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김치볶음밥

아침과 점심 사이의 토요일

by Mr Godot



토요일 아침은 이미 저만치 물러가고,
점심이라 하기엔 아직 이른 시각이었다.
전날 밤과는 다른 얼굴이었다.

그 시절, 대학가 언저리의 오래된 자취촌.
하루 전만 해도 웃음과 음악, 술기운이 골목을 가득 메웠지만
하룻밤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숨을 죽였다.
복도 끝 형광등 불빛마저 희미하게 졸고 있었고,
문틈으로 스미는 찬 공기,
누군가의 방 앞에 놓인 빈 소주병,
어디선가 보글거리는 라면 냄새.

전날의 열기는 각자의 방 속에서 식어가고,
대신 묘하게 눅눅한 고요가 자취촌 전체를 덮었다.

내 방도 마찬가지였다.
책상 위, 마시다 만 소주병 속에는
피다 만 담배꽁초가 가래가 뒤섞여 있었다.
그 역한 냄새에 눈이 번쩍 떠졌고,
속을 달랠 무언가를 찾았다.

프라이팬을 꺼냈다.
김치는 도마 대신 가위로 잘랐다.
설거지를 줄이는 건 자취생의 지혜였다.
참기름을 두른 팬 위에 김치를 올리자,
지글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리고 후라이팬 받침대로 괴테의 전공서적을 꺼냈다.
표지는 기름 얼룩으로 번들거렸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 종잇장엔
이미 김치 냄새가 스며 있었다.
청춘의 고뇌와 김치볶음밥의 향이,
같은 문장 위에서 나란히 눌려 있었다.

밥을 넣고 휘저으며 전날 밤을 떠올렸다.
우리는 술잔을 기울이며
삶을, 사랑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이야기했을지도 모른다.
젊은 베르테르처럼 고뇌했고,
각자의 롯데를 동경했다.

방 한쪽에는 친구가 자고 있었다.
프라이팬째로 밥을 들고 그의 발을 툭 건드렸다.
둘은 말없이 숟가락을 들어 퍼먹었다.
씹는 소리 사이로, 지난밤의 단편들이 불쑥 떠올랐다.
서로의 ‘지난밤’을 조심스레 캐물었고,
변명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한 말들이 흘렀다.

세월이 흘러, 김치볶음밥도, 우리도 변했다.
이제는 먼저 파기름을 내는 여유가 생겼고
햄이나 삼겹살을 잘게 썰어 넣어
맛은 더 깊어졌지만,
책을 받치던 그 무심함은 더 이상 없다.

그 시절 책 위에 눌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우리의 질풍노도였다.
허기를 달래듯 감정을 쏟아붓고,
뜨겁게 사랑하고,
이유 없이 절망하던 날들.

“이대로는 안 돼요.
이렇게 그냥 계속될 수는 없어요.”

로테가 속삭인 게 아니라,
오래전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남긴 음성 메시지였다.
그 시절엔 웃어넘겼지만,
이제는 안다.
그 말이,
변화를 두려워하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도 가끔,
주방 한쪽에서 기름이 튀는 소리를 들으면
김치 냄새 속에 눌려 있던 책장과
그 시절의 우리 얼굴이 불쑥 떠오른다.

허기를 달래듯 사랑을 쏟고,
사랑을 쏟듯 허기를 채우던 날들.
웃으며 절망하고, 절망 속에서도 한 숟가락을 더 뜨던 날들.

그 시절의 베르테르는 이제 책상 위에 없지만,
김치볶음밥처럼
뜨겁고 서툴렀던 그 맛은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서 지글거리며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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