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 때리기
중학교 2학년 도덕 수업 시간에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창 밖 먼산을 바라보고 있다가 선생님에게 걸렸다. 수업이 따분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피곤한 눈에게 휴식을 주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는다. 벌칙으로 운동장 한 바퀴를 뛰어서 돌아야 했다. 이후에도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멍 때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 심심찮게 있었다. 먼산바라기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나의 습관으로 굳어졌다. 휴식 시간에는 동료들과 잡담을 하거나 인터넷 검색을 하지 않는다. 나만의 휴식 공간을 찾는다. 회사에서 직원들의 휴식을 위하여 마련해 준 휴게실이 몇 군데 있다. 그곳에서는 한강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밤섬과, 무심히 흘러가는 한강물과, 한강 너머 북한산을 바라보며 피곤한 눈과 정신에 휴식을 줄 수 있다. 여의도 공원도 먼산바라기에서 애용하는 주요 메뉴 중 하나다. 잠시 일을 잊고 머리에 휴식을 주면 다시 일할 힘이 생긴다.
풍경멍
주말의 전원생활에서도 할 일이 없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집 밖을 바라보곤 했다. 연출되지 않고 찍힌 사진 한 장이 있다. 딸애가 카톡으로 보내줘서 알았다. 미르마을에서 음악을 틀어 놓고, 이케아에서 산 의자에 앉아 창문을 열고, 발을 창틀에 올리고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거실에는 봄의 따스한 기운이 가득하고, 밖은 신록이 우거져 있다. 그저 감탄만이 깃든 멍한 얼굴로 편안하게 정원을 응시하고 있는 내가 보였다. 찍히는 줄도 몰랐다. 연출되지 않아서 그런지 자연스럽고 담백해 보였다. 맘에 들어 내 휴대폰의 배경 화면 사진으로 한동안 썼다. 나를 표상하는 사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사진을 보고 있으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라는 책의 내용이 연상된다. 소로는 살던 집을 떠나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자유롭게 2년을 살았다. 소로가 봄 햇살 아래 오두막의 벽에 기대어 월든 호수를 바라보던 심정이 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미르마을 정원 한편에 80Cm 정도 길이에 앉기에 적당한 높이를 가진 자연석 한 점이 방치되어 있었다. 평평한 면이 있어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벤치 용도로 활용하면 좋을 듯싶었다. 무게가 둘이서 들기에도 부담스러워 지렛대를 이용하여 굴리면서 이동을 시켰다. 화단 가장자리에 자리 잡고 있는 편백나무 아래에 위치시켰다. 편백나무 그늘 아래 돌 벤치에 앉아 화단 일에 흘린 땀을 식히곤 했다. 편백나무에 등을 기댄다. 몸은 어떤 힘도 주지 않은 이완 상태다. 풍경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잡념을 끊는다. 거친 숨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쯤이면 풍경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최면 비슷한 가수면 상태에 빠지곤 한다. 몽롱한 정신 상태인지 졸고 있는지 구분이 안된다. 산들바람의 상쾌함이 느껴지고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꿈속은 아닌 모양이다.
연곡리에서 생활할 때도 햇살 따스한 봄이나 가을에 이층 거실에서 아무 생각 없이 밖을 바라보곤 했다. 바람의 흐름에 맞추어 나뭇잎이 살랑거리고 있다. 나뭇잎을 지나온 바람의 손길에 몸을 편안히 내어 준다. 바람의 흐름과 내 숨결이 동조됨을 느낀다. 계곡물이 흘러가는 소리를 무념무상으로 듣는다. 낮은 파동의 계곡물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으면, 머릿속에서 요동치던 파동들이 진정됨을 느낄 수 있다. 높은 파동들이 낮은 파동들에 상쇄되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때로는 이루마가 연주하는 잔잔한 피아노 곡을 배경 음악으로 깐다. 이글스가 호텔 캘리포니아에서 노래한 바와 같이 이곳은 천국이거나 또는 지옥이다. 아무 근심걱정 없고 완벽한 환경은 천국이지만, 아무 일도 없이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지옥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멍 때리기 효과
바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직장인들은 잠깐의 먼산바라기를 할 시간조차 차츰 잃어가고 있는 듯하다.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관찰해 보면 90퍼센트 이상이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하고 있거나 동영상을 보고 있다. 잠깐 쉬는 시간에도 인터넷 쇼핑을 하거나 모바일 게임을 한다. 하루 종일 끊임없이 뇌에 자극을 밀어 넣고 있는 우리들에게 잠깐 동안의 멍 때리기가 필요해 보이는 이유다.
뇌에 특정한 자극을 주지 않고 휴식을 취하게 되면 뇌에 가해진 부하를 줄여서 순기능을 한다. 사람의 뇌는 몸무게의 3% 정도에 불과하지만, 몸이 사용하는 에너지의 약 20%를 사용한다. 일상에서 느끼는 모든 오감에는 뇌가 관여한다. 몸이 건강해도 뇌가 건강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이유다. 건강한 뇌를 위해서는 뇌에도 휴식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며 일, 검색, 공부를 통해 뇌에 쉴 새 없이 정보를 입력한다. 그러나 뇌가 계속해서 정보를 받기만 한다면 스트레스가 쌓여 여러 신체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과학적 실험을 통하여 검증된 사실일까? 미국의 뇌과학자 마커스 라이클 박사는 지난 2001년 뇌영상 장비를 통해 사람이 아무런 인지 활동을 하지 않을 때 활성화되는 뇌의 특정 부위를 알아냈다고 발표했다. 이 부위는 생각에 골몰할 경우 오히려 활동이 줄어들기까지 했다. 라이클 박사는 뇌가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을 때 작동하는 이 특정 부위를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 DMN)라고 명명했다. DMN은 하루 일과 중에서 명상을 즐길 때나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활발한 활동을 한다. 즉, 외부 자극이 없이 편안하게 있을 때다. 이 부위의 발견으로 우리가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해도 뇌가 여전히 몸 전체 산소 소비량의 20%를 차지하는 이유가 설명되기도 했다. 그 후 여러 연구를 통해 뇌가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데 있어서도 DMN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자기의식이 분명치 않은 사람들의 경우 DMN이 정상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멍한 상태에 있으면 뇌에 휴식을 주고 자기의식을 다듬는 활동을 하는 기회가 되며, 집중하고 있을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영감을 얻거나 문제 해결 방안을 스스로 찾게 해 주기 때문이다. 소로는 ‘월든’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덤이 될 땅을 사랑하지만 생애에 끊임없이 활기를 줄 수 있는 영혼과는 교감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멍 때리기는 번거로움에서 떨어져 뇌 속의 복잡함과 혼잡함을 비우고 사색함으로써 내 속의 순수한 영혼을 되살리고 키워나가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