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살지기(肅殺之氣) 1

(수정)

by 몽중몽


肅殺之氣 : 만물을 죽이는 늦가을의 기운. 쌀쌀한 가을 기운이 초목(草木)을 말려 죽인다는 의미.
숙살(肅殺)은 기운이나 분위기 따위가 냉랭하고 살벌함. 혹은 냉혹하게 죽인다는 뜻.


*


창호문 사이로 스며든 노을빛이 서재를 물들이고 있었다.

해는 이미 기울었고, 온기는 빠진 시간이었다.

소 태사는 난초를 그리고 있었다. 가늘고 긴 잎이 종이 위에서 흔들렸다.

“나으리. 그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하인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들라고 하게.”

“예.”

붓끝이 마지막 획을 그었을 때, 문이 열렸다.

낙리가 들어섰다.

얼굴은 창백했고, 걸음걸이가 평소와 달랐다.

“피곤해 보이는군.”

소 태사는 붓을 벼루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앉게.”

그는 의자를 가리켰다.

“막내 공자도 아직 철이 없군. 몸이 성치 않은 사람을 끌고 그 산중까지 다녀오다니.”

소 태사가 가볍게 혀를 찼다.

“게다가 상중에 다른 사람의 묘를 찾는 것은, 죽은 적모(嫡母)에 대한 예가 아니거늘…….”

낙리는 가만히 서 있었다.

이윽고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소 태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나?”

“여쭐 것이 있어……뵙기를 청했습니다.”

낙리의 목소리는 정중했다. 하지만 그의 어깨와 손끝에는 긴장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일단 앉아서 말하게.”

소 태사의 말에도 낙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노인은 낙리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과 떨리는 손.

소 태사 천천히 일어나 낙리의 앞에 섰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추어 눈높이를 맞추었다.

낙리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무슨 일이 있었나?"

소 태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마치 스승이 제자를 걱정하듯.

“막내 공자가…….”

낙리는 한 번 숨을 삼켰다.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본인이 구해졌을 당시의 일을…….”

낙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때 죽은 사람이 저연 한 명만이 아니라는 것을……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그 이야기를 소 공께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아…….”

소 태사는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작년 초였지. 새해 인사를 왔을 때.”

그는 느린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고향에 내려가 있었고.”

곧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것을 이제야 자네에게 말했단 말인가?”

낙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허…….”

소 태사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스스로도 꺼림칙하다고 여겨서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한 것인가.”

말을 멈추었다가 덧붙였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아진 모양이군. 아니면…….”

목소리가 낮아졌다.

“말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낙리의 손이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천이 구겨지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소 태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불편하니 앉게.”

낙리가 입을 열려고 하자, 소 태사는 먼저 말했다.

“내가 불편하네.”

낙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일어났다.

두 사람은 의자에 앉았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노을빛이 점점 짙어졌다.

소 태사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낙리를 바라보며 기다렸다.

한참이 흘렀다.

낙리는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째서…….”

목소리가 갈라졌다.

“어째서 그 사실을…….”

한 번 숨을 들이마셨다.

“막내 공자에게 말씀하신 겁니까.”

소 태사는 일순 말이 없다가 되물었다.

“막내 공자가 어떻게 말하던가?”

서재 안은 이제 어스름했다.


*


승상저(丞相邸)의 사랑채.

방 안은 등불들로 환했다. 병풍의 산수가 불빛에 흔들렸다.

영유는 아버지 앞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영 승상은 찻잔을 내려놓고, 아들의 얼굴을 살폈다.

“네 부하에게…….”

낮은 목소리였다.

“그 이야기를 했느냐?”

영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버님.”

곧바로 이어 말했다.

“저연 어르신의 묘 앞에서 제 각오를 말씀드렸습니다.

영유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리에게도 그대로 전했고요.”

영유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도……제 마음을 이해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승상은 말없이 영유를 바라보았다. 복잡한 표정이었다.

이내 그는 손을 뻗어 영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툴지만 따뜻한 손길이었다.

영유는 눈을 깜빡였다. 곧 눈가에 기쁨이 어렸다.

“너는……어린 나이에 너무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구나.”

영유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영 승상은 작게 웃었다.

“의젓하구나.”

그는 손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

“소 공께서 네게 그 일을 알려주셨을 때는…….”

승상은 잠깐 말을 멈췄다.

“놀랐다. 네가 상처를 받을까 걱정되었지.”

영유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성장하는 계기가 된 것 같아 안심이구나.”

영유는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영 승상은 영유를 바라보았다.

등불 아래에서 아들의 얼굴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소 태사를 떠올리며 그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무슨 속셈이었는지…….’

등불은 밝게 타올랐다,

하지만, 승상의 시선 한편에는 꺼지지 않는 그늘이 남아 있었다.


*


낙리가 영유와의 대화를 모두 설명하고 나자, 방 안이 어두워져 있었다.

