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煩意亂 : 마음이 번거롭고, 뜻이 어지럽다. 의지(意志)가 뒤흔들려 마음이 안정되지 않음.
*
낙엽이 흩날리는 마당.
염석은 아내와 함께 빨래를 털어 널며 가을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누가 오나 봐요.”
아내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걸음걸이가 대문 쪽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낙리였다. 염석은 저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오, 어서 와.”
“안녕하십니까. 형님, 형수님.”
낙리는 부부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얼굴에는 여느 때처럼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온 그를 본 염석의 미간이 좁혀졌다.
“안색이 왜 이리 안 좋아? 어디 몸이라도 상한 거야?”
낙리는 제 뺨을 한 번 쓸어내리며 멋쩍게 웃었다.
“별일 아닙니다. 날씨가 서늘해지니 기운이 좀 처지는 모양입니다.”
“조심해야지. 이리 들어와.”
염석이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길을 거두지 못한 채, 낙리를 방으로 안내했다.
낙리가 마루에 오르려 할 때, 안채에서 염온이 아이와 함께 나왔다. 조카와 놀아주다가 소리를 듣고 나온 모양이었다.
“아, 어서 오세요.”
염온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낙리를 보자 순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서 오세요!”
아이가 염온을 따라 제법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낙리는 아이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잘 있었어요?”
그러나 아이에게서 눈을 들어 염온을 보는 순간, 그의 웃음이 미묘하게 굳었다. 염온도 눈길을 피하며 고개만 까닥했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낙리의 얼굴에 멈췄다. 당황스러움 속에서도 걱정이 불쑥 튀어나왔다.
“……어디, 아프세요?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여요.”
낙리는 짐짓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아닙니다. 찬바람을 좀 많이 쐬어서 그런가 봅니다. 괜찮아요.”
“네…….”
염온은 더는 아무 말 없이 아이와 함께 옆방으로 향했다.
염석은 둘 사이의 공기를 감지했지만, 묻지 않고 낙리를 방으로 이끌었다.
“혹시 도련님 심부름으로 왔어?”
염석이 먼저 물었다.
“며칠 전에 추 장사가 나 불러서 그랬거든. 다시 도련님 아래에서 일해도 된다고.”
“아, 도련님이 저에게 전하라고 했는데 이미 전해 들으셨군요.”
“응, 그런데 말이지…….”
염석은 눈썹을 찌푸렸다. 어딘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게……. 감사하기는 한데…….”
염석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몇 달 전에 식객이나 호위들을 잔뜩 내보내지 않았었나? 너도 그래서 나온 거잖아?”
“그렇습니다.”
낙리는 끄덕였다.
염석은 천천히 말했다.
“다시 들어가도 얼마나 일할 수 있겠어. 언제 또 사람을 줄일지도 모르고……”
그는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나는 예전에 실수한 것도 있잖아.”
“그건…….”
낙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지금은 상단에서 호송 일을 하고 있는데, 보수도 괜찮고 경호 대장께서 날 좋게 봐주셔서 슬슬 자리를 잡아가고 있어.”
염석은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승상가의 일도 보수가 좋기는 하지. 하지만 오래 일하지는 못할 것 같아. 게다가 이제 도련님도 어린애가 아니시잖아. 예전처럼 쉽지는 않을 거야.”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도련님 밑에서 일할 때는, 잘하면 말단 무관 자리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지. 큰 도련님도 계셨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으로서는……가능성이 없어 보여.”
낙리는 안타까운 표정이 되었다.
“도련님께서 형님을 그리워하시는 것 같은데, 좀 서운해하시겠습니다.”
“설마.”
염석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
“도련님 호위가 한둘이 아니었는데. 나 하나 없다고.”
“그래도 도련님께서 내년에 병부(兵部)로 들어가신다는데, 그러면…….”
“그래?”
낙리의 말에 염석이 시선을 멈췄다. 순간 망설이는 기색이 스쳤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어차피 도련님이 아니라 승상 대인께서 해주시는 것 아니야. 나에게까지 기회가 있을까?”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실수도 있었고 그렇게 뛰어난 편도 아니야. 나 말고도 사람은 많고.”
염석은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도련님께 활쏘기 가르치시던 선생님이 계셨지. 그분이 고향에 내려가기 전에 잠깐 뵈었어. 그때 하시는 말씀이, 승상가 분위기가 좋지 않다고 하시더군.”
"그런가요?"
낙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얼버무렸다.
“……뭐, 대저택은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네가 도련님께 좋게 전해 드려. 내가 정말 아쉽지만, 다시 모시기는 어렵겠다고.”
둘은 이후 한동안 잡담을 나누었다.
해가 기울 무렵, 낙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낙리가 마루로 나오는데, 뒤에서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들렸다. 염온이었다.
“낙 선생…….”
