偸香 : 남녀 간에 사사로이 정을 통함. 악한 일을 하면 자연히 드러남.
가오(賈午)가 집안의 귀한 향을 빼돌려 자신의 연인인 한수(韓壽)에게 선물했는데, 그 향내 때문에 두 사람의 밀통이 들통났다는 서진(西晉) 시대의 일화에서 유래
*
햇살이 쏟아지는 오후, 승상저 별채의 마당에서는 과녁을 향해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가 울렸다.
탁.
화살이 과녁의 중앙 부근에 꽂혔다. 관중(貫中)은 아니었지만, 나쁘지 않은 솜씨였다.
“오, 괜찮으신데요?”
염석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으셨는데, 이 정도면 꽤 잘하시는 편입니다. 보통은 과녁에 맞히는 것만 해도 한참 걸리는데.”
영유가 활시위를 늦추며 피식 웃었다.
“아부가 좀 심한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부가 아니라 사실이죠. 보통 처음 배우시는 거면 이 정도로는 안 나옵니다.”
“선비로서의 소양이라고, 예전에 배운 적이 있어. 뭐, 그때는 그냥 심심풀이로 몇 번 해본 정도였지만.”
“아, 그러셨군요.”
염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유는 화살통에서 다시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걸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 염석을 돌아보았다.
“아, 참. 리가 아픈 것은 들었어?”
“낙리가요?”
염석이 눈을 깜빡였다.
“감기인 것 같아. 옮을까 봐 며칠은 못 온다고 하더구나.”
영유가 화살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글 선생님이 감기로 누으셨다는데, 그분에게 옮은 것 같아. 어째서 매번 같이 공부하던 나는 멀쩡하고 가끔씩 보던 리만 옮은 건지 모르겠어.”
“그러게요.”
염석이 짧게 대답했다.
‘결국 자리보전을 했네……. 누나랑 문병 가야겠군.’
그러고 보면 요즘 두 사람 분위기가 이상했다. 확인할 겸 같이 가야지.
“석아?”
“아, 예. 도련님.”
“괜찮아? 갑자기 멍하니 있던데.”
“아, 아닙니다. 그냥, 잠깐 생각이 났던 게 있어서요.”
염석이 얼른 웃으며 손을 저었다.
“자, 다시 한번 해보시죠. 훌륭하십니다! 점점 나아지시네요.”
열심히 영유를 칭찬하면서, 염석은 슬쩍 낙리의 집 방향으로 시선을 주었다.
*
조심스럽게 싸리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갈색털의 강아지가 요란하게 짖으며 뛰어나왔다.
“왈! 왈!”
염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저 녀석을 몇 년이나 돌봐 주었는데, 몇 달 만에 저러는 것을 보니 머리가 나쁘거나 매우 건방진 녀석이 틀림없었다.
“시끄럽다.”
염석의 뒤에 있던 염온이 낮게 말하며 나서자 강아지는 즉시 꼬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짖는 소리는 이어졌다.
그때, 장지문이 열리며 낙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보다 핼쑥해 보이는 얼굴에 염온의 눈이 커졌다.
“웬일로 두 분이 함께…….”
“갑자기 찾아와 미안해요.”
염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석이가 도련님께 들었어요. 몸이 많이 불편하시다기에 걱정이 되어 왔어요.”
염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추워지는데 감기라니. 조심해야지.”
낙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옅게 웃었다.
“미리 약을 먹어 두어서, 지금은 많이 나아졌습니다.”
“그래도 안색이…….”
염온이 말을 잇다가 멈췄다.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죠.”
세 사람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괜찮으세요?”
자리에 앉자마자 염온이 다시 물었다.
“네. 걱정 마세요.”
낙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약간 잠겨 있었다.
염온의 시선은 낙리의 얼굴에 오래 머물렀다. 거기에는 미처 지우지 못한 염려가 섞여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염석은 누나와 낙리를 번갈아 보았다. 뭔가 분위기가 어색했다. 지금은 둘 다 조심스러워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염석이 속으로 생각하는 사이, 낙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차(茶)라도…….”
“아니, 괜찮아요.”
염온이 빠르게 대답했다.
“오래 있으면 피곤하실 테니, 잠깐만 있다 갈게요.”
