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한지우 1 에서 이어집니다)
多事之秋 : 일이 많이 벌어진 때. 주로 국가적·사회적 일이 벌어진 때를 이른다.
*
계절이 한 바퀴 돌고 또 조금 더 지나, 가을이 찾아왔다.
*
낙엽이 뜰에 쌓이고 바람이 선선해진 어느 오후였다.
염온은 올케와 함께 조카를 돌보고 있었다.
아이는 벽에 붙은 강아지 그림을 손으로 가리키며 칭얼거렸다.
“멍멍이, 멍멍이!”
“그래, 강아지 귀엽지?”
올케가 달래듯 말했지만 아이는 더 크게 떼를 썼다.
“멍멍이 조아! 멍멍이 줘!”
염온이 아이를 안아 올리려는 순간,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누나, 여보!”
염석이 급히 들어오며 소리쳤다.
“승상저의 친구한테 들었는데, 낙리가 향시(鄕試)*에 합격했대.”
염온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차분해졌다. 반면 염석 부부는 마치 자기 일인 양 기뻐했다.
“정말요? 아이고, 역시 다르네요.”
“내가 그랬지요, 그 친구 똑똑하다니까요! 도련님이 관직 자리를 만들어 주신다는데도 계속 거절하는 바람에, 추 장사가 요령 없다고 흉을 보았는데…….”
염석은 흡족하게 웃었다.
“그게 다 실력이 있으니까 그런 거지요. 나도 들었는데, 높은 분이 추천해서 들어가는 것보다 스스로 과거에 합격하는 게 훨씬 낫다더라고요.”
“그럼요. 관리가 못되어도 일단 향시에 합격했다면 어디서든 대접받고 먹고살 수 있지요.”
염석의 아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염석은 염온의 눈치를 슬쩍 살피다가 농담처럼 말했다.
“누나, 다른 사람이 데려가기 전에 그 친구랑 정식으로 사주라도 교환해 둘까?”
“너 말이지……당사자들 빼고 앞서나가지 마.”
염온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 동안 많이 친해진 것 아니었나.”
염석이 약간 머쓱해하며 웃었다.
“이제 슬슬 조카에게 고모부를 만들어 주어야…….”
그때 아이가 염온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며 다시 칭얼거렸다.
“고모부, 고모부, 줘!”
순간 방안이 조용해졌다. 염석 부부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참았고, 염온의 뺨이 붉어졌다.
한참 칭얼거리던 아이를 재운 염석의 아내는, 바느질거리를 끌어오며 염석에게 물었다.
“그런데 승상가 막내 도련님은 언제 혼례를 하신대요? 소문만 무성하고 소식이 없네요. 혼인잔치하면 일감도 생길 텐데…….”
“몰라요. 그런데 지금 상중이니 당분간은 소식이 없겠지요.”
“아, 그렇죠.”
“심지어 줄초상이잖아요……. 큰 도련님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도 않아 마님까지 그렇게 가셨는데, 그 와중에도 혼담 이야기가 계속 도니 마님 친정 사람들이 승상저로 찾아와 싫은 소리를 하고 갔데요. 상 끝나기 전에는 절대 못하죠.”
염석의 아내가 고개를 갸웃하였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는 상복을 몇 년 입는 거예요? 3년인가 4년인가…….”
듣고 있던 염온이 조용히 말했다.
“도련님의 경우는 마님이 돌아가신 때부터 1년입니다.”
“역시 우리 누나 똑똑해!”
염석이 웃으며 말하는 것을 흘려들으며 염온은 생각에 잠겼다.
‘그 사람은 가족의 상복을 입을 수 있었을까.’
낙리는 염온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한 이후에도, 이상할 정도로 태연한 얼굴로 그녀를 대했다.
시간이 날 때면 여전히 찾아와 활 연습을 하고 갔다. 염석이 혼사를 언급하려고 하면 아직 자신이 스스로 밥벌이도 못 하는 신세라며 말을 돌렸다.
