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추(悲秋) 2

by 몽중몽

*


문을 닫아 건 방 안으로 늦가을의 냉기가 스며들었다.

한낮이었으나 햇살은 따뜻하기보다 맑고 서늘했다.

창호지 너머로 번진 햇빛이 바닥과 마루 끝에 얇은 선을 그었다.

낙리는 그 빛의 경계를 멍하니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염온과의 대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와 헤어진 후, 발걸음이 어디를 향하는지도 모른 채 한참을 이리저리 헤맸다.

어디를 가는지도,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모른 채.

정신을 차려보니 집이었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으나, 지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작은 발 소리가 들렸다.

갈색 강아지가 문틈을 비집고 들어와 낙리 앞에 섰다.

그리고는 그의 옷자락을 물고 잡아끌었다.

낑낑.

적막한 방 안에 울음소리가 울렸다.

낙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저 멀고 흐릿한 기억 속으로 가라앉을 뿐이었다.



‘주인은, 의외로 너그러운 사람이었지.’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렇게 보였다.

노비들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고, 끼니를 거르게 하는 일도 없었다.

이따금 낙리를 불러 붓을 잡게 했다.

획을 긋는 법부터 차근히 알려주며, 간단한 글자와 글귀를 읽고 쓸 수 있게 도와주었다.

낙리와 가족들은 그것이 그저 드문 호의라 여겼다.

그래서였다. 그를 의심하지 못한 것은.

그날……. 주인은 아무 설명 없이 ‘다들 따라오라’고만 했다.

가족들은 서로 얼굴을 살폈지만, 누구도 거역하지 못했다.

막내를 품에서 떼어 가는데도, 감히 붙잡지 못했다.

나중에 돌아올 것이라고.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라고.

그렇게 믿으려 했다.

그저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주인이 다시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돌아오지 않았다.

낙리가 그 자리에 남지 않고 주인을 찾아 나선 것은, 동생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아니, 그것만은 아니었다.

주인도 걱정되었다. 자비롭고 너그러운 주인이.

어리석게도.

‘말을 듣지 않고 따라갔던 덕분에……나만 살아남았지.’

그날의 어둠과 쇳내가 떠오른다.

‘차라리 그때, 함께 죽었더라면.’

그 생각이 스치자 낙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매일 밤 찾아오는 생각이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무언가 작고 따스한 것이 손에 닿았다.

고개를 돌리니, 강아지가 부드러운 앞발로 낙리의 손등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동그란 눈이 오롯이 그를 향했다.

강아지는 또다시 낙리의 옷자락을 물고, 낑낑대며 잡아끌었다.

“미안해. 오늘은 같이 놀기 어려울 것 같네.”

낙리는 긴 털을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자 강아지는 불만스럽게 코를 울리고 작게 칭얼거렸다. 꼬리가 바닥을 쓸었다.

낙리는 시선을 돌렸다. 햇빛이 아까보다 더 길게 바닥에 늘어나 있었다. 해가 슬슬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영유의 얼굴이 떠올랐다.

또 만나야 한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내일도 와.’

소년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낙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을 짚는 손이 평소보다 무거웠다.

강아지의 칭얼거림을 뒤로한 채, 그는 문을 열었다.

문밖의 하늘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


창호 문은 이미 노을로 붉게 물들었으나, 서재 안은 은은한 금빛으로 채워져 있었다.

영유는 책상 위에 펼쳐진 경전을 내려다보며 붓을 움직이고 있었다. 글 선생이 내준 숙제였다. 필사를 시작한 지 벌써 한 시진이 지났건만, 아직도 절반도 채 마치지 못했다.

마주 앉은 자세로 영유의 붓놀림을 살펴보던 낙리는 입을 열었다.

“방금 쓰신 구절이 중요합니다.”

그의 손가락이 한 줄을 가리켰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혹되지 않고 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않으며 용감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부분이, 어제 배우신 내용의 핵심입니다. 선생님께서도 여러 번 강조하셨던 대목이니…….”

