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른자 하나에 담긴 따뜻한 기억
아들 녀석은 계란후라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식탁에 올라와도 김치나 장아찌처럼, 있어도 그만인 반찬쯤으로 여긴다.
접시 위에 노른자가 반쯤 터져 있어도 아랑곳 않고 지나치듯 먹는다.
그러나 나에게 계란후라이는 여전히 식탁의 중심이다.
국그릇 앞, 혹은 밥그릇 옆에 놓인 계란 한 장이
그날의 기분을 결정짓고,
때론 밥맛 없는 날에도 숟가락을 들게 만드는 위로가 된다.
어린 시절, 계란은 귀한 식재료였다.
아무 날에나 꺼내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골집 마당에 풀어놓은 닭들이
그날그날 몇 개의 알을 낳느냐에 따라
메뉴가 정해지곤 했다.
이른 겨울, 마당을 서성이는 암탉들이
한 마리라도 알을 품지 않는 날이면,
어머니는 말없이 된장을 풀어 국을 끓였고,
나는 그날 아침엔 계란후라이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 기대하지 않음조차 배움이었다.
있는 것으로 감사하며 먹는 법을,
어머니의 침묵 속에서 익혀갔다.
어쩌다 알이 여유롭게 났을 땐
밥상에 계란후라이가 올랐다.
그 하나를 다섯 식구가 둘러앉아 바라보던 풍경은
지금도 생생하다.
어머니는 슬쩍 본인의 몫을 내게 건네셨고,
그걸 본 여동생이 투정을 부리면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본인의 것을 건네주었다.
그렇게 하나의 계란이
온 가족의 감정을 부드럽게 감쌌다.
자취방의 식탁은 한결 수월했지만,
어쩐지 더 외로웠다.
계란은 흔해졌지만,
함께 나눌 누군가는 사라졌다.
배달음식을 먹을 여유도,
반찬을 만들 시간도 없던 어느 날들엔
계란후라이 하나에 간장 몇 방울 떨어뜨려
조용히 끼니를 때우곤 했다.
노른자는 종종 터졌고,
프라이팬은 낡았으며,
밥은 어설프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 조촐한 저녁은
하루를 버틴 나를 어딘가에서 위로해주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작은 둥근 노른자가
내 마음 한가운데를 데워주고 있었다는 것을.
지금은 냉장고 문을 열면
계란은 늘 여유 있게 있다.
마트에 가면 한 판씩 사오고,
아이도, 아내도 아무 때나 꺼내 삶거나 굽는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계란후라이를 조심스레 굽는다.
센 불에 올리면 안 된다.
기름이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곤란하다.
노른자가 흐트러지지 않게
불을 줄이고, 뒤집는 타이밍을 기다린다.
계란 하나에 쏟는 이 정성,
그건 아마도 어릴 적 그 식탁의 습관이
몸에 새겨진 탓일 것이다.
나는 아직도 완벽한 노른자를 좋아한다.
그 둥글고 노란 표면에
깨지지 않은 마음 하나가 담겨 있는 것 같아서.
어머니는 여전히 시골집에서
된장찌개를 끓여서
소반 위에 담아내어 주신다.
된장찌개 옆,
낡은 후라이팬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진 계란 하나를 내어주시며
아무 말 없이 밥그릇을 높게 담아 앞에 놓아주신다.
이제 나는 내 아이를 바라보며
그때의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계란후라이는, 내게 어머니의 마음이고
가족의 기억이며
허기진 하루를 데워주는 따뜻한 온기다.
자주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서 더 특별하지 않아 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여전히 특별한 음식이다.
아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안다.
그 둥근 노른자 하나가
식탁 위에 작지만 깊은 위로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그 아이도 자기만의 계란후라이를 기억하게 되리라.
그 시절의 어떤 새벽,
어떤 밥상 위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