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번의란(心煩意亂) 2

by 몽중몽

*


승상저의 높은 담장 아래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낙리는 걸음을 재촉하였다. 영유가 아침 일찍 보자고 한 터였다.

대문 앞에 이르렀을 때, 마침 안에서 누군가 나오는 기척이 들렸다.

낙리는 걸음을 멈췄다. 문이 열리며 나타난 사람은 염석이었다.

“형님.”

낙리가 인사를 하자, 염석은 고개를 돌렸다.

“아, 도련님 뵈러 온 거지?”

“네. 형님도……이른 아침부터 일이 있으셨나요?”

“추 장사가 불렀지 뭐.”

염석이 대문을 나서며 대답했다. 그의 표정은 평소의 느긋함과는 달리 어딘가 불만스러워 보였다.

모레부터, 도련님 활쏘기를 가르치라고 하더라.”

낙리는 반 박자 늦게 반응했다.

“그래요?”

등 뒤에서 문이 닫히고 나자 염석이 걸음을 옮기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시키는데 별 수 있나.”

“그러셨군요…….”

“아침 일찍 불러서는 일방적으로 말하더라. 내 사정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말이야.”

염석은 바닥의 낙엽을 발로 툭 찼다.

“지금 상단 쪽 일이 얼마나 바쁜데. 사람도 모자라고, 날짜도 다 촉박한데 말이야. 이래저래 참 난감하단 말이지.”

낙리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곤란하시면…….”

목소리가 낮아졌다.

“사정이 여의치 않다고 솔직히 말씀드리시는 것도 방법이 아닐는지요.”

“내가 그럴 수 있겠어? 도련님이 친히 날 지목하셨다는데. 말만 부탁이지 사실상 명령이야.”

염석이 피식 웃으며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보수만 따지면 나쁜 제안은 아니긴 한데…….”

염석은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담장 너머를 한 번 보더니, 낙리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아무튼. 이후에도 일이 있어서 난 이만 간다. 너도 일 있지?”

“네. 조심히 가십시오.”

낙리가 낮게 답했다.

염석은 손을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이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낙리는 잠시 그 자리에 섰다가, 곧 대문을 향해 걸었다.

발밑의 낙엽이 부스럭거렸다.


*


낙리는 영유의 거처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방 안은 한산했다. 서안 위를 차지해야 할 책 더미가 보이지 않았고, 먹그릇도 비워진 채였다.

“어서 와.”

영유의 대답은 어딘가 건성이었다.

소년의 눈빛은 평소와 달랐다. 입가가 괜히 올라가 있었고, 어깨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들뜬 기색이라고 해야 할 듯했다.

“도련님, 오늘 수업은…….”

“아, 그거? 오늘은 글 선생님이 못 오신대. 감기라나.”

그 말에 낙리는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빈 상 위를 다시 보았다.

“그러니 숙제는 나중에 해도 되고.”

영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연못에 가자. 같이.”

낙리가 의아한 얼굴을 하자, 영유는 창가를 가리켰다.

햇빛을 받아 반들거리는 큰 새장 안에서 앵무새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새는 부리로 새장 문의 걸쇠를 툭툭 쪼아대며, 발톱으로 창살을 긁어댔다. 끼익, 끼익 거리는 쇳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려 퍼졌다.

“쟤가 답답한지 계속 저래. 바깥공기 좀 쏘이게 해 주려고.”

영유는 덧붙였다.

“요즘 괜히 성질도 나빠진 것 같단 말이야.”

영유는 그렇게 말하고는 낙리의 대답을 기다릴 새도 없이 방문을 나섰다.

“거기, 내 방에서 새장 가지고 따라와라!”

복도 밖에서 하인에게 말하는 영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낙리는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어린애도 아닌데, 공부 안 하게 되었다고 저렇게 좋아할 리는 없고…….’


*


저택 안쪽의 연못에 이르자, 물 위에는 가을빛 낙엽이 군데군데 떠 있었다. 바람에 밀려 잔물결이 일 때마다 잎사귀가 서로 부딪히며 자리를 바꾸었다. 연못가의 버드나무도 이미 반쯤 잎을 잃고, 가지 사이로 가을 햇살이 비쳐 들었다.

영유는 연못가의 평평한 돌 위에 새장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허리를 굽혀 앵무새와 눈을 맞췄다.

“어때, 여기 경치 아름답지?”