영유는 잠시 붓을 멈추고 그 문장을 다시 읽어 내려갔다.

그때였다.

“안녕, 주인님!”

닫힌 창가 쪽에서 돌연 기묘한 소리가 끼어들었다.

건강해! 건강해!”

또박또박, 사람 목소리와도 같은 소리였다.

창가에 걸어 둔 새장 속, 커다란 앵무새는 녹색 깃을 흔들며 다시 한번 말했다.

건강해! 안녕!”

영유의 고개가 슬그머니 뒤로 돌아갔다. 눈동자가 새장 쪽으로 향했다. 손에 든 붓은 이미 힘없이 기울어져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 몸이 흔들렸다.

“도련님.”

낙리가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

“오늘까지 이 장을 모두 필사하셔야 합니다. 선생님께서 내일 아침 일찍 오신다 하셨습니다.”

“……알았어.”

영유는 마지못해 다시 붓을 고쳐 잡았지만, 눈은 자꾸만 창가 쪽을 힐끗거렸다.

느릿느릿 움직이던 붓은 이내 멈추었다.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영유는 불쑥 입을 열었다.

“리야. 너, 염석이랑 친하지 않아?”

낙리의 손이 무릎 위에서 멈칫했다.

“예, 알고 지낸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 사람, 요즘 무엇을 하고 지내지?”

낙리의 시선이 일순 허공을 헤맸다. 대답을 고르듯 입속에서 한 번 굴린 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호위 일을 하기도 하고, 무예 사범을 하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자세한 사정은……저도 잘 알지 못합니다.”

목소리가 어쩐지 흐려졌으나, 영유는 신경 쓰지 않았다.

소년은 붓을 내려놓으며 빙그레 웃었다.

“염석에게 전해라. 다시 이 집에서 일해도 된다고.”

낙리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실은 말이야.”

영유는 이어 말했다.

“내년에는 병부(兵部)로 들어갈 것이잖아. 그러려면 무예도 좀 더 단련해야지.”

‘무관으로 임관할 것도 아닌데…….’

낙리는 속으로 중얼거렸으나 차분하게 물었다.

“예전에 도련님께 무예를 가르쳐 주시던 사범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 선생님은 고향으로 내려가셨어. 한동안은 올라올 수 없다고 하더라.”

영유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침 이번에 내 직속 호위를 두어 명 두기로 했다. 이전에 염석에게 종종 활쏘기와 격검(擊劍)을 배웠으니, 그 사람이 다시 와 주면 좋을 것 같아.”

낙리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이전에…….”

“응, 괜찮아.”

영유는 어쩐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아버님에게 이미 여쭈어보았는데, 괜찮다고 하셨다. 그 사람도 다시는 실수하지 않겠지.”

낙리는 영유가 보지 못하게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등잔불이 조용히 타들어갔다.

창가의 앵무새는 이제 조용했다.

창밖으로는 저녁 어스름이 짙어지고 있었다.


*


귀가한 낙리는 곧바로 서안(書案) 앞에 자리를 잡았다.

느리고, 조심스럽게 한 획 한 획을 그어냈다.

흔들리는 불빛이 종이 위로 번지며 붓끝의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단순히 막내 공자가 무예 수련을 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승상저의 분위기는 분명 예사롭지 않습니다.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으니…….’

붓이 멈췄다.

다음 글자가 나오지 않았다.

먹물 한 방울이 종이 위에 떨어졌다.

검은 점이 천천히 번져, 방금 쓴 글자를 잠식해 갔다.

그것을 바라보던 낙리의 시선이 허공으로 풀려났다.

또다시 과거가, 물결처럼 스며들었다.



그날, 자신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왜 관군이 가족들을 죽였는지. 주인은 어떻게 된 것인지.

주인이 데려간 어린 동생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오직 한 가지만 알 수 있었다.

