잠재우지 못한다면, 어찌 폐하의 신하라 자처하겠나이까.”
낙빈은 한 박자 쉬었다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폐하께서 신을 감싸주신다면, 승상이 이를 가만히 지켜보지 않을 것이옵니다.”
황제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승상이 이를 빌미로 그 기세가 더욱 사나워질 것이 염려되옵니다.”
긴 침묵이 편전을 채웠다. 황제는 먼 곳을 응시하며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짐은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다.”
그러나 공중에 흩어지는 그 음성은 자신조차 설득하지 못하는 듯했다.
*
서재는 고요했다.
창호지 너머로 스며들던 황혼 빛이 서서히 사그라지고, 그 자리를 등잔불이 대신 채웠다.
소 태사는 바둑판을 앞에 두고 복기(復碁)를 하고 있었다. 주름진 얼굴은 무표정했다.
딱.
돌이 판에 놓이는 작은 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낙리는 등을 곧게 세우려 애썼으나, 긴장을 떨칠 수 없었다.
소 태사의 손이 흑돌을 집어 들었다.
“옛이야기가 하나 있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낙리의 어깨가 움찔하였다.
소 태사는 여전히 바둑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였다. 목소리는 낮고 느렸다.
“예.”
낙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황급히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신하들과 함께 타국을 떠돌며 세월을 보낸 왕자가 있었지. 수십 년간 풍찬노숙(風餐露宿)하다 고국으로 돌아와 마침내 왕위에 올랐네.”
흑돌이 판 위에 놓였다.
“왕이 된 뒤, 그동안 쓰던 낡은 물건들을 모두 치우라 명했지. 그러자 신하들이 두려워하며 떠나려 했다고 하네.”
소 태사는 다시 백돌 하나를 들었다가, 손을 멈추었다.
백(白)이 흑(黑)에 포위된 자리를 응시했다. 살릴 수는 있어 보였으나, 그는 그 위에 돌을 내려놓지 않았다. 대신 전혀 다른 쪽에 수를 두었다.
“그간 함께한 물건들이 버려진다면, 고생을 함께한 사람들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라 여긴 것이지.”
낙리는 버려진 듯 한 백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왕은 그제야 깨닫고, 신하들에게 사과하며 물건들을 다시 들이게 했다지.”
“……사람의 마음을 살핀 이야기로 들립니다.”
“허나 말이네.”
소 태사가 고개를 들어 낙리를 바라보았다. 등불 빛에 비친 눈빛은 깊고 고요했다.
“그 신하들은 정말로 떠날 작정이었을까? 그리고 그 왕은 진정 뜻을 고친 것이었을까?”
낙리는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군신(君臣)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말씀이신지요.”
소 태사는 흩어져 있던 백돌 둘 사이, 얼핏 무관해 보이는 자리에 백돌을 하나 더 놓았다. 당장은 아무 변화도 없어 보였다.
번갈아 놓이는 바둑돌과 함께 이야기는 이어졌다.
“나눌 것이 고난 밖에 없을 때에는, 마음을 가릴 것이 적었을 것이야. 의심도 욕심도 자라기 어렵지. 하지만 영화가 눈앞에 놓이면……사람은 비로소 다른 것을 보게 되지.”
낙리는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끊어진 듯 보이던 백돌들이, 이제 와서 묘하게 숨을 트고 있었다.
“신하가 군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오나…….”
“두려움은 한쪽만의 것이 아니네.”
소 태사는 이번에는 허술해 보이는 자리에 백돌을 두었다. 공격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자리였다.
“성인께서 이르시기를, 군주는 예(禮)로 신하를 부리고 신하는 충(忠)으로 군주를 섬긴다 하였지.**”
이어서 흑백의 돌들이 차례로 배치되었다.
“그러나 예와 충이 말처럼 늘 온전하기는 어렵다네.”
소 태사는 한참 침묵하다 낮게 한숨을 쉬었다.
“자네는 모르겠지. 하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어. 선제(先帝)께서는 신하들의 발호(跋扈 : 권세나 세력을 제멋대로 부리며 함부로 날뜀)를 심히 우려하셨네. 여러 차례……정리가 있었지.”
다시 돌을 놓는 소리가 이어졌다.
“다만, 그때에는 세상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명분이 있었고 절차도 갖추어졌네. 그래서 후세는 그분을 명군이라 일컬었지.”
소 태사는 말을 멈추고 바둑판 위를 응시했다.
“그리고 금상은 그분의 손자이시지. 폐주의 그늘 아래서 오래도록 몸을 낮추는 법을 익히셨을 뿐이네. 그것이 성정이 되시었는지, 아니면…….”
말끝이 흐려졌다.
“사서(史書)를 보면, 난세를 평정한 공신들이 태평성대에 이르러 도리어 위태로워진 사례가 적지 않아. 공이 너무 크면, 그 공 자체가 짐이 되는 법이지.”
낙리는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듣고만 있었다.
“신하가 군신의 의리를 저버렸다 함은……어떤 이유에서건 천하의 질서가 흔들렸다는 뜻이 되네. 황상께서는 공신들을 아끼시지.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정적이 흘렀다.
소 태사의 시선이 바둑판 한쪽 모서리에 멈췄다. 흑돌이 두텁게 모여 있는 한복판에 백돌 하나가 위태롭게 놓여 있었다.
낙리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그 돌에 끌렸다.
소 태사는 그 돌을 잠시 바라보다가, 아무렇지 않게 다른 곳에 돌을 두었다.
“한 번 흔들린 질서는 언제든 다시 흔들릴 수 있다고, 그렇게 여기시게 될지도 모르지.”
낙리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영 대인은 그것을……모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안다 해도 스스로는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소 태사가 바둑돌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하지만 지존(至尊)을 너무 가볍게 여긴다면, 그 착각이 결국 스스로를 무너뜨릴 것이네. 군주의 뜻이 한 번 기울면, 그 파장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깊이 스며들지. 아주 조용하게,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절대 돌이킬 수 없도록.”
소 태사의 손가락이 바둑판 모서리를 더듬었다.
낙리는 노인의 말을 곱씹으며 바둑판을 응시했다.
고립되었던 백돌들이 하나둘씩 이어지며 흑돌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낙리는 찬찬히 그 판세를 지켜보았다. 그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이제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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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대국(大局)의 모양새를 내려다보며 소 태사는 생각에 잠겼다.
꽤 오래전부터 영 승상의 곁에 배치된 ‘포석’을 알게 된다면, 승상 쪽에서 오히려 분노할지도 모른다. 당신이야말로 언제부터 배신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냐고.
하지만 폭군을 몰아내고 이제 영광스러울 날들만 남았다고 생각했을 때, 모두가 깨닫지 않았는가.
환란을 함께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영광을 함께하는 것임을.
* 바둑돌 두개 이상을 동시에 두거나, 상대의 돌을 바둑판에 올려 놓으면 대국을 포기하는 의미
**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 논어(論語)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