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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경심전 Feb 01. 2023

이방인에서 마을 주민으로

연곡리 마을 사람들

연곡리 마을 구성

연곡리 전원 마을은 10호로 구성되어 있다. 미술을 업으로 살아가시는 분들과 그 가족들이 기획을 해서 조성했다고 한다. 주변에는 세 채의 전원주택이 더 산재해 있다. 열 채의 집은 아래로부터 위로 일렬로 늘어서 있다. 밑에서부터 1호 마지막 집을 10호로 부른다. 1호 집은 내가 전세로 살았던 집이다. 1호 집주인은 10호 주인과는 친척 지간이다. 1호 주인은 애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교육상의 문제로 연곡리를 떠나야 한다고 나에게 얘기했다. 서울에서 식당을 열었다고 하니 생계 문제도 걸려 있었던 모양이다. 2호 집은 모 대학 미술과 교수가 주인이시다. 이 집도 안주인이 시골 생활을 힘들어했고 애 교육 문제도 걸려있어 서울로 살림집을 옮겼다. 이 집은 주말에 주인장이 가끔씩 들려 작업실을 사용하 곤 한다. 나는 곽교수님이라고 불렀다. 3호는 역시 예술가 집인데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다. 4호 집은 안주인이 마을 총무 역할을 하고 있고 부부 모두 예술가다. 이 집과 친하게 지냈고 초기에 이 마을에 안착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5호 집은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 집이다. 초기 멤버는 아니고 중간에 집을 사서 들어왔다고 한다. 나는 함선생님이라고 불렀다. 6호 집은 노부부가 사시는 집이다. 자식 중 누군가가 집을 산 것 같았고, 그 당시에는 부모님들이 거주를 하고 있었다. 7호 집은 연곡리 전원주택 단지 중 유일한 단층집이었다. 집은 잘 가꾸고 있었으나 교류를 한 적은 없다. 8호 집과도 왕래를 해 본 적은 없다. 9호 집은 10호 집의 소유로 전세로 운영을 했고 역시나 알고 지내지 못했다. 10호 집은 모 대학 미술과 교수로 이 마을의 기획자 중 한 명이었다. 전원 마을 바로 옆에는 언론사에 근무하시다가 은퇴 후 부부가 직접 집을 지어 함께 살고 있는 전원주택 한 채가 있다. 언론사에서 근무하다가 은퇴 후 모 대학에서 겸임교수로 후학들을 가르치고 계셨다. 김교수님이라고 불렀다. 


담이 없는 연곡리 마을 주택들
 
연곡리 전원 마을은 집들 간에 담이 없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10호 만이 자그마한 개울로 단절되어 있을 뿐 1호부터 9호까지는 마당을 통하여 다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초기 마을 조성 때 대부분 아는 사람들이 모여서 집 배치를 결정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마당에 나와 보면 어느 집사람들이 밖에 나와 있는지 훤히 다 보인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 집 마당으로 가서 인사를 하고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눈다. 번거롭고 신경 쓰이는 공식 초대는 없었다. 그러면서 2호 4호 5호 6호 집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곽교수와 함선생과는 마당에서 마주칠 때마다 안부를 묻고 자주 미술을 주제로 수다를 떨었다. 나는 내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평소 미술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질문을 던지고 두 사람이 답하는 형식이었다. 예를 들면 왜 현대 미술은 추상화 같은 대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을 추구하게 되었는지, 왜 자기만의 독창적인 영역의 구축이 필요한지, 마르셀 듀샹이 변기를 전시하고 예술이라고 주장한 근거는 무엇인지 등을 물어보았다. 미술 전공이 아닌 사람으로부터 의외의 질문을 받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답을 듣고 나서는 비 전공자로서의 시각에서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하곤 했다. 이런 비판이 이 분들의 생각을 자극하고 다시 답변과 질문이 오갔다. 


마을 사람들과의 교류
 2호 집 곽교수는 주말에 집에 오면 음악을 틀어 놓고 지내는 편이라서 집에 있는지 여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나도 오디오를 취미로 하는 관계로 음악을 틀어 놓고 지냈다. 아래위 집이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있어 큰 볼륨으로 음악을 틀어도 신경 쓰지 않아 좋았다. 특히 4호 총무는 우리가 틀어 놓은 음악을 오고 가며 즐겨 들었고, 마을에 음악이 흘러 좋다고 했다. 곽교수도 우리 집에 놀러 와서 2층에 있는 오디오 시스템으로 음악을 감상하곤 했고, 어느 날에는 자기 집 거실에 있는 오디오 시스템을 구경시켜 주었다. 인티그레이티드 앰프와 턴테이블로 구성된 심플한 구성이었고 추억의 LP를 즐겨 듣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 가지고 있는 중복된 LP 한 장을 선물로 주었는데 연곡리를 떠난 후에도 이 음반을 틀어 볼 때면 곽교수가 생각난다.