하지만 염온은 알 수 있었다. 낙리는 그 후로는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염온이 그의 비밀을 누군가에게 말했는지, 아니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확인하려는 듯했다.
염온은 아직도 낙리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꺼내지 못했다.
분명한 것도 없고, 무엇보다 자신의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말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무게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창밖으로 낙엽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지만, 어떤 것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
바람에 마른 잎이 버석거리는 소리가 서재 안까지 들렸다.
낙리는 약간 불편한 자세로 찻잔을 마주하고 있었다. 소 태사의 부름으로 왔는데, 와보니 낙빈이 화를 내고 있어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 태사는 바둑판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낙빈은 탁자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자들이 저를 체직(遞職)**하라는 상소를 올린 것 같습니다.”
낙빈의 목소리에 분노가 섞여 있었다.
“그런 것 같구나.”
소 태사는 무심한 어조로 수긍하며 돌을 내려놓았다.
“이동한다면 태복시나 군기시겠지.”
낙빈이 살짝 이를 갈았다.
“역시 들으셨군요. 영 승상은 어떻게든 저를 쫓아내고 싶은 것 같습니다! ”
“허…….”
소 태사가 혀를 찼다.
“그 탈영병 사건, 자네가 매끄럽게 마무리 못한 게 맞지 않나. 승상 측에 빌미를 준 것은 자네야.”
낙빈은 얼굴을 붉혔다가 한탄하듯 말했다.
“우리 쪽 사람들만 집어서 바늘만한 흠이라도 찾아서 공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스승님도 주의하셔야 합니다.”
소 태사는 태연하게 웃었다.
“나야 걱정할 것이 있겠나. 실직(實職)에 있는 것도 아니고, 흠 잡힐 일 한 적도 없지.”
그 말이 끝나자 방 안의 공기가 잠시 가라앉았다.
고개를 숙인 채 듣고 있던 낙리는 저도 모르게 소 태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 태사의 눈빛은 정말로 평온했다.
“자, 낙 상서(尙書).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고 앉게.”
소 태사가 낙빈에게 말했다.
“오늘은 이 사람에게 축하를 전하려고 부른 것 아닌가.”
소 태사는 바둑판에서 시선을 돌려 낙리를 바라보았다.
“향시에 급제했다며.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낙리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낙빈도 그제야 자리에 앉으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상서 대인.”
말은 나왔지만, 스스로도 어색하게 들렸다.
“향시 합격에 만족하지 말고 더 위를 봐야 해. 감시(監試)나 예부시(禮部試)는 향시와 비교도 안 되게 어렵지. 정말 노력해야 하네.”
소 태사가 계속 덕담을 이어갔다.
“이듬해 바로 합격하는 경우는 오히려 드무니까, 내년에 결과가 좋지 않아도 실망은 하지 말고…….”
‘진짜 덕담해 주러 부른 건가?’
소 태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그나저나 요즘은 승상가 쪽은 조용한가?”
“예……. 예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조심스러워졌다?”
소 태사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조심하는 사람은 대개 무언가를 잃은 뒤이지.”
“…….”
낙리는 그 말의 뜻을 짐작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소 태사는 손끝으로 바둑돌 하나를 집었다가, 내려놓지 않은 채 낙리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요즘 어떤가.”
“저는…….”
낙리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저는……승상가에 더 머무르기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최근에 식객들을 줄이고 있습니다. 막내 공자의 거처 쪽도 조만간 정리를 할 듯합니다.”
“그렇군.”
소 태사는 고개를 숙여 바둑판을 잠시 바라보다가, 웃었다.
“승상이 확실히 신중해졌군. 그래, 공부에 집중할 겸, 승상저에서 나오는 것도 괜찮겠지.”
“그래도……되겠습니까?”
“억지로 붙어 있는 것도 이상하니까.”
소 태사는 천천히 돌을 내려놓았다.
“게다가 이미 한 해 전에도 허락을 구했지 않나. 그땐 아직 때가 아니었지만 이제는 괜찮을 것 같네.”