얼마나 오래 말했던 것일까.

노을빛은 완전히 사라지고, 서재에는 먹 냄새와 무거운 정적만이 남았다.

소 태사는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바깥을 향해 낮게 불렀다.

“촛불을 가져오게.”

낙리는 어둠 속에 앉아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하인이 초를 들고 돌아왔다.

“등(燈)을 밝히겠습니다.”

“내가 하겠네. 물러가게.”

하인이 물러났다.

다시 둘만 남았다.

소 태사는 초를 들어 천천히 등잔에 불을 붙였다.

불꽃이 일렁이며 방 안을 밝혀갔다.

어둠이 물러나고 그림자의 경계가 서서히 드러났다.

“먼저 말해두겠네.”

소 태사는 초를 촛대에 꽂으며 말했다.

“나는 ‘기꺼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

낙리가 고개를 들었다.

“영 대인이…….”

소 태사는 잠시 멈췄다.

“어린 아들의 마음을 다독이려 그리 말했겠지.”

낙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불빛이 안정되자, 소 태사는 의자로 돌아와 앉았다.

“나는 막내 공자에게 단지 진실을 일러주었을 뿐이네.”

그는 낙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이 저연만이 아니라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만…….”

소 태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죽게 된 이유에 대해서 명확히 말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야.”

낙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물었다.

“왜……막내 공자에게 그 일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언젠가 알게 될 일이었어.”

태사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그동안 막내 공자가 몰랐던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지. 누군가가 자기 대신 죽은 정황이 분명했는데.”

낙리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면, 주의를 기울여 알아보았다면……적어도 죽은 이가 저연 하나가 아님은 알 수 있었을 것이야.”

낙리는 쓰게 웃었다.

“막내 공자는 온실 속 화초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냉소가 가득했다.

생각할 리도, 주의를 기울일 리도 없었겠지요.”

한 번도.

단 한 번도.

“그렇지.”

소 태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아이도 진상을 알게 되었겠지. 그때는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걱정되었네.”

“걱정……이요?”

낙리가 반문했다.

소 태사는 촛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창(窓)으로 돌렸다.

후원(後園) 방향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올해 초…….”

노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막내 공자의 앞에서 동백과 동박새의 설화를 언급한 것을 기억하나? 자네가 그 애에게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지.”

낙리의 손이 움찔했다.

“……예.”

“그 설화를 언급한 것은……막내 공자의 마음속에서 과거 사건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네. 사실 가장 큰 죄는 영 대인에게 있지 않나. 막내공자는 그때 아기였고.”

“…….”

“그 애가 과거의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면……억울하게 죽은 이들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속죄하고자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네.”

“그럴 리가…….”

낙리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있겠습니까.”

입술을 깨물었다. 피 맛이 다시 번졌다.

고개를 숙였다.

그림자가 눈을 가렸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소 태사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내가 자네에게 억지로 복수를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낙리는 굳어진 얼굴을 들었다. 얼어붙은 표정이 불빛 아래서 뚜렷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저 제 아비의 공적과 연관시켜 생각했을 뿐, 자신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을 떠올리지 못했지.”

소 태사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 설화를 언급하는 것이, 자네에게도 막내공자에게도 상처가 될까 우려했네. 하지만 상처를 받은 것은 자네뿐이었군.”

잠시 정적이 지나갔다.

“그래서…….”

소 태사는 낙리의 눈을 보며 물었다.

“그 애는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나?”

낙리는 한참을 망설였다.

“……느꼈겠지요.”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물론…….”

그는 주먹을 쥐었다.

“저연에 대한 감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막내 공자는 여전히 진실을 모르니까요.”

“다 알았어도…….”

소 태사는 길게 탄식하였다. 촛불이 함께 흔들렸다.

“지금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거야.”

낙리는 눈을 감았다.

“나에게 이야기를 듣고는, 자신을 대신해 죽은 아기가 있었다는 사실에 꽤 충격을 받은 것 같았네.”

소 태사가 회상하듯 말했다.

“하지만 한 달 후 자네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그 충격에서 벗어나 있었지.”

낙리는 숨을 삼켰다.

“그 이후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군.”

촛불이 일렁거리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소 태사는 새삼 떠오른 듯 물었다.

“작년 여름에도 그 애와 저연의 묘에 가지 않았나?”

낙리의 몸이 굳었다.

“그때, 그 아이가……다른 죽은 이들을 생각하는 기미가 있던가?”

“전혀…….”

낙리는 중얼거렸다,

“전혀 없었습니다.”

그의 입술이 떨렸다.

“이번에는 어쩌다가 기억을 떠올렸는지 모르겠군.”

소 태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으로 마음속 작은 짐을……털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낙리는 무언가 말하려 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정말 피가 났다.

하지만 그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촛불은 여전히 밝았다.

하지만 낙리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은 더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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