앵무새는 깃털을 부풀리고 몸을 바짝 웅크린 채, 대답이 없었다.

“외출해서 기분 좋지 않으냐?”

새는 고개를 까딱이며 두서없이 말을 쏟아냈다.

“안녕. 좋아. 하세요.”

“이런 멍청이.”

영유는 피식 웃으며 새장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 하인을 향해 손짓했다.

“간식 좀 가져와라. 의자도 두 개 가져오라 하고.”

“예, 도련님.”

하인이 물러가고, 영유와 낙리만 남았다. 낙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좋은 일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응! 아까 들었는데, 염석이 나 활 연습을 봐주기로 했데.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영유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혼사가 드디어 결정됐어. 그동안 지지부진하더니, 어제 아버님께서 확정하셨다고 하시더라고.”

낙리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가 곧 밝은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축하드립니다, 도련님.”

“그쪽 규수가 어제 편지도 보내 주었어.”

영유의 목소리는 점점 빨라졌다.

“혼례를 치르고, 출사도 하게 되면……나도 이제 어른이잖아?”

영유의 목소리는 설렘으로 가득했다.

“아버님을 돕기 위해 노력할 거야. 아버님의 아들로서 부끄럽지 않게!”



낙리는 영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한껏 빛나는 그 표정을.

이렇게 들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째서인지, 가슴 한구석에 무언가 불편한 것이 똬리를 틀었다.

영유가 저렇게 행복해 보여서일까, 아니면…….

그는 시선을 돌렸다. 연못 위로 내려앉은 낙엽이 잔잔한 파문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공부에도 더 전념해야지!”

영유는 여전히 낙리를 보지 않은 채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목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울렸다. 연못 너머까지 울려 퍼질 정도로.

낙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려면, 지금처럼 노시는 모습은 조금 삼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건 잠깐 머리 식히는 거야. 공부는 할 거야. 나중에.”

그때 새장 안에서 다시 소리가 튀어나왔다.

“나중에. 건강해. 나중에.”

영유가 웃음을 터뜨렸다. 낙리는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린듯한 미소를 지었다.

연못 위로 또 한 잎의 단풍이 떨어져, 서서히 물에 잠겼다.


*


초저녁의 공기는 한낮보다 훨씬 차가웠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의 어스름이 지붕 위에 얹혀 있었고, 낙리는 자신의 초가집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앞에, 누군가 있었다.

낙리는 걸음을 멈췄다.

“……누님?”

그는 순간적으로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목소리가 떨렸다.

염온은 장옷을 여미고 서 있다가 그를 보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낙 선생.”

그녀의 손에는 작은 보자기에 싸인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오늘 석이가 승상저에서 낙 선생을 봤다고 했어요.”

염온이 한 걸음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안색이 여전히 좋지 않았다면서요.”

‘그랬나?’

“걱정이 되어 약을 지어 왔어요.”

염온이 보퉁이를 들어 보였다.

낙리는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번거로우셨겠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둘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루 위에 웅크리고 있던 강아지가 염온을 향해 짖기 시작했다.

하지만 염온은 웃으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무를 작게 썬 조각이었다.

“자, 여기.”

염온이 무 조각을 던지자, 강아지는 즉시 짖는 것을 멈추고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전혀 집을 못 지키는구나, 넌.”

낙리가 강아지를 내려다보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강아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 무를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낙리의 말에 염온은 작게 웃었다. 두 사람은 마루 끝에 나란히 섰다.

“약만 건네 드리고 돌아갈 생각이었어요.”

염온이 말했다. 그리고는 낙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요즘 많이 힘드신 것은 아니신지요.”

낙리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괜찮습니다.”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그냥……. 아직 생각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염온은 그 얼굴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무언의 시간이 짧게 흘렀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약은 하루에 한 번, 자기 전에 드세요. 며칠 드시면 좀 나아지실 거예요.”

“고맙습니다, 누님.”

낙리가 염온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나섰다. 염온은 대문을 나서며 한 번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

낙리는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염온이 떠난 후, 낙리는 마루에 걸터앉았다.

강아지는 염온이 떠난 자리를 킁킁거리다 낙리의 발치에 와 누웠다. 어둠이 초가의 처마 아래로 내려앉았다.

낙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하나둘 떠오르고 있었다.

“지금…….”

작게 중얼거렸다.

“지금이라면…….”

말을 끝맺지 못했다.

밤바람이 차갑게 불어왔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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