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봄이고
하루 중 아침
아침 일곱 시
진주 같은 이슬 언덕 따라 맺히고
종달새는 창공을 난다
달팽이는 가시나무 위에
하느님은 하늘에
이 세상 모든 것이 행복하다 (영국 로버트 브라우닝, '피파의 노래')
이 시를 읽노라면 행복이란 고요하고 잔잔한 일상이란 생각이 든다. 삶이란 것에 대단한 것이 있을까. 그저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눈에 다가오는 초록과 하늘을 나는 새를 바라보는 일상이 행복 아닐까.
지금 내 앞에서 마주하는 소소한 일상이 행복이다. 행복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가까이서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바라보고 후각으로 냄새를 맡는 것이다.
영국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이 어떠한 삶을 살다 갔는지는 모르지만 하루의 평범한 삶을 시로 적어 읽는 사람들의 피부에 와닿게 하는 능력은 대단한 것 같다.
행복은 늘 자신의 곁에 머물러 있는데도 다른 데 가서 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이 시를 읽으면 자기가 겪는 소소한 일상이 곧 행복이란 것을 깨닫게 되지 않을까.
시가 좋은 것은 대상을 형상화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시로 노래를 부른다고 행복이 따라오거나 불행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가 겪는 지금의 순간을 그대로 시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멋진 시다.
행복은 손에 움켜쥐고 있으면서 다른 데 가서 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딘가로 출근한다는 것,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 아침을 먹는 것, 시장을 보러 가는 것, 저녁에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모두 행복을 나타내는 지수다.
한국의 시와 외국의 시를 읽다 보면 번역을 잘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외국의 시가 가슴에 더 와닿는다. 일상의 삶을 그대로 노래하는 것이 좋다. 거기에 역설이나 비유나 은유를 대입하여 노래하면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외국의 시는 읽으면 그냥 가슴에 와닿고 이해하기 쉬운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렇다고 외국의 시가 한국의 시보다 뛰어나거나 아니면 더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시는 그저 한번 읽으면 가슴에 와닿는 그런 감정이 깃들어야 한다. 시를 읽고 나서 가슴에 감정이 깃들지 않으면 읽어도 읽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도 로버트 브라우닝 시인의 시를 모방하여 직장에서 퇴근하기 직전에 느끼는 감정을 시로 적어본다.
계절은 늦봄이고
하루 중 오후
오후 여섯 시
저문 해는 이울어 노을이 지고
기러기는 짝을 찾아 하늘을 날아가고
무더위는 빌딩 위에
낮달은 쨍쨍한 하늘에
이 세상 모든 것이 평화롭다.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를 모방하여 시를 지어봤지만 누가 시를 짓고 누가 읽어주느냐에 따라 의미와 깊이는 달라진다. 내가 모방하여 지은 시와 브라우닝이 지은 시와 다른 것이 무엇일까.
사실 아무것도 없다. 그저 평화로운 일상을 노래한 것뿐인데 누구의 것이 낫다 못하다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행복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시를 아름답게 규정하고 성장시키는 것은 결국 독자다. 독자가 읽어주고 알아주고 평가해 줄 때 시는 시가 아니라 문학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소설이나 시도 마찬가지다.
에밀리 디킨스, 톨스토이, 헤밍웨이, 펄벅 등 외국의 유명한 소설가나 시인이 우리에게 어떻게 알려졌을까. 그들의 작품을 읽어주고 소설과 시를 문학으로 키워준 결과다.
유럽 등에서 독자나 비평가들이 작품을 평가하고 비평하면서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문학으로 성장시켰다. 외국인이 쓴 시나 한국인이 쓴 시나 시는 똑같다.
누가 시를 읽어주고 비평하면서 문학으로 키울 수 있는 독자나 비평가의 역할만 다를 뿐이다. 문학의 저변층 확대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나 소설을 읽어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노밸 문학상이 나올까.
시나 소설도 너무 문학적 상상력에 취해서 쓸 필요는 없다. 가장 이상적인 시나 소설은 평범한 삶에 있다. 평범한 삶이란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누구에게나 삶에는 희로애락이 들어 있다.
삶의 희로애락을 어떻게 시나 소설에 담아 쓸 것인가가 문제다. 최근 소소한 일상을 쓰는 일상 수필이 선진국에서 유행하고 있다. 자신이 겪는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에세이 형식으로 쓰는 것이 일상 수필이다.
누군가는 그런 글을 신변잡기라고 평가절하하는데 신변잡기에 기쁨과 슬픔과 고통과 괴로움이 들어가면 그것이 곧 시가 되고 소설이 되는 것이다. 문학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아가는 삶에 깃들어 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천변에 산책을 갔다 오고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출근을 준비하는 것 모두가 삶이다. 그런 삶을 에세이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일상 수필이다.
그리고 독자가 일상 수필을 읽어주고 댓글을 달고 비평가가 비평해 주면 일상 수필이 문학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문학적인 삶을 살게 되고 그를 통해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결국 삶은 문학으로 가는 징검다리이자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오늘은 로버트 브라우닝의 '파파의 노래'를 읽으면서 행복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삶에서 행복은 지금 겪는 찰나의 순간에 있는 것이고 내 눈으로 보고 냄새 맡고 발로 밟는 현장에 담겨 있다. 그런 삶의 글을 문학으로 키워주는 사람이 글을 읽어주는 독자와 비평해 주는 비평가다.
나도 비록 신변잡기 수준의 에세이를 쓰고 있지만 누군가가 내 글을 읽어주고 비평해 주는 행복을 누리면서 남은 여생을 변변찮은 글이라도 쓰면서 평안하게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