염온의 눈빛이 흔들리며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듯했지만, 입술만 몇 번 떨릴 뿐이었다.
낙리는 주변을 살피고는 염온 쪽으로 몸을 돌렸다.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죄송합니다. 곧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염온의 눈가에 걱정의 빛이 서렸다.
“……알겠습니다. 낙 선생에게 부담을 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마당으로 내려선 낙리는, 부엌에서 얼굴을 내민 염석의 아내에게 묵례를 하고 대문을 나섰다.
밖으로 나가자 등 뒤에서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낙리는 걸음을 멈췄다.
한참을 서 있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담장 너머로 웃음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걸었다.
저녁 바람이 옷자락을 스쳤다.
그의 뒷모습이 골목 끝에서 사라졌다.
*
방 안은 여전히 따뜻했다.
낙리가 떠난 뒤, 염온과 염석의 아내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는 어머니의 품에서 몸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염석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낮게 중얼거렸다.
“좋은 기회였을지도 모르는데…….”
염석은 망설이다가 염온을 바라보며 물었다.
“누나는……거절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고 했지?”
“응. 그렇게 생각해.”
염석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낙리한테 들은 게 있었어?”
염온의 손이 조카의 손 위에서 멈췄다. 잠시 후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없어.”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없는데…….”
염온은 무심코 시선을 피하려다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그 선생님도 그랬다며. 돌아가는 분위기가 좋지 않다고.”
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에 그 일 있고 나서는, 도련님 곁 사람들도 여러 번 바뀌었고.”
염석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시선은 여전히 허공을 맴돌았다
“이미 마음을 정했잖아요.”
염석의 아내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지금 하는 일에 더 전념하세요. 상단 일도 잘 풀리고 있다면서요. 이렇게 조금씩 모으면, 가게 하나쯤은 충분히 구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요. 아무리 좋아 보여도 내 자리가 아니면 소용없지요.”
염석은 그제야 작게 웃었다.
그는 긴장이 풀린 얼굴로 아이를 향해 손을 내밀어 받아 안았다.
아이는 금세 염석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염석은 아이를 안아 들고는 장난스럽게 흔들어 주었다.
염온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방 안에 밝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옷자락을 쥔 염온의 손에는, 조용히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
그날 저녁, 낙리는 승상저에 도착하자마자 추홍에게 불려 갔다.
추홍은 곧바로 염석에 대해 물었고 낙리는 최대한 완곡하게 염석의 입장을 전했다.
하지만 추홍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녀석. 이전에는 다시 일하게 해달라고 사정을 하더니, 정작 기회를 주니까 놓치는구나.”
그 목소리에는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낙리는 난처하다는 듯 대답했다.
“지금 일하는 곳이 꽤 맞는 모양입니다.”
“딴생각은 안 하는 녀석이라……그 녀석이 적당했는데.”
낙리는 시선을 내리고 그저 아무 말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도련님이 자네에게도 따로 말했다는데, 자네가 잘 말해볼 것이지…….”
추홍은 몇 마디 더 하다가 낙리를 놓아주었다.
“알았다. 가봐라.”
추홍의 손짓에 낙리는 허리를 숙이고 방을 나왔다.
그는 곧바로 정원을 가로질러 별채로 향했다.
풀벌레 소리만이 고요한 밤을 채웠다.
*
낙리는 생각에 잠긴 채 천천히 걸었다.
별채가 가까워졌다.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별채에 도착하자 낙리는 곧장 영유의 방으로 향했다. 앞을 지키던 호위가 문을 열어주자 서안 앞에 앉은 영유의 모습이 보였다.
책을 보던 소년은 낙리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늦었구나.”
“죄송합니다. 추 장사님께서 염석 씨의 일로 부르셨습니다.”
낙리가 방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영유는 책을 덮으며 물었다.
“염석이 다시 오기로 했느냐?”
“그게…….”
낙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기가 힘들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아쉽지만 도련님을 다시 모시기 어렵겠다고…….”
영유의 표정이 굳었다.
“……그렇구나.”
낙리는 말없이 소년을 바라보았다.
영유는 곧 기분이 상한 듯 중얼거렸다.
“내가 부르는데…….”
낙리는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사람이……. 이전에 실수한 일로 도련님께 면목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건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영유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러고는 작게 혀를 차며 덧붙였다.
“나도 내 부하가 더 있어야 하는데…….”
낙리는 머뭇거렸다. 무언가 위로의 말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저택의 사람들 모두 도련님께 충직한…….”
영유가 낙리를 똑바로 보았다.
“너 말고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다 아버님의 사람들이잖아.”
낙리는 숨이 멎는 듯했다.
하지만 천천히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췄다.
“…….”
낙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영유는 한숨을 쉬며 다시 책을 펼쳤다.
“됐어. 글이나 보자.”
그러나 책 위의 손이 꽉 쥐어져 있었다.
촛불만이 크게 흔들렸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