소 태사의 시선이 잠시 그를 스쳤다.
“다만 막내 공자와의 관계는 유지하게. 이제는 승상이 막내 공자에게도 사람을 많이 붙여주었지만, 그 애가 승상의 사랑을 받지 못하던 어린애였을 때부터 곁에서 모신 게 자네 아닌가. 그 애도 자네에게 꽤 정이 들어있을 걸세. 그 감정을 유지하게.”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면 준비를 하겠습니다.”
소 태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이듯 말했다.
“앞으로 자주 보세. 관리가 된다면 알아야 할 것들이 많으니 미리 조금씩 가르쳐 주지.”
낙리는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실수를 알아차리고 당황했다.
소 태사는 태연히 웃었다.
“드러나게 제자로 받아들이지는 못해도 가르침을 줄 수는 있지.”
낙리는 당황한 모습 그대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만……가보겠습니다.”
낙리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났다.
소 태사는 다시 바둑판으로 눈을 돌렸다.
“그래, 가보게. 바람이 차니 조심하고.”
낙리는 조용히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문을 나서자 찬 바람이 서재 안의 향 냄새를 흩뜨려 놓았다.
발자국 소리가 멀어졌다.
낙빈이 느릿하게 의자에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참 대단합니다. 철없는 애 모시느라, 우리를 돕느라, 바쁠 텐데……. 그 와중에 향시에 합격했으니.”
“똑똑한 줄은 알았지.”
소 태사가 새로이 바둑돌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낙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린 나이에 저를 찾아왔을 때부터 범상치 않았습니다. 제 주인이 했던 말 몇 마디를 기억하여 우리에게 도달하다니.”
“원수의 적이 누군지 알아차린 것이지. 복수하려면 힘이 필요하다는 것도.”
소 태사가 바둑돌을 내려놓으며 미소 지었다.
“보통 아이였다면 진작 죽었거나 포기했겠지.”
낙빈이 낮게 말했다.
“원희가 무섭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저만큼 원한을 품고 있다니.”
“그래서 쓸 만하지.”
소 태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네. 저 아이를 내게 데려온 것.”
“스승님의 안목이 훌륭하셨으니 원희가 빛을 본 겁니다.”
“앞으로도 오래 볼 수 있겠군.”
소 태사는 문득 생각했다.
영 대인에게 감사해야겠군. 저런 칼을 우리 손에 쥐여준 셈이니.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가, 곧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실례로군.”
낙빈이 고개를 들었다.
“예?”
“아니네.”
소 태사의 미소는 여전히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평온했다.
*
햇살이 사랑채 마루 끝에 비스듬히 내려앉고 있었다.
하늘빛은 엷었지만, 바람 속엔 서늘한 냄새가 감돌았다.
낙리는 마루 아래 단정히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영유와 추홍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영유는 아직 상복 차림이었지만, 얼굴에는 그늘 대신 묘한 아쉬움이 드리워져 있었다.
“향시에 급제했다지?”
추홍이 먼저 말을 꺼냈다.
“도련님이 네 선물을 준비하셨다.”
그가 손짓하자 옆의 하인이 정성스럽게 포장된 나무상자를 내밀었다. 문방사우였다.
“감사합니다.”
낙리가 깊이 절을 올렸다.
“나가서도 도련님의 은혜를 잊지 말게.”
추홍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강조가 실려 있었다.
“잊을 리 없습니다.”
낙리가 공손히 대답했다.
영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나가는 거야?”
“예. 이제는 공부에 전념해야 할 때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유는 말끝을 흐렸다.
“조금 더 있어도 괜찮을 텐데.”
영유의 얼굴에 서운함이 스쳤다. 낙리는 그 표정을 외면하지 않았지만, 평온하게 답했다.
“언제까지나 도련님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겠지요.”
“이 사람이 관리가 되면 도련님께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추홍이 말했다.
“필요하면 얼마든지 부르시면 됩니다.”
낙리는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언제든 부르시면 달려오겠습니다.”