“……네.”
낙리는 작게 답했다. 그리고 다시 말이 없었다.
염석이 무어라 한 마디 하려는데, 문밖에서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렸다.
염석은 황급히 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으르렁거리는 맹견을 보고는 겁에 질린 소년과, 그 앞을 막아선 호위였다.
염석은 한숨을 쉬며 황급히 밖으로 나왔다.
‘저 멍청하고 건방진 녀석 같으니라고!’
영유는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치다가 들고 있던 육포를 던져주었다, 하지만 강아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이를 드러내며 낮게 짖었다. 주인인 낙리가 나와서 목줄을 잡아당겼으나 진정할 기미가 없었다.
결국 염석이 강아지를 창고로 끌고 가 묶어 두는 사이, 낙리는 영유에게 인사를 하였다.
“이 누옥(陋屋)에 어인 일로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영유는 낙리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아프다더니, 괜찮아?”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행이네.”
영유는 해맑게 웃으며 스스럼없이 방으로 들어섰다. 창고에서 돌아온 염석은 슬그머니 안쪽을 보았으나 어느새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염온은 뒷문으로 나간 듯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백탕(白湯: 맹물)이라도 가져오라고.”
영유의 호위가 염석을 타박하자 그는 하는 수 없이 부엌으로 향했다.
물을 들고 다시 돌아왔을 때, 낙리는 영유가 건네준 것으로 보이는 서찰 한 통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직접 쓰신 겁니까?”
“응……. 조금 도움을 받기도 했고.”
소년은 어쩐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낙리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여기, 투향(偸香)이라는 말은…….”
“어? 이상해? 누가 알려준 건데.”
염석은 잠깐 시선을 돌려 영유의 호위를 보았다. 호위는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 녀석이군.
“고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낙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하며 넘어갔다.
“아가씨께 편지를 보내면 그 댁의 어르신들께서 먼저 보실 텐데. 좀 경박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표현이라서…….”
“그렇구나. 그리고…….”
잠시 대화가 이어지다가 소년이 일어섰다.
“나 오늘 장터 구경 가려고 했는데, 같이 나가자.”
“예?”
“계속 아파서 누워 있었잖아. 같이 바람 쏘이면 좋을 것 같아. 너무 누워만 있어도 안 좋대.”
“저, 도련님…….”
호위가 무언가 말하려 했고, 염석도 입을 열려던 참이었다.
“예. 감사합니다.”
낙리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수락하였다.
“저기, 말이야.”
나가기 전,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영유는 염석에게 말을 걸었다
“예?”
“너네 누나 이름이 뭐였지?”
“염온이라고…….”
“응. 전에 추 장사에게 들었는데, 두 사람 혼담이 오가고 있다며? 맞지?”
“……예.”
염석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그 옆에서 낙리는 순간 걸음을 멈칫했다가, 곧 무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영유는 그런 기색을 전혀 개의치 않은 채 환하게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지금은 어떻게 됐어? 혼담은 어디까지 갔어?”
시선이 자연스레 낙리에게로 옮겨왔다. 낙리는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아직은……큰 진전이 없습니다.”
“그래?”
영유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낙리는 잠깐 시선을 피했다가 한 박자 늦춰서 말했다.
“제가 아직 제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한 상황이라서요. 그저……시간을 두고 있는 정도입니다.”
얼버무린 대답이었지만, 더 설명할 뜻은 없어 보였다. 영유는 잠시 낙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웃음을 되찾았다.
“음, 그렇구나.”
그리고는 다시 신이 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쓸데없는 참견 같긴 한데, 나는 말이야. 석이 누나랑 리가 잘 됐으면 좋겠어. 너희 둘 다 내 부하들이잖아!”
낙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살짝 숙였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여전했지만, 눈빛은 조금 복잡해 보였다.
신이 나서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염석은 내심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그것 참……정말로 쓸데없는 참견입니다.’.
*
세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염석은 다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염온을 기다릴 참이었다.
잠시 후 뒷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다들 나갔어?”
염온이 방안을 살피며 물었다.
“응. 도련님이 같이 장터 구경하자고 하셔서,”
“참……. 안색이 그렇게 나쁜데 보이지 않나? 아픈 사람 끌고…….”
