愼思篤行 : 신중히 생각하고 성실히 행동하라.
『중용(中庸)』 의 구절인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널리 배우고,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며, 성실하게 행해야 한다.)에서 유래
*
선선한 바람이 부는 오후.
낙리는 짐들을 수레에 옮겨 싣고 있었고 염석과 염온 남매는 마루 끝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강아지도 데려갈 거야?”
염석이 마당 한편에서 졸고 있는 갈색 강아지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려 합니다. 가족 같은 애라서요.”
낙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도 지어주었는데…….”
염석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옷장은 필요하지 않아? 새로 장만하려면 돈이 꽤 들 텐데.”
“사야 할 것 같습니다.”
“창고에 안 쓰는 작은 장이 하나 있어.”
염석이 일어서며 말했다.”
“줄 테니 가져가. 그릇도 몇 개 챙겨줄게.”
“고맙습니다.”
“우리 사이에 뭘.”
염석이 창고로 향하자, 마루에는 일순 적막이 내려앉았다.
바람이 마당의 낙엽을 스치고, 짐 사이에 놓인 족자의 끈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낙리는 수레를 살피다 말고 멈췄다.
염온의 시선이 족자에 머물렀다.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것……제가 그려드린 그림인가요?”
“그렇습니다.”
짧은 대답 이후, 낙리는 무언가 생각하듯 족자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례지만…….”
그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림에……동박새를 더 그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림 상태에 따라 다르지요.”
염온은 마루에서 내려와 족자를 집어 들었다. 끈을 풀고 족자를 천천히 펼쳤다. 붉은 동백꽃이 가지에 매달린 그림이 드러났다. 종이의 결은 아직 깨끗했고, 색도 바래지 않았다.
‘꽤 깨끗하게 다루었구나.’
염온은 속으로 생각하며 그림을 살폈다.
“동백꽃을 좋아하세요?”
염온이 고개를 들어 낙리를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낙리의 대답은 너무 빨랐다.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는 곧 자신이 너무 강하게 부인했다는 듯 미세하게 표정이 굳었다.
“그러면 왜……?”
염온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낙리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으나 이윽고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잊지 않을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목소리는 낮았다.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무언가를 참는 듯 그림 위에 오래 머물렀다.
염온은 낙리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 눈에 무언가 질문하고 싶은 기색이 스쳤으나, 곧 사라졌다.
그녀는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그러면 다음에는 좋아하는 꽃을 그려드려야겠네요.”
낙리는 염온의 눈치를 살피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염온이 족자를 다시 말며 말했다.
“당신이 숨기는 것이 한둘이 아닌데…….”
낙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부드러웠다.
“이런 것으로 의아해할 것 있겠습니까.”
그 말에는 비난도, 추궁도 없었다. 다만 담담한 인정이 있을 뿐이었다.
낙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당 너머 창고에서 염석이 무언가를 질질 끌고 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낙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여전히 염온을 보고 있었다.
염온도 그를 보고 있었다.
가을 햇살이 두 사람 사이의 짧은 침묵을 비추었다.
강아지가 기지개를 켜며 눈을 떴다.
*
새벽의 찬 기운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묘시(卯時). 회랑을 따라 노란 은행잎이 이따금 바람에 날려 들어왔다.
“도련님, 계십니까?”
추홍은 영유의 방문 앞에 이르러 조심스레 물었다. 창호문 너머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도련님?”
다시 한번 불렀으나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나가셨습니다.”
복도를 청소하던 하인 한 명이 말했다.
“나가셨다고?”
“제가 이곳을 청소하고 있을 때였으니……한 식경쯤 전에 나가셨습니다.”
“조반을 드시자마자 바로 나가신 것인가…….”
추홍은 미간을 찌푸렸다.
영유는 오늘 아침 일찍 선생에게 수업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나가버린 것이다.
‘혹시 또 답답하다고 바람 쐬러 나가신 건가. 아직 상중이니 조심하셔야 하는데.’
추홍은 대문 쪽으로 향했다. 대문을 지키던 하인들이 그를 보고 급히 허리를 숙였다.
“도련님께서 외출하셨느냐?”
“예.”
한 명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어디로 가셨는지 아느냐?”
“낙 선생을 만나러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추홍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그 사람이라면 괜찮겠지.’
하지만 곧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는 천천히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복상(服喪)을 마치는 대로 혼사도 관직도 준비하셔야 하는데……아직도 진지한 마음가짐이 아니시니…….”
그의 한숨은 서서히 북적거리기 시작하는 저택의 소음에 묻혔다.
*
햇살이 창호지를 통해 은은하게 스며들었다. 낙리는 새로 이사 온 집에서 마지막 짐정리를 하고 있었다. 책들을 책장에 꽂다가, 그의 손이 낡은 책 한 권 앞에서 멈췄다.
낙리는 책을 손에 들고 바라보았다.
표지는 낡았지만 정갈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은은한 국화 향이 다시 코끝을 스치는 듯했다.
“이 책은 내게도 많은 도움이 된 성현의 가르침이네.”
소 태사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서재에는 국화차 향이 은은하게 퍼져 있었고, 서늘한 바람이 창 틈으로 스며들어왔다.
“과거 시험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 이후 관리가 되어서도 도움이 될 터이니 잘 읽어보게.”
소 태사가 책을 건네며 온화하게 웃었다.
“그리고 성현의 가르침만은 못하겠지만, 내가 지금껏 쌓아온 경험도 조금씩 일러주지.”
“감사합니다.”