영유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낙리를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그래, 네가 훌륭한 관리가 되는 게 나한테도 좋은 일이지. 힘내.”
바람이 불어, 풍령(風鈴)이 가볍게 흔들렸다.
*
승상부의 정당(正堂)은 오늘도 팽팽한 기운이 감돌았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향냄새만이 희미하게 퍼졌다.
긴 탁자 끝에는 검은 장포(長袍)를 입은 영 승상이 자리하고 있었고, 좌우로 추홍을 비롯한 수하들과 관료들이 앉아 있었다.
“형부(刑部)의 상황이 심상치 않소.”
승상의 목소리에 무게가 실렸다.
“우리 쪽 사람들이 하나둘 밀려나고 있지 않나.”
수하 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달 형부낭중 두 명이 좌천되었고, 이번 달에도 한 명 더 물러날 것 같습니다.”
“이대로 두면 형부에서 우리 입지는 사라질 것이오.”
승상은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둘째를 복직시켜야 하지 않겠소. 경험도 있고, 법리에도 밝으니.”
그 말에, 공기가 묘하게 흔들렸다.
탁자 너머 수하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상(喪)이 끝나는 대로 형부로 돌려보내는 것이 어떠하냐는 말이오.”
승상의 손가락이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지금 시기는 그리 순탄치 않습니다.”
나이 많은 관료의 어조는 완곡했지만, 단호했다.
“둘째 공자를 형부로 다시 보내시는 것은……황상께서 받아들이시지 않을 겁니다.”
다른 수하가 거들었다.
“중앙의 관직은 지금으로선 어렵지 않겠습니까.”
또 다른 이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지방의 자리를 먼저 거치고, 천천히 길을 보시는 것이 현명하겠습니다.”
영 승상의 얼굴이 굳었다.
“대인께서 뜻하신 바는 알겠으나…….”
처음에 입을 열었던 관료가 더욱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둘째 공자를 내세우시면, 오히려 황상의 경계심을 더 키우지 않을까 합니다.”
영 승상은 침묵했다.
그 누구도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하들의 의사는 분명했다.
사실상 영사를 포기하라는 뜻이었다.
승상의 시선이 천천히 탁자를 훑었다. 그리고 잠시 추홍에게 머물렀다.
추홍은 눈을 내리깔았다.
며칠 전, 영사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
오후의 햇살이 창호를 누렇게 물들였다.
영사는 못마땅한 듯이 서안(書案)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탁, 탁…… 점점 거칠어지던 소리가 어느 순간 멎자 그제야 추홍은 입을 열었다.
“그래서……황상께서 하사하신 약재로. 도련님께 보약을 지어드리라 대인께서 명하셨습니다. 가벼운 감기라도 조심하시고 건강을 챙기셔야 합니다.”
“아버님이 요즘 내 걱정도 하시나?”
영사는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
“조정일로 바쁘실 텐데 나처럼 버린 자식 걱정할 시간도 있으셨어?”
“도련님…….”
“막내의 부하 중 하나가 과거에 합격했다며?”
“그 사람은 겨우 향시에 합격했을 뿐입니다.”
영사의 입가에는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지금 내 벼슬길을 다시 열 가능성도 희박한데, 아버진 그런 인재를 막내에게 붙여 주셨단 말이냐.”
“그 사람은 3년 전의 배 사고로 우연히 인연이 닿아 막내 도련님을 모시게 되었을 뿐입니다.”
배 사고의 언급에 영사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시선이 잠시 멈춰, 허공을 향했다.
추홍이 말을 이었다.
“그냥 그 사람의 운이 좋았던 것이지요.”
“그렇지만 막내와 혼담이 오가는 상대도 그렇고…….”
영사가 작게 이를 갈았다.
“아버님이 장유유서를 무시하고, 마치 그 애를 후계처럼 대하시지 않나.”
“대인께서는 막내 도련님이 안쓰러워 배려해 주시는 것뿐입니다. 절대 작은 도련님을 박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박대하지 않는다?”