염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도련님은 정말로 신경 써준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 말리기가 어려웠어. 그리고 정작 낙리가 태연하게 받아들이니까…….”
“휴…….”
염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가라앉는 듯 보였다.
염석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누나.”
“응?”
“아까 도련님이 낙리에게 보여준 편지에 ‘투향’이라는 말이 있었거든. 도련님 호위가 알려준 것 같던데…….”
염석이 우물거렸다.
“내가 무식해서 그런다만, 향을 훔친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이야?”
“남녀가 사통(私通)한다는 뜻. 그런데 그보다……뒷이야기가 좋지 않아.”
“?”
염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거든. 그 이야기 속 여자의 집안이. 두 남녀는 물론이고, 그 사이의 자식들도 모두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어.”*
“그 녀석이 거기까지 알고 알려줬을 리는 없는데.”
“그야 당연히 모르고 말했겠지.”
그때 갑작스러운 소음에 둘의 대화가 끊어졌다. 어느새 목줄을 끊은 개가 다가와 염석의 주위를 맴돌며 짖고 있었다.
“왜 나를 이렇게 싫어하지?”
“글쎄?”
개는 바닥에 떨어진 육포를 슬그머니 집어먹더니, 염온이 손을 내밀자 언제 짖었냐는 듯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그리고는 마치 주인을 대하듯 재롱을 부렸다.
염석은 한숨을 쉬며 개를 흘겨보았다.
*
늦은 오후, 햇살이 낮게 기울어 장터를 물들이고 있었다.
장터를 지나는 마차 안, 영유는 창가에 거의 얼굴을 붙이다시피 하며 바깥 풍경을 구경했다.
떡을 써는 칼날, 생선을 고르는 손놀림, 흥정을 하며 높아지는 목소리.
그 모든 것이 신기한지 영유는 눈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 밖에서만 보지 말고 직접 걸어 다녔으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영유의 말에 호위가 낙리를 힐끗 바라보았다. 낙리는 내심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도련님.”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혹여 밖을 거니시다가 아는 분이라도 만나시면……시기가 시기인지라. 좋지 않은 소리가 돌까 염려스럽습니다.”
영유가 고개를 돌려 낙리를 봤다. 낙리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게다가 직접 걸어 다니시면 상당히 피곤하실 텐데, 재미는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가?”
영유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리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무는 햇살 속에서 장터의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영유는 한동안 말없이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낙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리야.”
“예, 도련님.”
“내일이나 모레부터 며칠 정도 시간이 좀 나느냐?”
낙리는 바로 대답하지 않다가 느리게 답했다.
“글쎄요. 상황에 따라……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럼 되는 걸로 알게.”
영유는 밝게 웃었다.
“공부하느라 바쁘겠지만, 나와 함께 며칠 지방에 내려갈 수 있겠어?”
낙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시선이 영유의 얼굴에서 마차 바닥으로, 다시 영유에게로 천천히 움직였다.
“어떤 일이신지요?”
“저연 어르신의 묘에 가려 한다.”
영유의 말이 떨어지자, 낙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움찔했지만, 마차의 흔들림에 묻혀 버릴 정도였다. 영유도, 호위 무사도 눈치채지 못했다.
“……갈 수는 있겠습니다.”
“상중에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되는 것은 나도 안다.”
영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연 어르신께 직접 말씀드려야 할 것들이 있다.”
마차 안이 조용해졌다.
“상이 끝나면, 내년에는 내 혼사도 있고 임관도 하지 않겠느냐.”
소년은 조용히 덧붙였다.
“그전에 저연 어르신의 위패를……승상가의 원당(願堂)**에 함께 모실 생각이다.”
낙리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마차 바닥의 나뭇결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렇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차가 돌부리를 밟아 덜컹거렸지만, 낙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창밖으로 장터의 소리가 멀어져 갔다.
* 가오의 언니 가남풍(賈南風 : 서진 혜제의 황후)이 실각하며 가오와 한수 일가를 포함한 친인척들은 모두 살해 당했다.
** 원당(願堂): 선조의 명복을 빌고 일족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왕실이나 특정 집안에서 창건한 사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