죽지 않으려면 달아나야 한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가족을 잃었다. 주인도 잃었다. 의지할 곳은 없었다.

노비 출신의 어린아이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울고, 떨고, 숨었다.

하지만 살아남아야 했다.

하루하루 버티는 것이 최선이었고, 그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구걸을 하고, 남의 집 일을 거들며, 때로는 훔쳐서라도 살아갔다.

그러나 뒤집힌 세상의 소문은, 떠돌던 아이의 귀에도 스며들었다.

폭군이 몰락하고, 새 질서가 들어섰다는 이야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또 다른 이야기.

충의를 위하여, 한 사람은 목숨을 바쳤고 다른 한 사람은 배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살았다.

그리하여 결국 주인의 혈육을 지켜냈다는 ‘미담’



낙리는 이를 악물었다.

붓을 쥔 손이 떨렸다.

또다시 먹물이 종이 위에 떨어졌다.



소문을 듣고도 한참을 생각하고서야 모든 것을 조각 맞추듯 깨달을 수 있었다.

주인이 왜 동생을 데려갔는지.

그리고 막연히 예감하면서도 애써 외면해 왔던 사실.

그 아이가 어떤 운명을 맞이했는지.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무것도.

주인은 이미 죽었다. 제 목숨뿐 아니라 타인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충성심’을 증명하고는.

모든 원흉인 폭군도 유배지에서 병사했다.

그리고 주인의 벗은…….

주인과 함께 그 일을 꾸몄던 사람은, 새로운 권력자의 최측근이 되어 있었다.

복수는커녕, 가까이 다가가 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존재가 되어버린 후였다.

높은 담장 밑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분노에 휩쓸려 무모하게 움직였다가는, 그저 의미 없이 사라질 뿐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소문을 들었다.

‘유민들을 구휼하는 자애로운 어르신’이 있다고.

그리고 구휼을 나온 관리가 그의 스승을 언급했다.

‘소(蘇) 공’에 대해 들었을 때,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주인이 누군가와 나누던 대화 속에서 입에 올렸던 호칭.

그것은 하늘이 준 기회였다.

다시 한번,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던 그때처럼.

그 관리에게 다가가 자신이 글을 안다는 것을 은근히 드러냈고, 어렵게 거두어졌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애썼다.

한편으로는 기회를 노렸다.

정말로 소 공과 영 대인의 사이가 좋지 않다면,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까…….

그 미약한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결국 마지막 시도가 성공했지.’

그래서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다.

낙리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먹물은 사방으로 번져, 종이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

짧게 한숨을 쉬고 그 종이를 옆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깨끗한 새 종이를 꺼내어 등불 아래에 반듯이 놓았다.



주인은 소 공에 대해 좋게 말하지 않았었다.

불우한 아이들을 거두는 것도, 사재(私財)를 쏟아 구휼을 하는 것도 모두 속셈이 있어서 하는 일이라고.

겉으로는 성인군자처럼 행동하지만, 속으로는 권력만을 탐하는 위군자(僞君子: 위선자)라고.

영 대인 같은 분과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소 공은 언제나 인자한 눈매에 부드러운 웃음을 띠고 있었다.

부귀영화에는 뜻이 없는 듯 행동하고 말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가까이서 본 그 사람은, 권모술수에 밝고 자신의 위치와 영향력을 위해서라면 냉혹한 수단도 서슴지 않는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낙리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분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도와주겠노라 말했다.

이용당한다 해도……상관없다.

소 공은, 내 손을 잡아준 은인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낙리는 다시 붓을 들어 종이에 가져갔다.

조심스럽게, 또박또박 글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등불의 불꽃이 가물거리며 흔들렸다.

창밖으로는 차가운 바람이 스산한 울음을 흘렸다.

하지만 더는 손이 떨리지 않았다.



* 知者不惑 仁者不憂 勇者不懼 - 논어(論語) 中.


목요일 연재
이전 06화비추(悲秋)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