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라나라나
신혼여행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갔을 때였다.
프랑스 지하철에서 여행자용 티켓을 끊는데 유난히 직원이 짜증을 내며 온갖 신경질을 다 냈다.
처음 나와보는 유럽이고, 유러피안의 정서를 잘 몰라서 그런가 하고 넘어가기엔, 그녀의 행동은 점점 도를 지나치고 있었다.
가만 보니 우리 동양인에 대한 무시와 짜증이었다.
우리가 어리바리했나. 아니 그렇지 않다.
여행 책자에 실린 필요한 티켓을 앞의 관광객이 똑같이 사간 것도 보았고, 우리도 사진까지 짚어가며 같은 걸 달라고 이야기했지만, 못 알아들은 척하며 신경질을 부리는데 영어로 싸울 만한 실력은 안되고, 영어는 되지만 순둥순둥한 신랑을 옆에서 보고 있자니 속에서 점점 부아가 치밀었다.
티켓 두 장 달라는데, 뭐가 그리 어려워, 안 되겠다 싶었다.
"오빠, 돈 나한테 주고 잠깐만 나와봐."
유리 창구에 최대한 얼굴을 붙이고 작은 두 눈을 부릅뜬 다음, 있는 힘껏 손바닥을 꽝하고 바닥에 내리치며 돈을 들이밀었다.
"Two Ticket!!. please!!! "
조곤조곤 설명하던 신랑의 목소리와 달리 쩌렁한 내 목소리에 오마나 깜짝이야.표정으로 놀란 직원이 순간 움찔하더니 얌전하면서도 신속하게 티켓을 주고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분고분 잔돈을 돌려주는 것이 아닌가. 부드러운 인사까지 곁들이며.
이미 맘이 상한 나는 뒤도 안 보고 걸어갔고, 순둥이 신랑은 그분을 향해 엄지 척에 구뤠잇~! 을 연발하며 훈훈한 마무리를 하고 계셨다.
내가 백인이었음 이렇게까지 했겠나, 아시안으로서의 억울함이 솟아났다.
불과 십몇 년 전만 해도 한국의 지하철에 아시안계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피부색이 우리보다 가무잡잡한 그들을 보면 왠지 옆자리에 바로 앉기가 꺼려지고 그들이 아무 짓도 안 했는데도 짙은 눈썹과 눈매가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들도 프랑스에서의 나처럼 우리나라에서 어설픈 한국말을 섞어가며 물건을 구입하고 이동을 했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슬쩍슬쩍 내비치는 불편한 시선을 느끼며.
그들을 바라보던 내 눈빛도 그 속내는 프랑스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미안하다.
생각도,마음 씀씀이도 좁디좁았다.
물론 프랑스 이후의 여행에서는 친절하고 좋은 백인 분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피부 색깔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 됨됨이의 차이란 걸 잘 알고 있지만, 아시아 국가를 여행할 때보다,
피부색도 체구도 다른 그들 사이에서 더 긴장하고 주눅이 드는 건 내 성격상 어쩔 수 없다.
눈치도 많이 보고 소심하고 쫄보가 잘 되는 나에게 싱가포르는 그런 면에서 안전한 곳이다.
싱가포르에서는 내가 한국인이라서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여러 혜택을 받기도 한다.
어딜 가든 어설픈 내 영어에 오히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한국말 인사를 듣고,
심지어 얼마 전엔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기사 아저씨가 '안녕하세요?' 한국말로 인사해주셔서 깜짝 놀란 적도 있다.
올해 아이가 중학생이 되어 가입한 싱가포르 공립학교 학부모 모임 채팅방에서도 간단한 문자로 인사만 나누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읽고만 있었다.
대표이신 엄마가 조용히 읽기만 하는 엄마들도 말 좀 하라고 부추기는데 단톡방에 말 좀 하려면 이미 다른 이야기로 후루룩 지나가서 내 영어 타이핑 속도로는 도통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안되겠다 싶어 대표 엄마에게 개인톡을 보냈다.
안녕. 나 지오 엄마야.
난 코리안이고,
나도 말하고 싶은데 손가락이 안 따라주네.
나 열심히 읽고 따라갈 테니 이해해줄래?
바로 따뜻한 문자가 날아왔다.
' 안녕하세요.'
한 글자 또박또박 한글로 적혀서.
한국 드라마를 너무 좋아한다며 언제든지 이해가 안 가는 말이 있으면 본인이 구글 번역기를 돌려
한글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친절한 메세지를 받으며 친절한 싱가포리언에게 고맙고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참 좋았다.
얼마 전 읽은 정세랑 작가님의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책 중에서
아시아 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싱가포르 가든스 바이 더 베이 폐장 직전 조명 쇼에서 '첨밀밀'이 울려 퍼지자 아시아인들은 국적에 상관없이 찡한 얼굴을 했다. 어디에서 온 아시아인이든 '첨밀밀' 에는 울컥해버리는 것이다. 왜 눈물을 글썽이는지 아시아 밖에서 온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했는데, 그 노래를 들으며 동명의 영화를 떠올리지 못하다니 큰 걸 놓치고 계십니다...
아시아에는 아시아만의 매력이 있고, 아시아인만큼 아시아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은 또 없지 않을까? 말하지 않아도 즉각적으로 전달되는 것들이 있다. 그러면서도 겹침 영역을 벗어나는 다채로운 다름을 비교해볼 수 있어 재미있다.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작가님
정말 공감하며 싱가포르의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예전에 일본을 여행하면, 우리나라와 다른 부분도 많지만, 기본적으로 겹치는 부분들이 있었다.
싱가포르도 말레이시아도 인도네시아도 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시아권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일단 비슷한 체구와 피부 색깔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는 그 무엇이 있고 통하는 그 무엇도 있다.
코로나 전 싱가포르에서 가까운 동남아시아의 나라들을 쉽게 놀러갈 수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때마다 별 감흥 없이 휴가지 놀러 간다는 마음으로 보낸 게 아쉽다.
다시 하늘길이 열리면 이 어여쁜 아시아 국가들을 같은 아시안으로서 더 자세히 들여다보며 찬찬히 감탄해보고 싶다.