낙리는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지금 당장 자네에게 도움이 될 조언이 하나 있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소 태사는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사람을 대하는 기술을 좀 더 다듬어야 하네.”
낙리는 고개를 들어 소 태사를 바라보았다.
“윗사람을 대할 때, 비위를 맞추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야.”
그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무게가 있었다.
“진심이 없는 아첨은 한때 통할지 몰라도, 결정적 순간에는 신뢰받지 못하네. 그리고 진심 없는 사람은…….”
그가 낙리를 똑바로 보았다.
“오래 쓰이지도, 오래 살지도 못하네.”
“리야! 있어?”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낙리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손 안의 책이 약간 떨렸다.
책을 재빨리 책장에 꽂고 밖으로 나갔다.
마루에 놔둔 강아지가 눈에 들어왔다. 강아지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낙리는 잠시 강아지를 내려다보다가 문으로 향했다.
“예, 지금 나갑니다.”
낙리가 문을 열자 영유가 호위 한 명과 함께 대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놀러 왔어!”
영유는 환하게 웃으며 신발을 대충 벗어 한쪽에 던지듯 하고 마루에 올라섰다.
낙리는 소년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영유는 집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와, 정말 작다!”
뒤에서 따라 들어오던 호위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영유를 힐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낙리는 그저 웃기만 했다.
“승상저과 비교하시면 안 되죠.”
“그래도 이렇게 작을 줄이야.”
영유는 스스럼없이 방 안으로 들어가 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정리가 안 끝난 것 같은데?”
“볼일도 있고 해서 어제부터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아, 그래.”
영유가 무릎을 탁 쳤다.
“사흘 전에 염석네 집에 가서 물어봤더니, 너 고향에 내려갔었다더라?”
“예, 그렇습니다.”
‘거기에도 들르기는 했지.’
“성묘 간 거야?”
낙리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가 이내 밝아졌다.
“예. 향시 합격을 알려드리고 왔습니다.”
“그렇구나. 근데 말이야…….”
영유가 밝은 어조로 말했다.
“나도 내년이면 임관(任官)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버님이 마련해 주신다고 하셨어.”
“아, 그렇군요. 이르지만, 축하드립니다.”
낙리는 곧 조심스레 이어 말했다.
“하지만, 들어가신 다음에 자리를 제대로 활용하시려면 반드시 과거에 합격하셔야 합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더욱 열심히 공부하셔야 합니다.”
“어? 너도 잔소리야?”
“도련님께 필요한 일이니까요.”
영유는 살짝 기분이 상한 듯 투덜거렸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런데, 공부가 점점 힘들어.”
영유의 투덜거림이 이어졌다.
“책거리가 끝나고 나니까 숙제가 두 배로 늘었다니까. 숙제해가면 선생님은 매번 내 글씨로 잔소리고.”
영유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니까 가끔씩 와서 나 공부하는 것 좀 도와줘.”
“얼마든지요.”
대답하는 낙리의 어조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잠시 생각하더니 덧붙였다.
“하지만 숙제를 대신 해드리는 것은 안 됩니다.”
영유의 얼굴이 약간 굳었다.
“……쓸데없이 숙제가 많다니까.”
그가 투덜거렸다.
“다른 사람들한테 부탁하기도 어렵고.”
“다 도움이 되시라고 선생님께서 내주신 겁니다.”
낙리가 달래듯 말했다.
“제가 예전에 가끔 대신 해드리기는 했지만, 이제는 도련님께서 제대로 공부하셔야 할 시기입니다.”
낙리는 잠시 멈췄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도련님께서는 끈기가 약간 부족하신 게 걱정입니다. 제가 옆에서 도와드릴 테니, 열심히 하십시오.”
영유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도련님께서 조금만 더 힘을 내시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으실 겁니다.”
낙리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도련님은 총명하십니다. 다만 조금 더 꾸준히 하시면…….”
“그래, 그래. 네가 도와주면 하지 뭐.”
영유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낙리는 그 모습을 보며 안도했다.
동시에, 소 태사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어지간히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면, 마음 없는 아첨은 알아차리는 법이야.”
소 태사는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아첨에 기분 좋아하면서도, 그 사람을 믿지는 않지. 그러니 진심으로 윗사람을 위하는 언행을 하게. 그래야 신뢰를 얻을 수 있네.”
낙리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나는 반정을 실행하기 며칠 전까지도 폐주에게 상소를 올려 쓴소리를 했었네.”
소 태사의 눈빛이 잠시 멀어졌다.
“그래서 폐주는 나를 신뢰했지. 성가신 잔소리꾼이라 여길지언정 다른 생각은 없다고 여겼어. 다른 신료들이 비위 맞추기 급급할 때, 나만 진심으로 간언 한다고 믿었으니.”
노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신뢰가……반정을 성공시켰지.”
“어쨌든.”
영유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내일모레 꼭 와야 해. 알겠지?”
“예, 알겠습니다.”
낙리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영유가 마루로 나가자, 강아지가 잠결에 꼬리를 한 번 흔들었다. 낙리는 영유를 배웅하며 대문 밖까지 나갔다.
그제야 일어난 강아지가 짖으며 영유의 뒤를 쫒으려 하자, 낙리는 조용히 붙들었다.
“조심히 가십시오, 도련님.”
“응, 또 보자!”
영유가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낙리는 대문 앞에 서서 한동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단풍이 바람에 날려 마당에 떨어졌다.
낙리는 발을 옮기다가, 그것을 밟지 않고 피했다.
강아지가 낙리의 품에서 꼬리를 흔들었다.
낙리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을이, 느리게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