영사는 눌러 담은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럼 자네는 왜 요즘 나를 ‘작은 주인님’이라 부르지 않나?”
추홍의 얼굴이 굳었다.
“……그건, 외부 사람들 시선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돌아가신 마님의 친정 쪽에서 말이 좀 많지 않습니까. 괜히 그분들 귀에 들어가면……”
“그 사람들이 왜 우리 집안일에 참견이야!”
영사는 울컥한 어조로 언성을 높였다.
“감히……!”
그는 주먹을 쥐었다가 천천히 폈다.
그리고 숨을 몰아쉬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정말, 억울하단 말이야.”
그의 목소리는 이제 분노가 아닌, 지쳐버린 사람의 것이었다.
추홍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차마 꺼낼 수 없었다.
‘나는 억울하다.’
영사는 늘 그 말을 했다. 영 승상의 눈길이 자신을 스치지 않을 때마다, 영유의 곁에 사람이 늘어날 때마다.
추홍은 영사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영사가 정말로 억울한 것인지, 아니면…….
*
“이번에……병부상서의 건은 조금 예민하게 대처하신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추홍은 정신을 차렸다.
정당의 향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너무 몰아붙였다는 말이 조정에 돌고 있습니다. 소 태사 쪽 사람들 뿐 아니라 다른 관료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좀…….”
“황상께서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셨다고 합니다.”
영 승상이 눈살을 찌푸렸다.
탁자 아래에서 누군가의 손가락이 떨렸다.
승상은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 공은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오.”
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황실의 신임을 얻는 것과 조정을 통솔하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사람이지.”
영 승상의 시선이 허공을 가르며 멈췄다.
“나는 이해되지 않소. 이미 최고의 예우를 받고 있지 않나. 안락한 노년을 보내면 될 것을, 왜 그리 권력에 집착하는지…….”
수하들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추홍도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승상의 한숨 섞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잠시 후, 승상은 다시 현실로 돌아오듯 말을 돌렸다.
“병부상서를 이대로 놔둘 수는 없지. 하지만, 낙 상서가 그만둔다 해도 그 자리는 우리 몫이 아닐 거요. 황상께서 또 다른 측근을 앉히시겠지.”
그는 씁쓸히 웃었다.
“처음부터 우리를 견제할 목적으로 소 태사의 사람을 임명한 것이오. 그렇지만. 낙 상서도 황제의 총신(寵臣)이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 앉지 못했겠지.”
탁자 위에서 서류가 조용히 넘겨졌다.
군 관련 자리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고, 대부분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떠올랐다.
“군(軍) 쪽은 이제 점점 멀어지는군요.”
한 수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승상대인의 빙장(聘丈 : 남의 장인을 이르는 말)께서는 어떠하신지요?”
“장인 어른?”
“대장군이시고, 그 아드님들도 모두 장군이시지 않습니까. 그쪽에 조언이나 도움을 구하신다면…….”
승상은 손을 저었다.
“그 쪽은 말도 꺼내지 마시오.”
그의 어조가 차가웠다. 수하는 입을 다물었다.
방 안의 분위기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
그때, 탁자 끝에서 누군가 무심히 말했다.
“……큰 아드님이 살아계셨다면…….”
그 순간, 추홍의 시선이 번뜩였다.
그 말을 한 자를 향해 날카로운 눈빛이 날아갔다.
그는 허겁지겁 입을 다물었다.
승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향로의 연기만 바라보고 있었다.
연기가 천천히 올라가다, 한순간 일렁이며 사라졌다.
추홍은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회의는 결론 없이 끝났다.
*
회의가 끝나고 추홍만이 영 승상의 곁에 남았다.
영 승상은 자리에 앉은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둘째를 포기하라는 것이 그들의 뜻인가.”
“대인……“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네.”
그는 손을 저었다.
“둘째에게는……지울 수 없는 흠이 생겼어.”
영 승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향로의 연기가 천천히 피어올랐다.