4호 5호와는 텃밭에서 자주 만났다. 김교수께서 집 앞 텃밭을 마을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같이 경작하자는 제안을 하셨고 세 집이 동참하게 되었다. 세 집 모두 농사는 지어본 경험이 없는 초보들이라서 하는 일들이 모두 어설펐다. 그나마 농사 경험이 있는 김교수의 도움을 받아 봄 파종을 마쳤다. 서로 연락할 일 없이 텃밭에서 만나 농사나 애들 일 등으로 잡담을 나누었다. 텃밭은 농작물 경작지로보다는 교류의 장소로서 더 잘 기능했다. 초보들의 농사 성적표는 보잘것없었지만 교류의 장으로서 역할은 기대 이상이었다.


6호 집 할아버지는 연세와 그에 따른 병마로 인하여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다. 간간이 마당에 나와서 풀을 뽑는 정도였고 외출은 어려우신 상태였다. 어느 여름날 냉면이나 같이 드시러 가자고 초대를 하였으나 거동이 불편하여 어렵다고 하시며 미안해하셨다. 할머니는 그나마 정정하셔서 할아버지를 극진히 보살피며 사셨다. 언젠가 마을에 빵을 돌린 적이 있는데 그걸 잊지 않으시고 집으로 우리 부부를 초대해 주셨다. 집도 구경시켜 주시고 어떻게 사시는지 정겹게 이야기도 나누었다. 이후에는 주말에 갈 때마다 반갑게 맞아 주시는 모습이 꼭 시골 부모님 댁 방문을 연상시켰다.


김교수 댁과도 텃밭을 매개로 친분이 쌓였고 가끔씩 서로의 집을 오갔다. 식사를 위한 부담스러운 자리는 서로 피했고 차와 다과 정도로 가볍게 친교를 이어갔다. 김교수는 몸은 왜소해 보였으나 은퇴 후 겸임교수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당당해 보였다. 나도 관심 있는 은퇴 후 삶의 모습이라서 궁금한 사항을 꼼꼼하게 물어보았다. 현역일 때 전문 서적 한 권을 출판한 적이 있고 현장 경험을 강점으로 제2의 일자리를 쟁취해 냈다는 말을 새겨 들었다. 김교수 내외의 딸은 출가를 했고 아들은 일본에서 사는 관계로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함이 느껴졌다.


그리움으로 다시 찾은 연곡리
 연곡리를 떠나 용인 미르마을에 살면서도 연곡리가 그리울 때가 많았다. 전원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이어서 첫정이 단단히 든 모양이다. 어느 날 시간을 내서 연곡리를 찾아가 보았다. 총무 집인 4호 집과는 미리 약속을 잡았다. 1호 집을 지날 때 낯선 차가 마당에 서 있는 모습에 묘한 감정이 일었다. 그 자리에 내 차가 서있던 모습만 기억에 남아있었던 지라, 미묘한 감정이 자동차가 집을 지나가는 순간만큼 내 가슴을 지나쳐 갔다. 총무로부터 우리가 연곡리를 떠난 이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사이 6호 집 할아버지는 세상을 등지셨고, 10호 집도 집을 전세 놓고 연곡리를 떠났다. 1호 집에는 우리가 떠나고 과거 환경부 장관을 역임하셨던 분이 부인과 함께 들어와 살고 계셨는데 우리가 같은 세입자라고 했다. 1호 주인이 집을 매물로도 내놓은 상태였는데도 전세로 살고 있다고 했다. 가격이나 집 구조가 세입자와는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4호 집 부부는 여전히 작품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고 중학생이던 아이는 고등학생이 되어 대전으로 홀로 유학을 갔다고 한다. 


세월의 흐름 속에 연곡리 구성원들도 변해가고 있지만 연곡리에 대한 그리움은 아직도 여전하다. 외지인이 다른 마을로 들어가 적응하는데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연곡리에서는 그 과정이 짧고 수월했다. 내가 만났던 모든 분들이 인간미를 간직한 포용력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용인으로 이사하고 나서 서울의 아파트 값이 폭등한 2018년, 불안한 마음에 추격 매매를 했다. 용인집을 정리해야만 했다. 전원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전원으로 돌아가고 싶어 졌다. 서울집이 안정되고 나면 다시 연곡리로 돌아가는 가슴 뛰는 꿈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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