“그 때, 조사를 중단했지.”
“대인, 그것은……,”
추홍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옳은 결정이었네.”
승상의 어조는 단호했다.
“사실로 드러났다면 황상과 소 태사가 그 추문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네. 가문이 무너지고, 둘째도, 막내도 모두 끝이었겠지.”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진실이 무엇이든……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향로의 연기는 이제 끊어져 있었다.
*
염온이 집에 돌아오니 문간에 낯선 짐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매우 단출했다. 보따리 몇 개와 책 꾸러미가 전부였다.
“이게 뭐야?”
염온이 고개를 갸웃하자, 방 안에서 책을 정리하던 염석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아, 낙리가 잠시 맡겨두었어.”
“방을 내줄 거야?”
염석은 손짓으로 아니라고 했다.
“집은 구했다더라. 며칠 후에나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짐만 맡아둔 거야.”
“그러면 그동안 여기서 머무는 건가?”
“아니, 볼일이 있어서 고향에 내려갔어.”
염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바람이 들창 사이로 스며들어 등불을 흔들었다.
*
바람 소리에 잠시 창문을 바라보던 영 승상은 다시 향로를 바라보았다.
재만 남은 향로 위로, 마지막 연기 한 줄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자식이 셋이나 있건만…….”
그는 말을 잇지 않았다.
방 안에 긴 침묵이 흘렀다.
추홍은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드님들이 어찌 대인의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막내 도련님도 그렇습니다. 제가 곁에서 본 바로는, 절대 대인을 원망하는 기색은 없으셨습니다.”
그 말에, 승상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막내를 미워한 적은 없네.”
영 승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공평하지 못했을 뿐이지.”
그는 잠시 추홍을 바라보았다.
“자네와 저연에게는 빚을 졌소. 자네가 벼슬을 마다하고 이곳에 남은 그 뜻, 잊지 않고 있네.”
추홍은 고개를 숙였다.
“대인의 은혜를 갚는 것뿐입니다.”
승상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 있지 않아 저연의 기일이지.”
승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막내가 매년 내려갔는데……이번에는 사람을 보내야겠군.”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그리하게.”
승상은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추홍은 조용히 물러났다.
*
그날 밤, 산중은 유난히 어두웠다. 달빛도 구름에 가려 희미했다.
서늘한 산바람이 풀잎을 스치며 인적 없는 숲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마른 잎은 건조한 비처럼 떨어져 발치에 흩어졌다.
그 가운데, 낙리는 한동안 움직임 없이 서 있었다.
땅에 꽂힌 향(香) 위로는 엷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한 방향으로 길게 끌려가며 바람에 스러지는 연기 속에서, 낙리는 잠시도 시선을 흩뜨리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이 등 뒤의 등불을 꺼뜨리자, 곧바로 어둠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아 있는 건 향불의 붉은 점 하나 뿐.
주변의 모든 형체가 그 붉은 점을 중심으로 흔들리는 그림자가 되었다.
연기가 얼마간 더 허공에 매달려 있다가, 향이 점차 짧아지며 스스륵 재를 떨어뜨렸다.
낙리는 그 재가 바람에 휘말려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 불씨가 꺼졌다. 주위는 완전히 어둠.
어둠이 그의 발목, 무릎, 어깨를 차례로 삼켰다.
이제는 바람에 나뭇가지가 삐걱거리는 소리만 남았다.
낙리는 향이 타고 사라진 자리 위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 위로 마지막 재 하나가 내려앉았다.
그가 어둠 속으로 천천히 몸을 돌려 사라지자, 뒤늦게 풀벌레 울음소리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 향시(鄕試) : 지방에서 실시하던 과거(科擧)의 초시(初試). 여기에 합격해야 복시(覆試)에 해당하는 감시(監試)와 예부시(禮部試)를 서울에서 볼 수 있었다.
** 체직(遞職) : 임기 만료, 공로, 과실, 상피(相避) 등으로 관리들의 관직을 교체하는 인사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